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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79)화 (79/161)

79화

피오르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멋쩍은 듯 뺨을 긁었다.

“아, 미안. 목소리가 비슷해서 사람을 착각했어.”

피오르가 오해하건 말건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할 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건 그냥……

가발 쓴 피오르잖아.

아무래도 제인의 화장이 사기였던 것 같다.

쿤은 이목구비부터가 달라 보였는데, 피오르는 그냥 조금 예뻐진 피오르였다.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생각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래서, 네가 미스 아레나에 당선됐다고?”

“응. 대회 못 봤어?”

왜 쿤이 아닌 네가……?

확실히, 피오르의 원래 얼굴은 곱상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모습도 여자라고 생각하고 보면 또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잘 어울리는 편에 속했다.

사실 근육이야 여자들도 충분히 키울 수 있는 거고…….

하지만 쿤의 미모가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일까.

피오르가 미스 아레나에 당선되었다는 게 조금 의문이 들었다.

아니, 사실은 좀 많이.

나는 일단 의문은 뒤로하고 피오르에게 내 정체부터 밝히기로 했다.

“착각한 거 아니야. 나 맞아, 피오르. 지금은 얼굴에 변형 마법을 걸어서 이런 얼굴인 거지.”

그러자 피오르의 얼굴에 미미한 화색이 돌았다.

“아하. 어쩐지 분명 네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얼굴이 달라서 당황했잖아.”

나는 다음부터는 목소리도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겉으로는 픽 웃었다.

“우승 축하해, 피오르. 다행히 네 체스판은 지켰네.”

“……애초에 내 물건을 왜 거냐고!”

“너의 동기 부여를 위해서?”

“아주 잘도 오르겠다.”

잠시 나를 쏘아보던 피오르는 시선을 거두며 내 주변을 둘러봤다.

“그나저나 카르시온은 어디 있어? 당연히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사실 카온이 오늘 종일 마법을 쓰느라 피곤했는지 갑자기 코피를 흘려서…….”

“피고온? 걔가 그 정도 마법에 피곤함을 느꼈다고?”

“진짜야. 그래서 기숙사에 데려다주느라 대회도 못 봤는걸.”

“그럼 여기는 어떻게 왔어?”

“뒤늦게 화장 지우기 전 얼굴이라도 보려고 나 혼자 온 거지.”

“그런 줄 알았으면 네 목소리가 들렸을 때 뒤도 안 돌아보고 뛰는 건데…….”

피오르는 내가 자신을 주야장천 놀릴 미래를 상상했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봤으니까 만족해?”

“응. 재미있다.”

대놓고 재미있다고 말을 하자 그는 이제 초탈했는지 허허 웃었다.

“사실 쿤을 먼저 보고 왔어. 나는 처음에 쿤이 여장한 건 줄도 모르고 걔한테 언니라고 한 거 있지.”

피오르는 선선히 인정했다.

“맞아, 쿤은 진짜 예쁘더라.”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우승했다고 해서, 쿤보다 예쁠 줄 알았어.”

“그래서 실망했어?”

“조금.”

“…….”

“좀 많이……?”

또 화를 낼 줄 알았던 피오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말했다.

“기대한 네가 잘못이지. 미스 아레나는 미를 추구하는 대회가 아니잖아.”

“응?”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자 피오르가 이어 설명했다.

“아레나 아카데미에서 가장 매력 있는 학생을 뽑는 것이라는 거 못 들었어?”

“들었지.”

“여장은 재미를 위한 유희였을 뿐이지, 점수에 포함되지 않아.”

“그럼 무슨 기준으로 뽑아?”

“학생들의 함성 크기를 측정해서 점수로 산출하는 방식이야. 마법으로 정확하게 측정하더라고.”

공정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불합리한 선정 방식이었다.

그냥 인기투표나 다름없었네.

“그럼 처음부터 우승자는 피오르 너로 정해져 있던 거잖아?”

