74화
“흠.”
나는 애매한 시간 때문에 고민했다. 한스와 제인의 동아리에 들러서 놀고 왔더니 벌써 교대 시간이 훌쩍 다가와 있었다.
다른 무언가를 하기에는 부족하고, 피오르와 교대를 하기에는 다소 이른 감이 있는 시간이었다.
“딱히 할 것도 없는데 그냥 빨리 가야겠다.”
둘 다 일하느라 배고플 수도 있으니까 뭐라도 사 가야지.
나는 동아리실로 가는 중에 보이는 적당한 요깃거리를 찾았다.
그러다 내 눈에 띈 문구가 있었으니.
<사장님이 맛있고, 샌드위치가 친절해요!>
아, 다른 건 몰라도 샌드위치가 친절한 건 못 참지.
나는 홀린 듯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샌드위치를 구매했다.
굉장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아니, 친절해 보이는 샌드위치였다. 만족스럽게 가방에 넣고 있을 때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밀쳐져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보고 말았다.
저 멀리 에르한을 시종처럼 달고 다니는 렉스 베고니아를.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 나는 본능적으로 등을 돌리며 뛰었다.
그저 미친 듯이 뛰었다.
혹여나 나를 발견하고 쫓아오고 있을까, 몇 번이고 길을 꼬아 건물을 벗어났다.
건물을 벗어난 후에야 나는 간신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내 실책이었다.
아카데미의 학술제가 열리는 날이면 일반인도 얼마든지 들어 올 수 있다는 걸 왜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유일하게 외부인의 입장을 허용하는 날이었는데.
무의식중에 작년에 아무 일도 없었으니 이번 연도에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끔찍했다.
졸업 후를 걱정한 적은 있어도, 아카데미에 다닐 때만큼은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체력이 달려 뜀박질이 늦어졌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미 렉스 베고니아를 처음 발견한 곳에서는 상당히 떨어졌다는 것을 아는데. 그래도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잠깐!”
일순간 누군가가 내 손목을 억세게 잡아 왔다.
털컥, 심장이 내려앉는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끝인가.
탈력감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오들오들 떨며 몸을 움츠렸다.
이미 손끝에는 핏기가 없었다. 통증이 일 만큼 저릿저릿했다.
“어머나! 학생 괜찮아요? 세상에, 나 때문에 많이 놀랐나 봐.”
아.
렉스 베고니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굉장히 얇고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를 바라봤다.
상당히 가녀려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두려운 마음에 주변을 살펴봤지만, 렉스 베고니아는 물론이고 에르한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기에 이곳에는 오로지 여성과 나뿐이었다.
나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심장이 빠르게 맥동하며 갑작스럽게 뛴 여파가 그제야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가 이런 나를 보며 눈썹을 그러모았다.
“미안해요, 학생. 저 때문에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아뇨, 아뇨, 아뇨. 괜찮, 저는 괜찮아요. 아무 문제 없어요.”
딱 봐도 괜찮지 않은 대답에, 그녀가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내 뺨에 손을 올렸다.
“진정해요. 심호흡하고.”
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숲속에서 숨을 쉬듯 마음을 안정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어느 정도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그녀가 다시금 사과했다.
“미안해요. 제가 절대 달리기가 느린 편이 아닌데, 학생이 어찌나 열심히 뛰던지. 이대로는 놓칠 것 같아서 급하게 붙잡았어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제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너무 빨리 뛰었죠. 죄송합니다.”
“꾸중하려고 붙잡은 건 아니에요. 이거…….”
여성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건넸다. 없어진 줄도 몰랐던 내 가방이었다.
“떨어뜨리고도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쫓아왔어요.”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해요. 하마터면 방금 산 샌드위치까지 전부 잃을 뻔했네요.”
여성이 나긋하게 웃었다. 봄 햇살 같은 따뜻한 웃음이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학생,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네?”
다소 당황스러우면서도 과거의 인연 중에 저런 언니가 있었나 생각해 봤다.
내 인간관계는 언제나 넓은 편은 아니었기에, 금방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나는 저 언니와 만난 적이 없다.
아무래도 닮은 누군가와 착각한 듯했다.
입을 열어 만난 적 없는 것 같다 하려는 순간, 그녀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내가 늙어서 그런가 주책이네.”
늙었다기에는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아 보이는 외모인데.
멋쩍은 듯 호호 웃던 언니의 시선이 내 명찰에 닿았다. 그녀의 표정이 굳는다.
그녀는 잠시 입을 벌렸다가 명찰과 내 얼굴을 번갈아 봤다.
“……리엔? 설마 네가 리엔이니?”
“네에……. 일단 제 이름이 리엔이 맞긴 한데요.”
그쪽 언니는 처음 보거든요.
충분히 뒷말을 유추할 수 있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흥분하며 내 손을 잡았다.
“세상에!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컸다고?”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를 아세요?”
“알고말고. 리사와 루드는 잘 지내고 있니? 어쩐지! 흑발과 흑안은 그렇다 치고, 외모가 리사와 똑 닮았다 했어!”
그녀의 입술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말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리사는 돌아가신 엄마의 이름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녀가 엄마와 어떤 관계였는지 유추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리……사는 저희 어머니가 맞아요. 근데 루드는 누군지 모르겠네요.”
그녀의 미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와락 일그러졌다.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희 아버지 이름이 이벨루안하르드가 아니야?”
