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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81)화 (81/161)

81화

믿고 싶지 않았다.

제인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심지어 그 고용인은 카르시온이라고 했다.

녹음에 따르면 지금은 감시인 역할을 끝낸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지난 1년간 자신을 속여 왔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배신감으로 인해 눈앞이 어질러지며 점멸되었다.

가족이라 믿었던 사람에 이어, 몇 없는 친구마저도.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그렇다면 제인이 제게 보여 왔던 모습들은 다 거짓이었던가?

하지만 나는 바보라서.

그런 너라도 멀어지고 싶지 않은 멍청이라서.

그래서 희망 어린 얼굴로 울듯이 웃으며 너에게 물었다.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

변명이라도 좋으니까, 거짓말이라도 속아 줄 테니까.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 줘.

그러나 네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회피하지 못하게, 너무나도 또렷이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미안해. 내 이기심이 널 상처 입혔어.”

사과하지 마, 제발.

그냥 한마디면 되잖아.

목소리의 주인이 네가 아니라고, 조작된 거라고.

하다못해 카르시온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변명해 달란 말이야.

“사실이야. 나는 리시안셔스 공작가에서 일하던 시녀였고, 카르시온 님의 명령을 받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어.”

그녀의 고백에, 작은 깨달음이 스쳤다. 쪽지는 내게 이걸 알리려 했던 거구나.

“너와 친해진 것도 사실은 내가 일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과정이나 다름없었지. 우리가 대화한 내용은 모두 그에게 전해졌어.”

……그래서였니?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한 건.

무언가 잘못 말했다는 듯 말을 계속 횡설수설한 것도.

대뜸 이상형을 물어본 것도.

“미안해. 말로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 알아. 그래도 사과는 하고 싶었어. 날 원망해, 리엔.”

제인.

정작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울고 있는 거야?

왜 그렇게 아픈 얼굴인 건데?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네가 전에 내게 세라를 조심하라고 했었잖아.”

그녀를 바라보는 내 표정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근데 정작 조심해야 할 사람은 너와 카르시온이었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울분이 치솟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네가 뭔데 그런 표정을 지어? 눈물을 흘려? 배신당한 건 난데, 왜 네가!”

나는 제인을 밀쳐내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녀의 얼굴을 오래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그런 내 팔목을 잡았다.

“여기 있어. 내가 나갈게.”

스륵.

내 팔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제인은 울지 말라는 내 말 때문인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힘겹게 웃어 보였다.

“내 잘못인데 네가 나가면 내가 널 볼 면목이 더 없어지잖아.”

따지고 싶었다.

여기서 어떻게 더 면목이 없을 수 있다는 건지.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아니, 차마 못 하겠다는 말이 맞겠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용서를 구하겠어.”

돈 때문에 친구를 팔아먹은 주제에.

그녀는 벅벅 문질러 발갛게 변한 눈가를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내 눈을 맞춰 왔다.

“미안해.”

끼이익, 쿵.

신경이 날카로워져서일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려왔다.

야속하게도 제인은 끝까지 흔한 변명 한마디조차 내뱉지 않았다.

돈이 필요해서 그랬다고,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제인이 나간 후에 떠오른 것은 카르시온이었다.

카온. 너만큼은 렉스 베고니아와 다르다고 생각했어.

내가 정말 좋았으면 그런 짓은 더더욱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아이러니한 점은, 잘못을 저지른 카르시온과 제인보다 나에게 더 화가 났다는 거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는 게 싫다고 했으면서. 렉스 베고니아와 에르한을 생각할 때면 그렇게나 치를 떨면서.

이번 일을 묻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히 들었다.

그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렇게 지내고 싶었다.

이대로 그들과 영원히 관계를 끊어 버리기에는 정을 너무 많이 줘버렸다.

“제인. 그렇게 바로 잘못을 시인해 버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네 변명을 핑계 삼아 용서해 주는 것도 힘들어졌잖아.

제인.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던 네가 없으면 나는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해?

카르시온과 소꿉친구인 피오르?

너를 짝사랑하고 있는 한스?

동생인 루카?

그래, 쿤이라면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너와 대화할 때가 할 때가 가장 위로받는 기분이었어.

너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 봐.

우습지? 고작 1년 본 사이인데 이토록 너를 의지하고 있다는 게.

심장은 터질 듯 아픈데, 이상하게도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내 뺨을 후려쳤다. 매서운 마찰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아프다. 너무나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아픔 때문인지 그제야 눈물이 차오른다.

물러 터지게 굴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어, 리엔.

그들은 너를 속여 왔어. 이렇게 쉽게 용서한다고?

나는 최면을 걸듯 반복해서 읊조렸다.

안 될 일이지. 안 될 일이야…….

그러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여느 때보다 간절히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났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내게도 의지할 사람이 남아 있었을 텐데.

문득,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쳤다.

……아칸더스.

내 오랜 스승이자 친구인 사람.

