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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78)화 (78/161)

78화

마법을 펑펑 써재껴도 쌩쌩하기만 하던 애가 코피라니.

아무래도 온종일 마법을 써서 평소보다 무리한 모양이었다.

정작 카르시온은 고개를 털어 내며 몇 번이나 문제없다고 내게 피력했지만…….

신경이 안 쓰일 리 없지.

그렇다고 그를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 홀로 미스 아레나를 보러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의 기숙사까지 따라가 침대에 눕혀 주고는 옆에서 잠들 때까지 같이 있어 주었다.

에휴.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카르시온과 피오르의 방은 의외로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내가 금녀의 구역인 남자 기숙사에 발을 들일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뭐, 말로만 금남 금녀 구역이지 사실 암암리에 다들 오가는 것 같았으니까.

나는 잠든 카르시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옆에서 토닥여 준 덕분일까, 생각보다 빨리 잠들었다. 내가 신경 쓰여서 못 자는 거 아닌가 했는데.

그만큼 피곤했다는 얘기겠지.

“이거 봐, 이렇게 세상모르고 자면서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비죽이며 그의 이불을 여며 주었다.

그의 긴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와 있는 것을 보니 괜스레 한번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동아리실에서 카르시온과 종종 같이 낮잠을 자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 내가 먼저 잠들었기에 그가 잠든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자는 모습이 천사가 따로 없네. 하긴, 잘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예쁜 얼굴이긴 하지.”

생각해 보면 우는 모습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는데.

또 보고 싶다.

일부러 잔뜩 놀려서 울리는 건 너무 악질인 것 같은데…….

울어 달라고 부탁하면 울어 주려나. 보상은 뭐로 해 주면 좋아할까.

“이마 뽀뽀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도.”

멍하니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

방금 카르시온이 움찔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기가 무섭게 그가 몸을 뒤척이며 자세를 바꿨다.

“잠꼬대였나 보네.”

나는 여상스럽게 기지개를 쭉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불시에 카르시온 쪽으로 훅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까의 뒤척임으로 나를 등지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장난기 가득한 음성으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자, 자기야. 이번에는 진짜 내 꿈을 꾸길 바라.”

연기는 좋았는데 글쎄, 네 붉어진 귀는 거짓말을 못하는 것 같더라.

* * *

나는 뒤늦게 미스 아레나를 진행 중인 강당에 들렀다.

어떻게 생긴 놀림감인데 그래도 여장한 모습 한 번쯤은 봐 줘야 나중에 두고두고 놀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강당에는 이미 미스 아레나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쿤과 피오르를 늦지 않게 찾는다면 화장을 지우기 전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어캣처럼 목을 쭉 빼며 주변을 살피고 있으려니 한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축하해, 피오르!”

“네가 나올 때 소리 지르느라 목이 다 쉬었지 뭐야.”

“하하,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쁜 것 같은데?”

오, 피오르가 미스 아레나에 당선됐나 보다.

나는 무리의 틈 사이로 피오르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틈 사이를 노렸다. 그러다가 주변을 살피지 못해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앗, 죄송해요.”

“괜찮습니…… 리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남색 머리카락의 긴 생머리를 가진 고혹적인 언니 한 명이 나를 새침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짓만으로 뭇 남성들을 홀릴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의 언니였다.

분위기뿐 아니라, 여자인 나도 저절로 침을 꿀꺽 삼키게 하는 미친 듯한 미모.

그런데 이 언니…… 목소리가 굉장히 허스키하다.

잠시만.

언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고? 심지어 나는 아직 변형 마법을 풀지 않은 상태인데?

휘둥그레진 눈으로 언니를 바라보니 그녀가 입매를 끌어 올려 살풋 웃었다.

그 홀릴 듯한 웃음에 나는 의문을 모두 넣어 두고 생각했다.

아아, 언니는 웃는 것도 아름다우시네요.

“리엔, 대회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저 쿤입니다.”

“네, 언니 너무 예쁘세요.”

“……?”

“……?”

우리 둘의 얼굴에 동시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해석하고는 입을 벌리며 경악했다.

쿤?

쿤이라고……? 저 예쁜 언니가?

믿기 힘든 사실에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쿤이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음을 터트린다.

“리엔의 그런 반응이라니, 대회에 나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쿤은 키가 크긴 했지만, 피오르처럼 운동하지 않는 탓에 몸의 선이 고운 편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가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거기에 제인의 화장 기술이 합쳐졌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나 보다.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었으니, 여장하면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예쁘다면 놀릴 투지도 사라진다. 게다가 쿤은 여장에 거부감이 없어서 더 그랬다.

나는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쿤. 그런데 어떻게 나인지 알아본 거야? 혹시 얼굴에 변형 마법 풀렸어?”

그는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리엔에게는 옅은 흙 내음이 납니다.”

“흙냄새……?”

나는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아봤다. 잘 모르겠다.

“쿤!”

그때, 누군가 반가운 음성으로 쿤을 부르며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아침에 봤던 엘프 언니와 할아버지?

나는 눈을 끔뻑였다.

할아버지는 쿤의 대부라고 했으니 그렇다 치고, 엘프 언니까지 쿤과 아는 사이였나?

신기할 정도의 인연이었다.

“어머니도 오셨었군요.”

“뭐?”

나는 놀라 급하게 언니와 쿤을 번갈아 봤다.

……맞다.

쿤의 어머니는 엘프라고 했지.