정신이 없어서 앞쪽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하지만 뒤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 있어 쉽게 캐치해 냈다.
“하르드라면 저희 아버지가 맞긴 한데…….”
내 말에 그녀가 순간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읊조렸다.
“아아. 그 노인네 때문에…….”
“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이번에는 집중하고 있었는데도 그녀가 너무 작게 읊조린 나머지 듣지 못했다.
그녀는 어색한 얼굴을 했다가 금세 지워내고는 싱긋 웃었다.
“루드는 내가 너희 아버지를 부를 때 쓰던 애칭이란다. 신경 쓸 것 없어.”
애칭?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언니가 우리 아빠를 애칭으로 부를 일이 뭐가 있지?
혼란스러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아빠의 이름이 하르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아바스칸투스 제국 출신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짧은 이름을 가진 것은, 아빠가 성을 가지지 못한 이유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르드가 풀 네임이 아닌, 애칭 같은 것에 불과했다니.
아까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보려는데 이름이 길어서 잘 생각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아바스칸투스 제국식 이름 같으니라고.
옅은 배신감과 서운한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아칸더스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한때는 엄마와 함께 그 세 명이 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름을 숨길 수가 있는지.
나는 앞을 보며 괜히 그녀를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언니, 이걸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죠.
그녀가 내 눈빛을 의도적으로 못 본 척하고는 물었다.
“그래서, 리엔. 리사와 하르드는 잘 지내고 있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전혀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그녀가 부모님과 어떤 사이였는지는 몰라도, 아직 돌아가신 소식을 듣지 못한 듯했다.
나는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그녀가 답을 해 줄 것 같은 것부터 풀어 나가기로 했다.
“그 전에 저희 부모님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 묻고 싶어요.”
그러자 그녀는 코를 찡그리며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어냈다.
“놀라지 말고 들으렴. 너희 부모님을 만나게 해 준 건 나였단다. 둘 다 내 친구였지!”
“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에, 정신이 이상한 사람한테 잘못 걸렸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쿡쿡 웃으며 쓰고 있던 로브 후드를 벗어 귀를 보여 주었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귀.
“엘프?”
그녀의 얼굴에 긍정이 떠올랐다.
“이제 의문은 풀렸니? 겉보기에는 어려 보여도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보다 오래 살았을 거란다.”
그렇다면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엘프는 수명이 1,000세 전후로 인간의 열 배는 족히 넘었다.
그들의 노화는 성인이 된 후 거의 멈추다시피 했으니, 그녀의 말은 허언이 아닐 테다.
나는 신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우연히 부모님의 친구를 만나다니.
새삼 제국도 좁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옛 인연을 만났다는 반가움도 잠시였다. 비보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나는 곧 마음을 다잡고 그녀에게 사실을 전했다.
“안타깝지만, 부모님은 6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좋은 소식 전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뭐라고?”
그녀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가 이내 충격으로 번져 갔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녀의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울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고는 악에 받쳐 묻는다.
“혹시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거니? 검을 잘 다루는 자였어?”
묘하게 확신하는 듯한 어투였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저희 부모님이 그런 원한을 살 분이시던가요?”
내 말에 그녀는 긴장이 탁 풀린 듯 몸에 힘을 뺐다. 그나마 안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너희 부모님은 그럴 사람이 아니지. ……그럼 어떻게 흙으로 돌아갔는지 물어도 되겠니?”
“병사로 돌아가셨어요.”
“그렇구나…….”
그녀는 감정을 다스리려는 것처럼 몇 번이나 마른세수를 하고는 걱정스레 말했다. 한층 조심스러워진 어조였다.
“너는 지금 괜찮니? 경제적으로는 어때?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고?”
그 물음에 상황과 맞지 않음에도 어쩐지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엄마 아빠의 친구라더니, 정말 좋은 친구를 뒀던 것 같다.
덕분에 덤덤하게 말이 나왔다.
“돌아가시고 얼마간은 심적으로 힘들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그럼 지금은 혼자 사는 거니?”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요. 저를 사랑해 주시는 이모 밑에서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의 낯빛이 조금 돌아온다.
“그래, 리사가 그렇게 입이 닳도록 칭찬했던 동생이라면 믿을 수 있겠구나.”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내 머리칼을 쓸며 아스라이 답했다.
“그럼 됐다. 너만 행복하다면 됐어.”
“다른 건 물어보시지 않나요?”
그간 친우와 만나지 못했던 세월이 몇 년인데, 이렇게 빠르게 초연할 수가 있나?
그녀는 씁쓸하게 답했다.
“엘프들은 말이야. 인간을 친구로 맞을 때는 언제나 헤어짐을 각오하고 만난단다. 눈 깜빡할 새에 이별이 찾아오기 때문이지.”
깊은 감정이 전해져 왔다.
나이가 들어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홀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야.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갈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아픈 듯 웃던 그녀가 곧 단호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하지만 이게 우리의 숙명이란다, 리엔.”
“오래 사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네요.”
“그런 거지.”
가볍게 웃은 그녀는 벗었던 후드를 다시 올려 입었다.
“엘프가 인간과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는 엘프인 쪽의 부모보다 더 일찍 죽는다는 걸 알고 있니?”
주저앉은 나를 부축해 일으키고는 자상히 흙을 털어 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와 함께한 시간이 행복했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해.”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