“아니, 뭐……. 다들 반대표로 인기 있는 애들만 뽑혀서 나온 거라 딱히 그렇지도 않아.”

나는 그가 답지 않게 빼는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어느 누가 네 인기를 이길 수 있겠냐. 만인의 연인인 주제에.”

“아, 이제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랑은 안 사귄다니까!”

“저번에도 그래 놓고 뒤에서 여자애랑 몰래 키ㅅ……읍읍!”

피오르는 급하게 내 입을 틀어막으며 변명했다.

“그건 사정이 있었던 거고!”

나는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며 눈을 흘겼다.

이번에는 결혼까지 간다고 호언장담한 게 누구더라…….

내 흐린 눈빛을 본 피오르가 급히 덧붙인다.

“그전까지는 아무랑도 안 사귀었어. 정말이야.”

대충 고개를 주억이며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피오르를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의외의 사람이었다.

뚜벅뚜벅.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망설임 없이 우리에게 걸어왔다.

마침내 몇 미터 앞까지 당도했을 때, 그는 더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피오르와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잘 봤다, 피오르.”

내게 잔뜩 변명을 늘어놓던 피오르가 말을 뚝 멈추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형?”

피오르의 눈동자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인기 많더구나.”

“……대회를 본 거야?”

어느새 그의 손에서 풀려난 나는 태평하게 둘을 번갈아 봤다.

와, 막상 저 얼굴로 형이라고 하니까 진짜 안 어울린다.

피오르는 형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등을 밀어주었다.

당황한 피오르가 나를 돌아본다.

“형에게 할 말이 있는 거잖아. 어서 가 봐.”

“리엔. 나는…….”

“어서.”

내 재촉에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뭘. 친구 사이에.”

대수롭지 않게 한 말에, 피오르 얼굴에 잠깐 아릿함이 스쳤다.

하지만 찰나의 감정이었다는 듯 곧 내게서 시선을 거두며 형에게로 걸어간다.

나는 두 형제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그들만의 시간이었다.

* * *

“하.”

카리스는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져가는 리엔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토해 냈다.

그의 시선이 제국의 전 황비였던, 쿤의 어머니에게로 향한다.

“설명해라. 왜 그랬지?”

그녀는 카리스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담담히 그의 시선을 받아쳤다.

“내가 무슨 죽을죄라도 저지른 듯한 눈빛이네, 노친네.”

“지금 내가 너와 시답잖은 말싸움이나 하려고 물어본 줄 아나? 질문에나 대답해라.”

그녀는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되물었다.

“당신, 어디까지 알고 있어?”

“……심증으로는 차고 넘치게.”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그녀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간다.

“그럴 것 같았어. 리엔을 바라보는 당신의 표정에 다 드러났거든. 내가 먼저 눈치채서 다행이지.”

카리스는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며 짓씹어 뱉어지듯 말했다.

“너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아니, 그 전에 그 아이는 루드의 딸이 맞는 건가?”

답은 예상보다 빠르게 나왔다.

“맞아.”

“……그럼 내게 왜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지?”

“당신이.”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빛에 반사된 그녀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일렁였다.

“당신이 무슨 자격이 있어?”

카리스의 심장 중심부를 관통하는 말이었다.

“이제 와 가족이 고픈 거야? 아니면, 라그라스인의 핏줄이 섞인 리엔을 죽이기라도 하려고?”

그녀의 말에 극도로 흥분한 그가 얼기설기 말을 엮어 뱉어 냈다.

“내가, 내가……! 아이를 죽일 것 같나? 내 핏줄의 목숨까지 앗아 갈 살인귀로 보였어?”

쿤은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경악하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둘을 바라봤다.

리엔이 대부님의 손녀라니.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넣어두고, 일단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는 중요한 게 아니지.”

그녀는 카리스의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되레 얼굴을 가까이하며 단어를 귀에 박아 넣듯 또박또박 말했다.

