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언제 고백하는 게 좋으려나.”
나는 기숙사 안, 책상 앞에 앉아 고민했다.
학술제도 끝났겠다, 최근 카르시온에게 하도 플러팅을 한 탓일까.
그도 조금은 눈치챈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확신하기 전에 고백하고 싶은데.
그러고 보니 한스에게 정산받은 돈이 내 예상을 훨씬 웃도는 큰 금액이었다.
반지를 사서 고백해 볼까.
“……고작 사귀자고 하는 건데 너무 유난인 것 같기도 하고.”
문득 얼마 전 내 캐비닛 안쪽에 붙어 있던 쪽지 생각이 났다.
<제인이 휴학했을 때, 어디에서 일했는지 궁금하지 않니?>
누가 어떤 저의로 쓴 쪽지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했다.
추측이지만, 제인이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한 게 그것과 관련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쯤 말해 주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나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구슬을 주워 들었다. 녹음 펜에 넣어 사용하는 일회용 녹음 구였다.
그러고 보니 이 구슬은 쓸모를 다 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깝다.”
녹음 펜의 버튼을 실수로 눌렀는지, 녹음한 적이 없는데 구슬에 용량이 차 있었다.
그래서 펜 안의 구슬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대충 책상에 올려놨던 것 같은데.
“심심한데 뭐가 녹음됐는지나 들어볼까…….”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구슬에 마나를 주입했다.
녹음구를 재생하는 건 언제나 떨리는 일이었다.
곧이어 녹음구에 저장된 음성이 흘러나온다.
* * *
때는 아레나 아카데미의 새 학기가 시작하기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다음 날이 개학이었기에 리엔은 물론이고 제인 또한 기숙사에 들어온 상태였다.
제인은 침대에 누워 가십지를 읽다가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물감이 느껴진다.
그녀는 익숙하게 손에 잡힌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쪽지였다.
그녀는 약초에 집중하고 있는 리엔을 슥 돌아보고는 몰래 쪽지를 폈다.
아무렇지도 않게 쪽지를 주머니에 다시 넣은 그녀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엔 나 상점가에 다녀올게.”
“응.”
“금방 올 거니까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응.”
“아, 가방에서 꺼내기 귀찮아서 그런데 나 펜 하나만 빌려 가도 될까?”
“응.”
언뜻 성의 없어 보이는 대답이었으나, 제인은 그 대답에 입가에 호선을 그려내었다.
리엔은 약초를 보기 시작하면 무아지경에 빠져 다른 것을 잘 보지 못한다.
저렇게 바쁜 와중에 대답해 준 것만 해도 기특한 일.
귀엽기도 하지.
제인은 리엔은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그녀 책상에 놓인 펜 하나를 챙겼다.
그러고는 곧 외투를 걸치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잠시 멈추어 서서 리엔에게 빌린 펜을 이용해 쪽지에 답장을 썼다.
<지금 가겠습니다.>
답장을 쓴 쪽지는 마법이라도 부린 듯 스르륵 사라졌다.
그것에 무심히 시선을 주던 제인은 펜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딸깍.
펜을 집어넣으며 무언가를 눌렀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제인은 다시 발을 움직여 D동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익숙한 사내의 얼굴이 담겼다.
“카르시온 님.”
난간에 느른히 기대 있던 카르시온은 제인을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에 반해 제인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기숙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달리 보고 드릴 게 없어요.”
“필요 없어. 방학 동안은 내가 매일 같이 있었으니까.”
매일?
리엔이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고? 그렇게나 카르시온 앞에서 선을 지키려고 노력했었는데.
이제 친구라는 경계를 허물어뜨리려는 건가?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할 새도 없이 카르시온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이야. 앞으로 리엔의 정보를 내게 보고할 필요 없어.”
그 말에 제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환희가 차올랐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이내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근육이 뻣뻣하게 경직된다.
“그, 그 말은 일전에 갚아 주신 빚을 다시…….”
전처럼 돈을 벌기 위해 아카데미를 떠나야 하는 건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렇게 갑자기?
리엔은? 다른 친구들은?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부티크를 차리겠다는 제 꿈은?
공황에 빠진 자신을 바라보던 카르시온은 가볍게 한마디를 던졌다.
“돈은 됐어.”
제인은 자신의 몸에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 하하.”
제인은 그런 자신이 경멸스러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더는 리엔의 정보를 팔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보다, 돈 문제부터 걱정한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카르시온은 그런 제인을 무감정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녀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제인은 손바닥을 얼굴에 묻으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만두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리엔이 싫대.”
“네……?”
놀란 그녀가 손을 내리고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평이한 얼굴이었다.
“누군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게 끔찍하대.”
“리엔에게 들키신 건가요?”
“아니. 그냥 대화하다가 말이 나왔어.”
카르시온은 한쪽 눈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옅은 후회가 담겨 있었다.
“정보를 캐내는 걸 좋아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냥 내가 좋아서 한 거지.”
조금이라도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었으니까.