아칸더스. 당신이 필요하다고 하면, 이번에도 제 등을 토닥여 주실 건가요?

사실 백작가에서 홀로 버티기 힘들 때면 종종 당신 생각을 하곤 했어요.

필요할 때만 찾는 게 이기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결국, 내 선택지에서 남는 건 아칸더스 당신뿐이었어요.

당신이라면 제가 우는 이유를 묻지 않고, 묵묵히 위로해 줄 테니까.

* * *

이튿날, 나는 평소처럼 일어나 등교했다.

밤새 어디 있다가 왔는지, 제인은 교실에 들어선 나를 발견하고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뛰쳐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매일 조퇴할 수도 없을 텐데. 앞으로는 어쩌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침 조회가 끝난 후 기계처럼 일어나 카르시온의 반으로 향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카르시온은 지루한 표정으로 책상에 엎드려 무언가를 조물거리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듯 그가 고개를 돌린다.

나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리엔, 여긴 어쩐 일이야?”

내 방문이 퍽 반가웠는지, 카르시온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가 쥐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내가 학술제 때 선물한 작은 강아지 인형이었다.

손을 뻗어 그의 손에 들린 강아지 인형을 가져왔다.

달리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카르시온의 손바닥을 긁는 것만으로 그는 제 것을 손쉽게 내어 주었다.

나는 인형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잡아 뜯어 버렸다.

조잡한 퀄리티의 인형이었기에 몸통과 머리를 분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리엔?”

놀란 듯 그가 눈을 부릅떴다.

나는 카르시온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두 동강 난 인형을 보란 듯 내버렸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볼품없이 나동그라진 인형으로 향했다가 다시 내게로 고정되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리엔, 무슨 일 있었어?”

기다리고 있던 물음이었다.

“어제 일은 제인에게 보고받지 못한 모양이네.”

“……뭐?”

나는 카르시온의 뺨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손끝으로 그가 당황하며 몸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에 대해 알고 싶었어?”

뺨에 얹은 손을 미끄러뜨려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리곤 거칠게 당겨 얼굴을 끌어왔다.

나는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대고 사납게 튀어 오르는 감정을 뱉어 냈다.

“그러면 나에게 직접 물었어야지. 그런 소름 끼치는 방식이 아니라.”

카르시온의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가 입을 닫는다.

“그래.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 어차피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사과 아니면 변명일 텐데.”

나는 싱긋 웃으며 낮게 뇌까렸다.

“그녀에게 얻은 정보가 네게 유의미하긴 했는지 궁금하다.”

그에 반해 그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잘못, 했……어. 미안해.”

“닥쳐. 내가 지금 사과를 듣고 싶다고 했어?”

입을 다물라는 말에, 그는 피가 새어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 입술을 꽉 물었다.

네가 상처받았으면 좋겠다.

나보다 더 아팠으면 좋겠다.

아니, 사실은 그가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과거의 내가 너무 억울해할 것 같아서.

그래서 렉스 베고니아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너에게 뱉었다.

“날 좋아한다고? 진짜 그렇게 생각해? 아니, 그건 너의 더러운 집착일 뿐이야.”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뭔가 잘못된 거잖아.

나는 카르시온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매달리듯 그의 어깨를 잡았다.

“부탁할 테니까…….”

나도 모르게 손에 들어간 악력이 거세졌다.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제발 내 인생에서 그만 꺼져 줘.”

렉스 베고니아.

* * *

그날 이후 일주일이 흘렀다.

카르시온과 내가 싸웠다는 소문이 교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의 반 앞에서 대놓고 멱살을 잡고 목소리를 높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악착같이 등교했다. 하지만 동아리는 가지 않았다.

동아리 성적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아카데미는 어차피 렉스 베고니아를 피해 온 것이었으니까.

내가 당부한 대로, 카르시온은 내 앞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저 매일 아침 기숙사 문 앞에 보라색 히아신스 꽃 한 송이가 놓여 있을 뿐.

보라색 히아신스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 그리고…….

‘미안해요.’

아침마다 그 꽃을 보는 게 고역스러웠다. 내가 뱉은 말에 아파하고 있을 네가 신경 쓰였다.

대체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한스.”

“어, 어어?”

한스가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사건 이후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내가 말을 걸어 놀란 모양이다.

“제인 말이야.”

그의 눈이 더욱 크게 뜨였다. 내가 제인과도 사이가 멀어졌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나 때문에 네가 제인과 멀리 지낼 필요는 없어. 눈치 보지 않아도 되니까…….”

나 대신 제인 좀 위로해 줘.

나는 그에게 작은 부탁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주일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제인은 가문의 빚을 갚으려 카르시온의 제안을 받아들인 듯했다. 게다가 내게 몇 번이고 그 사실을 고백하려 했었지.

그녀를 용서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상황을 이해했다.

사업 실패로 아버지가 진 빚.

아카데미를 휴학하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했던 너.

너도 달리 선택지가 없었던 거잖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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