“잘 들어. 루드가 아바스칸투스를 떠난 건 당신에게서 리사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뭐……?”

“아버지인 당신에게서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야. 웃기지 않아?”

카리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아이라니.

그날, 루드가 자신에게 하려 했던 말은 사랑하는 여인의 임신 소식이었던가.

자신은 대체 아들에게 무슨 말을 했던 거지?

손이 덜덜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는 심호흡과 함께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 힘겹게 마른 입술을 뗐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저 충동적으로 말한 것뿐이라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아이를 태에 밴 것을 알았더라면 자신의 태도도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거라고.

결국, 그의 입에서 처절한 변명이 흘러나왔다.

“……너는 마치 루드가 망명하지 않았으면 내가 그 아이들을 죽였을 것처럼 말하는군.”

“아니야?”

카리스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이 혐오로 일그러졌다.

“라그라스인을 눈앞에 데려오는 순간 칼을 들겠다며, 죽이겠다며! 당신이 직접, 당신 아들 앞에서 내뱉은 말이잖아!”

과거에 했던 말이 단단한 올가미가 되어 심장을 옥죄어 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제가 아들에게 했던 말이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그때는 내가, 내가 술에 취해 말실수를…….”

“술이라, 허울 좋은 변명이네.”

카리스는 자존심을 다 버리고 그녀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아들이 떠난 후 후회로 가득한 삶을 살아왔다. 가슴에 사무치도록 아들을 그려 왔어. 만나서 남은 평생 속죄하면서 살아가면 안 되는 건가? 정녕 내게 그럴 자격도 없는 건가?”

카리스의 무너져 가는 얼굴에 그녀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그녀는 카리스가 싫었다.

그것은 비단 제 친우인 루드와 리사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해서만이 아니었다.

카리스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 그의 손에 명을 달리한 수백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

엘프인 그녀는 그 냄새를 누구보다 선명히 맡을 수 있었다.

태생이 생명을 존중하는 엘프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가 꺼려졌다.

첫 만남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와 사이가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친우들이 카리스의 눈을 피해 라그라스로 도망친 후에는 더더욱.

하지만 동시에 그를 연민했다.

카리스가 원해서 그리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라그라스를 증오하게 된 것도 그의 전부를 앗아 갔기 때문이겠지.

아아, 참으로 불쌍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지 못하고,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카리스는 그때 당시, 아들과 라그라스에 대한 증오 사이에서 후자를 택했다.

잔인하지만, 그녀는 이쯤 언쟁을 끝내기로 했다.

“이미 끝났어. 당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루드는 땅으로 돌아갔거든.”

쿵.

카리스를 지탱하던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새도 없이 그녀의 싸늘한 말이 이어졌다.

“내가 당신의 말을 가로막은 건 리엔을 위해서였어. 부탁하는데, 당신의 처지를 생각해.”

“내가, 내가 뭘…….”

“아바스칸투스에서 너무 오랫동안 박혀 있어서 잊었나 본데. 당신, 살인귀잖아.”

카리스의 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게 홉 뜨였다.

“라그라스 역사서에 당신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는 알아? 전쟁 영웅은 당신 나라에서나 해당하는 말이야.”

그랬다.

아바스칸투스를 벗어나는 순간, 자신은 그저 미치광이 전쟁광에 불과했다.

“라그라스인을 학살한 살인귀의 손녀라. 과연 아이가 그 타이틀을 좋아할지 모르겠네.”

그녀가 손을 들어 카리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지만 다정한 손길과는 다르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잔혹하리만치 무정했다.

“처음부터 가족이었으면 모르지. 근데, 당신은 지금 리엔에게 그 무엇도 아니잖아?”

그녀는 마지막으로 카리스의 심장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그가 허튼 꿈을 꾸지 않도록.

“당신 없이도 행복하게 사는 아이야. 이상한 말로 잘 살고 있는 아이를 들쑤시려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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