작게 덧붙인 카르시온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너를 붙여 놓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 보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제인은 사뭇 충격을 받았다.
사실 자신에게 이렇게 제 사정을 자세히 말해 주는 것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원래의 그라면 저가 질문을 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을 텐데.
그가 퍽 낯설었던 탓일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리엔을 사랑하시나요?”
카르시온은 그런 제인을 보며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네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데?”
“아…….”
질문할 가치도 없었다.
그의 눈은 이미 단단히 사랑에 빠진 사람의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그를 저렇게 바꿔 놓을 수 있단 말인가.
* * *
제인은 리시안셔스 공작가에서 일하던 시녀였다.
공작 부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종종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는 그런 위치.
주니어 때부터 아레나 아카데미를 다녔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가문의 빚을 갚는데 자신도 손을 보태야 했기 때문에.
다행히 공작 부인은 까다롭지 않은 성격에, 제 사람을 챙길 줄 아는 분이었다.
리시안셔스 공작 때문에 걱정이 많았으나 그는 공작 부인이 옆에 있으면 소문처럼 무서운 것만은 아니었다.
제인은 공작가에서 일하는 동안 꽤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입 안이 썼지만, 이대로 평생 이곳에서 일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런 자신에게 뜻밖의 제안이 온 것은 아레나 아카데미가 개학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너, 아카데미에 다니다가 휴학했다고 했나?”
이 집안의 최고 망나니인 카르시온이 말을 걸자, 제인은 답지 않게 조금 긴장했다.
지금은 분명 학기 중일 텐데, 그가 어떻게 저택에 있는 건지.
“네. 시니어 1학년 1학기까지 다녔습니다.”
“잘됐네. 다시 복학해.”
“네?”
역시 인성 파탄자다운 막무가내식 명령이었다. 제인은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공손히 답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가문의 빚을 갚아야 해서 복학할 수 없어요.”
제인은 말을 마치고는 입술을 씹었다. 문득 이런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빚은 다 갚아 줄게.”
그는 그 큰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갚아 준다는 말을 툭, 뱉었다.
지금 자신이 벌고 있는 돈으로는 한 달 이자를 내기도 버거운 금액이었는데.
그녀는 내렸던 고개를 들어 카르시온을 쳐다봤다.
“대신 네가 아카데미에 가서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제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빚을 갚을 수 있다니.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을 만큼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더 자세히 들어 봐야 했다.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못 먹는 감이나 다를 것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요. 눈치가 조금 빠르고 소문에 밝다는 것 정도밖에는.”
카르시온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간다.
“충분해.”
그녀가 카르시온에게 명령받은 일은 어렵지 않았다.
위험하거나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해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저 리엔이라는 아이와 친해져, 그녀의 정보만 주기적으로 전달하는 거면 됐다.
“왜 리엔이라는 애의 정보가 필요한 건가요?”
물어볼까 말까. 수 없이 고민하다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물은 말이었다.
내심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선선히 말해 주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뺨을 약간 붉히면서 말이다.
“좋아하고 있거든.”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미친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손쉽게 빚을 갚을 수 있었으니까.
그가 손을 썼는지 마침 기숙사도 그녀와 같은 곳에 배정받았다.
처음에는 그 일에 대해 죄책감 따위 없었다.
그녀가 어쩌다 카르시온 같은 미친놈에게 걸리게 되었나 하는 연민은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물리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잖아.”
양심 조금만 팔면 아카데미를 다님과 동시에 집안의 빚까지 청산할 수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제안을 거절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리엔이라는 아이는 생각보다 더 매력 있는 아이였다.
자신은 그녀의 매력에 속절없이 빠져 매료되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녀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리엔과 친해지자 전에 없던 죄책감이 하나둘 생겨났다.
이건…….
친구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막연한 공포감이 밀려들어 왔다. 리엔과 사이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리엔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 사실을 말하면 카르 시온이 갈음해 준 빚은 어떻게 되는 거지?’
‘리엔에게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불안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 위태위태한 감정으로 지내던 나날 중, 카르시온의 부름에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이제 리엔에 대해 보고할 필요 없단다. 빚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속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이후 리엔이 자신에게 보내는 신뢰의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호흡이 어려워졌다.
이제 손을 뗐다고는 하나, 일 년간 그녀를 속여 왔는데.
자신은 저 눈빛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였다.
제가 그녀를 속이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다짐을 하게 된 것은.
제인은 몇 번이나 말을 꺼낼 타이밍을 노렸다.
어느 날은 리엔의 기분이 좋아 보여, 그것을 망치기 싫어서 말하지 못했다.
어느 날은 우울해 보였기에 걱정을 더 얹어 주기 싫어서.
내일은 쪽지 시험이 있으니까.
조만간 학술제가 열리니까.
하루하루 핑계를 만들며 시기를 늦췄다.
진실을 알게 된 이후, 리엔이 자신을 영원히 보려 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런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제인은 리엔의 굳은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엔의 손에 들린 녹음구에서는 카르시온과 자신이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재생되고 있었다.
“설명해, 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