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텔레포트로 도망쳐 온 곳은 카르시온과 내가 있던 곳의 반대편 건물이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복도를 걸었다.
“앤, 근데 손에 든 건 뭐야?”
“아, 이거? 거기서 가져왔어. 남은 한 발은 던지지 못했지만, 점수는 넘었으니 괜찮잖아?”
“인형을 가지고 싶었던 거였으면 지금이라도 가서 털어 올까?”
“……그건 도둑질이잖아. 그리고 복수는 했으니까 됐어.”
나는 씩 웃으며 카르시온의 손에 강아지 인형을 쥐여 주었다.
“이건 선물.”
“어……?”
“널 닮은 것 같아서 일부러 이 인형으로 가져왔어.”
카르시온이 벙찐 얼굴로 강아지 인형을 받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에 나는 부러 시무룩한 척 눈썹을 내리깔았다.
“마음에 안 들어?”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카르시온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네가 준 건데 마음에 들지 않을 리 없잖아……. 그저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것뿐이야.”
고개를 숙여 먹먹한 눈빛으로 인형을 빤히 응시하는 모습을 보니 속에서 장난기가 올라왔다.
“어떻게 알았어? 맞아. 사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네가 바라왔던 것을 보여 주는 꿈일 뿐이지.”
내 진지한 어조에 카르시온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기대감이 서린 표정이었다.
“그럼 손잡아도 돼? 꿈이잖아.”
이런 기회주의자가……?
꿈이 아니란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음. 생각해 보니 손 정도면 순수한 요구인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덥석 잡은 것도 아니고 조심스럽게 의사까지 물어왔으니.
나는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왜? 차라리 뽀뽀해 달라고 그러지?”
파격적인 발언에 카르시온의 눈이 크게 뜨이며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러다 결국에는……
펑.
아, 터졌다.
그는 폭탄처럼 터져서 헤롱헤롱한 얼굴로 잘도 입을 열었다.
“해…… 줄 거야?”
“아니. 농담이었는데.”
살짝 혀를 내밀며 농담이었다는 말에 쐐기를 박자, 그는 왠지 모르게 안심한 표정을 했다.
“……평소의 앤이 맞네.”
“아쉽지는 않나 보네?”
생각한 것보다 쉽게 포기하길래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카르시온의 눈빛이 다시 반짝하고 빛났다.
“아쉽다고 하면 해 줄 거야?”
“아니.”
“……너무해.”
대번에 풀죽은 얼굴을 하며 물러나는 카르시온이었다.
그 와중에 손에 들린 강아지 인형은 어찌나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지. 순간 십 년은 가지고 다닌 애착 인형인 줄 알았다.
나는 그런 카르시온을 익숙하게 달래고는 다시 부스 구경을 이어 나갔다.
한참을 둘러보던 중 눈에 띈 사람이 있었으니…….
“한스?”
놀라 걸음을 멈추고 한스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는 사행성이 굉장히 짙어 보이는 부스에서 카드를 쥐고 있었다.
여럿이서 포커를 하는 중인 것 같은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스의 눈이 반쯤 돌아가 있었다는 거다.
“후달려? 후달리면 뒈지시든가.”
상대방의 도발에 한스는 들고 있던 카드로 이마를 짚고는 비열한 웃음을 지어냈다.
“쿠흐흐, 후달리냐고? 내가?”
그러고는 자신의 앞에 수북이 쌓여 있던 코인을 전부 내미는 한스.
“올인.”
“허억.”
그의 행보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스보다 많은 코인을 번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산처럼 쌓인 코인을 전부 걸겠다고 해서 저런 반응이 나온 것 같았다.
그에 정말로 겁이 난 듯한 몇몇이 카드를 내려놓으며 줄줄이 게임을 포기했다.
결국, 한스를 포함해 두 명만 남게 되어 버린 게임.
“흥, 내가 네 허접한 속임수에 넘어갈 것 같아? 저도 받겠습니다!”
