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만남과 헤어짐은 빨랐다.
끝까지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던 그녀는 헤어질 때만큼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찾아 준 가방을 단단히 여미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동아리실로 돌아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혹여 에르한과 렉스 베고니아를 만날까 부러 멀리 돌아간 탓이었다.
그대로 기숙사로 가서 종일 시간을 보내면 그들을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오후에는 나랑 같이 다른 동아리 구경하러 다닐래?’
‘그럼 이따가 보자.’
카르시온과 데이트를 약속했다. 일방적으로 한 약속이었지만, 이렇게 쉽게 어길 수는 없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최면을 걸듯이 되뇌었다.
무서워할 필요 없다. 무서워할 필요 없다…….
에르한과 렉스 베고니아가 나를 발견하지만 못 하면 되는 거다.
“카르시온에게 얼굴 변형 마법을 걸어 달라고 해야겠어.”
무사히 도착한 동아리실 앞은 사람이 더욱 늘어나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을 지나치며 문 입구 쪽으로 가려는데 중간에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아. 리엔이군요.”
“네가 왜 여기 있어?”
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저는 리엔의 동아리에서 하는 체험을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의외의 손님이라서 물어보긴 했는데, 막상 생각해 보니까 안 될 건 또 없었다.
줄도 잘 서고 있고, 돈도 있을 테고. 문제 될 부분은 없었으니.
“근데 괜찮겠어? 내가 생각하기에 너는 체험을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쿤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비밀을 말해 주듯 작게 속삭였다.
“카온이 일일이 환상 마법을 걸고 있는 건 알고 있지?”
갑작스레 다가와 당황스러웠는지, 그가 조금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법의 수위도 걔가 조절하고 있거든. 그런데 손님이 너라는 걸 알면 카온이 가만히 있을까?”
살풋 웃음을 흘리며 그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쿤이 슬쩍 발을 옮기며 줄에서 빠져나온다.
“조언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리엔의 동아리가 운영하는 것이니, 체험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목숨을 잃을 뻔했군요.”
“에이, 목숨까지야…….”
나는 쿤을 본 김에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건넸다.
여러 개를 구매한 덕분에 그의 몫까지 충분했다.
“쿤. 배고프면 샌드위치 먹을래?”
그는 내가 들고 있는 샌드위치를 잠시 응시하다가 손을 뻗었다.
“배고프지는 않지만, 리엔이 주신 것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쿤이 바로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겨 입으로 가져갔다.
건네줄 때는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더니.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은 그가 고개를 희한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리엔은 이런 맛을 좋아합니까?”
“그건 왜 물어? 혹시 상했어?”
“아니요. 상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제 취향은 아니군요. 저는 평범한 샌드위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샌드위치의 단면을 살폈다.
어떻게 봐도 기본 재료들로 구성된 평범한 샌드위치다.
물론 친절한 샌드위치라는 점이 조금 달랐지만, 그건 그냥 홍보용 문구였지 않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먹은 게 평범 그 자체인데.”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전에 리엔이 직접 만들었다는 샌드위치 같은 것이 일반적인 것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건 우리 아빠가 내게 전수한 특제 소스를 바른 거였다니까.”
쿤은 그때의 당황스러운 기억이 떠올랐는지 아차 싶은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저, 절대 리엔의 샌드위치가 맛없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평범하다는 건 못해도 중간은 간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를 말렸다.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애써 포장하지 않아도 돼.”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 알겠다니까.”
쿤의 동공에 크나큰 지진이 일고 있을 때였다.
그의 뒤쪽으로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쿤 님,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대부님?”
쿤의 덩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었는데. 목소리의 주인이 가까워지자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쿤이 대부라 부른 사람은 아침에 만나 여러 가지 도움을 드렸던 할아버지였다.
“대부님이 이곳까지 걸음 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사실 저도 제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나는 예상지 못한 인연에 놀라 토끼 눈이 되었다.
손주처럼 키웠다는 아이가 쿤이었다고?
“할아버지?”
그도 나를 발견하고 놀랐는지 다가오던 걸음을 뚝 멈추고는 멍하니 나를 응시했다.
“너는……?”
할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쿤이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두 분 아는 사이십니까?”
“아는 사이라면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나?”
확신이 담기지 않은 애매한 대답 때문인지, 쿤의 얼굴에 의아함이 해소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나서서 정리를 도와줬다.
“아침에 이 아이와 우연히 만났었습니다. 제가 큰 도움을 받았지요.”
도움을 받았다는 말에 쿤은 바로 납득하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랬군요. 역시 리엔은…….”
쿤이 이해한 듯 보이자 이번에는 할아버지의 차례였다.
“그보다, 쿤 님은 어떻게 이 아이와 함께 있는 겁니까?”
“간단히 소개를 해 드려야겠네요.”
쿤은 할아버지와 내 사이에 서서 한 명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대부님. 이쪽은 제 다한증과 무한증 치료제를 만들어 준 분입니다.”
“허어, 이 아이가 그……?”
“네. 제 은인입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쿤이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며 소개했다.