엘프 언니의 나이가 꽤 있다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외모가 너무 어려 보여서 쿤과 연관 지어 볼 생각조차 못 했다.

금세 발치에 다가온 그녀가 밝게 웃으며 쿤의 손을 잡았다.

“아들, 오늘 너무 예쁘더라!”

누가 봐도 우리 또래로 보이는 예쁜 언니가, 또 다른 예쁜 언니에게 아들이라고 하는 모습을 보자 묘한 기분이 올라왔다.

저게 장난이 아니라 진짜라서 더욱 그랬다.

그들의 대화에 할아버지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이래저래 불만이 쌓인 듯한 목소리였다.

“쿤 님, 아무리 봐도 참가자 중에는 다진 마늘만 가득했습니다. 쿤 님께서 당선되지 않은 건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더군요.”

그러자 엘프 언니가 대번에 눈을 치켜뜨며 화를 냈다.

“노망난 노친네, 다진 마늘이 뭐야? 애 앞에서 말조심해.”

“애 앞에서 노망난 노친네 정도는 괜찮은가 보군.”

“당신이랑 내가 같아?”

“같지 못할 건 또 어디 있지?”

“당신이 쿤의 엄마인 나와 동일 선상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해?”

“아들을 버리고 자유를 찾아 떠난 이를 어미라고 할 수 있나는 모르겠군.”

“내가 아들을 버렸다고? 하, 그게 당신이 할 말이야?”

두 분의 싸움을 말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쿤은 익숙한 풍경이라는 듯 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리엔, 다진 마늘이 가득했다는 건 무슨 소립니까?”

“……빻았다는 소리 같은데?”

“리엔이라고?”

“리엔이라고 하셨습니까?”

멱살을 잡고 싸울 기세였던 둘은 쿤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을 듣고 고개를 홱 돌렸다.

“얼굴이 다른데, 아들?”

“얼굴이 다릅니다, 쿤 님.”

두 분의 열렬한 눈빛에 못 이긴 나는 빠르게 실토했다.

“마법이에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그녀가 눈을 키웠다.

“어머, 내 아들과 아는 사이였니?”

“네. 친구예요.”

“어머니도 리엔을 만났었습니까?”

쿤의 질문에 제 발이 저렸던 나는 질문을 받은 그녀보다 앞서 입을 열었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언니와 만났던 건 내가 도움을 받은 쪽이었어.”

“언니……?”

쿤은 내가 제 어머니를 언니라고 부른 것이 어색한지 굉장히 묘한 표정을 지어냈다.

“이제 언니가 너를 아들이라고 부를 때에 느꼈을 내 심정을 알겠어, 쿤?”

“……저는 리엔이 놀란 줄도 몰랐습니다.”

엘프 언니는 제 머리카락을 꼬며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흐응, 완전 신이 이어 준 인연이잖아?”

그녀가 저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십수 년 전에 헤어졌던 친우의 딸이, 제 아들과 친구라니.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쿤.”

“네, 어머니.”

그녀는 대뜸 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사뭇 진지한 어조로 선언했다.

“나는 찬성이다.”

“예? 대체 무엇을 찬성하신다는 건지…….”

“그건 비밀이니, 아무튼 엄마는 이미 찬성했다는 것만 알아 둬.”

엘프 언니는 쿤에게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며 웃음을 흘렸다.

그때,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입술을 열었다.

“저…… 혹시 말이다.”

“아 맞다! 리엔, 아까 멀리서 봤는데 아까 누군가를 찾고 있지 않았니?”

나는 다소 당황했다. 엘프 언니가 갑작스레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어온 탓이다.

대놓고 할아버지의 말을 끊는 모양새였다.

두 분의 사이가 내 생각보다 더 좋지 않은가 보다. 자고로 어른들의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은 법.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의 말에 답했다.

“제가 누굴 찾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호호, 그렇게 고개를 쭉 빼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모르기가 더 어렵지.”

엘프는 눈도 좋은가 보다.

“미스 아레나 당선자를 찾는 거라면 이미 건물을 빠져나갔단다. 화장을 지울 거라고 하던데.”

“네? 정말요?”

피오르와 그의 친구들이 있던 곳을 바라보자, 정말 온데간데없어져 있었다.

안 되는데……!

쿤을 놀리지 못한다면 피오르라도 놀려야만 했다.

게다가 이렇게나 어여쁜 쿤을 제치고 우승이라니, 너무 궁금하지 않은가.

피오르가 화장을 지우기 전에 그 모습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어디로 가는지 보셨나요?”

“저쪽으로 갔어.”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는 친구를 찾으러 먼저 가볼게요. 두 분 모두 쿤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나는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달려 나갔다.

그렇게 다급하게 피오르를 찾은 지 얼마나 됐을까.

다행히 멀리 가지는 않았는지, 나는 피오르로 추정되는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본 것은 뒤통수뿐이었지만, 그인 것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얼마 전 피오르가 동아리에 가져왔던 가발과 굉장히 흡사한 머리카락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체가 딱 붙는 드레스였기 때문에 미처 숨기지 못한 근육이 선명히 보이기도 했고.

피오르는 친구들을 용케 다 물리쳤는지 현재 혼자인 상태였다.

나는 덕분에 마음 놓고 그를 부를 수 있었다.

“피오르!”

“리엔?”

이름을 불린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너울거린다.

마침내 마주한 그의 얼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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