상대방도 가지고 있던 코인을 모두 걸며 한스의 도박 수를 받았다.
그때였다. 한스의 입가에 희열 섞인 웃음이 번진 것은.
그의 웃음은 마치 낚시꾼이 대어를 낚았을 때의 표정과 같았다.
웃음을 생생히 목격한 나는 눈을 끔뻑이며 생각했다.
승자는 한스겠구나, 하고.
“그럼 두 분 동시에 카드 공개해 주세요.”
딜러 역할을 하던 학생이 침착하게 공개를 선포하자 카드를 내려놓는 두 사람.
먼저 흥분하며 일어난 것은 한스와 대적한 상대였다.
“말도 안 돼! 여기서 풀 하우스가 터진다고? 당장 저 자식의 몸을 수색해 봐야 해!”
상대방이 자신을 의심하거나 말거나 한스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려는 듯 두 팔을 벌리며 산처럼 쌓인 코인을 끌어안았다.
나는 옆에 있는 카르시온을 툭 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온, 방금 한스가 무슨 수를 쓴 거 맞지?”
“응. 마법은 아니고, 그냥 손이 빠르네. 기술이 좋아.”
“와우.”
남의 사업장에서 밑장 빼기라니. 간도 크지.
잠시 후 자잘한 코인을 모두 높은 코인으로 바꾼 한스는, 코인을 열심히 세더니 돌연 반절을 떼어 내 공중에 흩뿌렸다.
“난 딴 것의 반만 가져가.”
시크한 도박사 역할에 아주 심취한 모양이었다.
쟤가 원래 저런 캐릭터였나…….
사실 한스가 딴 코인으로 받아 갈 수 있는 상품은 딱 하나였다.
아무리 많은 코인을 가지고 있어 봤자 라는 거다. 진짜 도박이 아니었으니 이 정도 룰은 당연했다.
그래서 저렇게 미련 없이 코인을 뿌릴 수 있던 거겠지.
제인에게 다시금 한스와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해야 하나 생각할 때였다.
한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딜러가 정색하며 말했다.
“남은 코인은 상대방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네.”
바로 쭈그러들며 코인을 줍기 시작하는 한스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분위기 파악은 잘해서 다행이라고 할지.
속으로 저 자식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카르시온이 학술제의 하이라이트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 왔다.
“앤, 조금 있으면 미스 아레나 시작이야.”
“아, 그래? 그럼 구경은 여기까지 하고 갈까. 좋은 자리에서 지켜봐야지.”
“빨리 가고 싶으면 텔레포트로 갈래?”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그가 내민 손을 발견하고는 픽 웃었다.
텔레포트를 하려면 신체 접촉이 필요했다. 아까 도망칠 때도 안 그런 척하면서 좋아했었지.
나도 카르시온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막상 그가 저렇게 원하는 모습을 보니 청개구리 심보가 올라왔다.
“굳이? 시간도 많은데 천천히 걸어가자.”
“……그러지 뭐.”
덤덤한 얼굴로 손을 내리는 것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너무 재미있잖아.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한 번 놀렸으니 슬쩍 손을 잡아 볼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처음 보는 남성과 말감이가 함께 서 있었다.
나는 말감이를 아는 체하려다가 지금은 얼굴에 변형 마법을 걸었다는 것을 상기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내 얼굴을 알아본 건 아닐 텐데. 말감이가 말을 걸어 올 줄이야.
완전 범죄를 위해 명찰은 이미 떼어 버린 상태라 다행이었다.
뜻밖에도, 용건이 있었던 것은 말감이가 아니라 남성이었는지 그가 한 발짝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어쩐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모습으로 입술을 뗐다.
“혹시 레이디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제 이름을요?”
나는 오늘따라 이름을 물어오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며 답했다.
“그건 왜 물으시는 건데요?”