“리엔, 이분은 제 대부입니다. 바쁜 아버지와 숲으로 돌아간 어머니 대신 저를 키우다시피 하신 분이시죠.”
황자인 쿤의 대부라.
낮은 신분은 아니겠네. 어쩐지 기백이 남다르다 했다.
“손주처럼 키우셨다는 아이가 쿤일 줄은 몰랐어요.”
“……나도 네가 쿤 님의 고질병을 고쳐 준 아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상황이 묘한 것 같았다.
나는 쿤에게 반말을 하고 할아버지에게는 존댓말을 하는데,
할아버지는 내게 반말을 하고 쿤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니.
다행히도 할아버지는 내가 황자인 쿤에게 말을 놓는다고 불쾌감은 느끼지는 않은 듯했다.
“하여튼 마침 잘 오셨습니다, 대부님.”
쿤의 환대에 할아버지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마침이라니요?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쿤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이미 그가 한입 베어 문 것이었다.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샌드위치를 한번 맛봐 주시겠습니까?”
나는 쿤의 부탁을 듣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렇게까지 증명해야 할 일인가.
“알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쿤이 먹은 흔적을 보고서도 거리낌 없이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입 안에 넣고 씹자마자 쿤의 질문이 날아온다.
“어떻습니까?”
할아버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저 음식을 씹고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평범한 샌드위치군요.”
그의 평가가 내려진 순간, 쿤과 나의 희비가 엇갈렸다.
“……예?”
“봐봐. 할아버지도 평범하다고 하시잖아.”
쿤은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그러모았다.
“하지만 대부님께서 저를 데리고 산에 갈 때면 항상 가져오셨던 그 샌드위치는…….”
나는 쿤의 변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잠시 잊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맞다. 교대 시간!
“세상에, 쿤. 나 교대 시간에 늦은 것 같거든?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아.”
“네? 아아, 피오르와 교대할 시간이군요.”
“응. 아침에도 본의 아니게 늦었는데, 빨리 가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너도 이제 슬슬 미스 아레나 준비하러 가야 하지 않아?”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는걸요.”
“하긴, 네가 알아서 시간 분배 잘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아침에 우승을 향해 눈을 불태우던 제인이 떠올랐다.
“……근데 이번에 널 분장 해 주기로 한 거 제인 아니야?”
“그렇습니다.”
“오……. 혹시 몰라서 말하는 건데 네가 분장하기로 한 곳에 늦게 도착한다면, 제인이 길길이 날뛸지 몰라.”
오한이 들었는지 쿤이 자신의 팔을 슥슥 문질렀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반응에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는 가 볼게. 할아버지도 즐거운 학술제 되세요.”
* * *
카리스는 리엔이 달려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자꾸 눈에 밟히는 아이였다.
아침에 헤어지고 난 이후에도 아이가 제게 준 진통제의 빈 약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부님.”
쿤의 부름에 그가 겨우 시선을 거두며 답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이 샌드위치가 정말 평범한 맛입니까?”
“아직 그 얘기입니까? 아까 대답해 드렸지 않습니까.”
“그럼 대부님께서 제게 매번 만들어 주시던 샌드위치는 뭡니까?”
“황자님. 그건 제가 젊었을 적 직접 개발한 소스가 들어 있는 샌드위치입니다. 당연히 평범하다고 할 수 없지요.”
황자로 자라온 쿤이 손으로 들고 먹는 샌드위치를 여러 곳에서 접했을 리 없었다.
그가 먹어 본 샌드위치는 카리스가 손수 만들어 오곤 했던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엔이 저번에 만들어 준 샌드위치도 대부님의 것과 맛이 같았습니다.”
카리스의 얼굴이 드물게 당황으로 물들었다.
“네? 그럴 리가…….”
“그러고 보니 리엔은 아버지에게 배운 특제 소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실은 대부님께서 개발한 게 아니라 그저 널리 알려진 조제법인 것 아닙니까?”
“잠시만!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카리스의 과한 반응에 놀라 쿤이 다소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널리 알려진 조제법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 전에 말입니다.”
“리엔이 아버지에게 배운 특제 소스라고 말했던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특제 소스…….”
카리스는 벼락이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개발한 그 소스는 지금까지 사랑하는 제 아들 말고는 알려 준 적 없는 것이었다.
흔하지 않은 흑발에 흑안.
아들이 데려왔던 여인과 같은 약초가.
누구에게도 알려 준 적 없던 소스의 비법을 알고 있는 것까지.
모두가 거짓말처럼 하나의 사실만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리엔의 나이도 아들이 제 품을 벗어난 시기와도 거의 딱 맞아떨어진다.
어쩌면, 어쩌면…….
후회로 가득했던 지난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리엔이라는 아이가 제 손주인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확인이 필요했다.
아이를 만나 부모에 관해 물어본다면 금방 알 수 있을 터였다.
십수 년 만에 찾은 아들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에, 그의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부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쿤이 카리스를 불러봤다.
하지만 그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빠져 오랫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