“분위기가 너무 제 취향이라고 하면, 싫어하실 겁니까?”
“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대답을 할 생각도 못 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새로운 자살 시도 방법인가?
카르시온과 함께 있을 때 들어 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아카데미에서는 이미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파다하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카르시온이 원해서 퍼지게 된 소문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침으로 발라 놓은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났달까.
아무래도 얼굴 변형 마법의 부작용이 여기서 나타나는 듯했다.
곁눈질로 카르시온을 훔쳐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의 몸 주변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급한 대로 손을 들어 카르시온의 입을 틀어막았다. 가만히 놔두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으로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이름을 알려 드리는 건 힘들 것 같네요. 남자친구가 있어서요.”
그러자 남성의 시선이 카르시온에게 닿았다.
“이쪽이 남자친구?”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냥 쫓아내려고 하는 말이니까 괜찮겠지.
“네. 제 남자친구예요.”
떨어져 나갈 줄 알았던 남성은 되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하지만 그런 거치고는 아까부터 스킨십 하나 없던데요. 분위기도 연인이 아니라 친구 같고.”
예리한 지적이었다.
연인이라고 무조건 스킨십을 하는 건 아니라고 반박할까?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냥 한번 보여 주는 게 빠를 것 같기도 하고…….
스윽.
나는 카르시온의 팔에 팔짱을 끼며 교태롭게 웃었다.
“자기야, 저분이 우리 사이를 의심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장단을 맞춰 달라는 의미로 잡은 카르시온의 팔에 힘을 줬다. 하지만 내 신호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무런 말이 없다.
제발 뭐라고 좀 해 봐.
틀렸다.
카르시온이 답하지 않으니, 남성의 눈은 이미 의심으로 좁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와! 추하게 뭐 하는 거야! 남자친구 있으시다잖아! 설령 진짜 남자친구가 아니더라도 딱 보면 거절인 거 몰라? 쪽팔리게!”
남성을 우악스럽게 밀쳐낸 것은 말감이었다. 그녀가 남성을 뒤로 물리고는 내 앞에 선다.
내 앞을 지키고 선 모습에 든든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저기요!”
“네.”
말감이가 엄지손가락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어때요!”
“……네?”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일까.
나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연속해서 황당한 일을 겪었더니 골이 아파 왔다.
“남자친구 있다니까요.”
그러자 말감이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알아요. 하지만 그럼 여자친구 자리는 남은 거잖아요.”
“그건…….”
정상인으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논리였다.
뭐라 거절의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말감이에 의해 뒤로 밀려난 남성이 이번에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멍청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저분 표정을 봐라, 넌 이미 까였다고!”
그러자 말감이가 거세게 저항하며 팔을 흔든다.
“놔 봐! 놔 봐! 리엔이랑 분위기가 똑 닮은 게, 나는 저 애와 반드시 친해져야겠으니까!”
지금 얼굴에는 내 원래 모습이 전혀 없는데……?
무서울 정도의 직감이었다.
남성은 그런 말감이가 짜증 났는지 분을 담아 소리쳤다.
“아오! 내가 무슨 이득이 있다고 어디 내놔도 창피한 동생 학술제에 왔을까!”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창피해? 동생이 창피해?”
급기야 말감이는 그녀의 친오빠로 추정되는 남성의 머리채를 잡았다.
“아! 머리를 잡아? 지금 싸우자는 거지?”
“그래, 아주 오늘 피 볼 때까지 한 번 싸워 보자!”
하하. 정말이지 사이좋은 남매네.
두 남매가 싸우는 모습을 초탈한 얼굴로 지켜보던 나는 카르시온의 소매를 당겼다.
“시온. 대충 해결된 것 같으니까 우리도 가자.”
그러나 카르시온은 망부석이라도 된 듯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온?”
얼굴을 살피며 다시 이름을 부르자 그의 코에서 주륵 뭔가가 흘러나왔다.
코피였다.
“……시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