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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83)화 (83/161)

83화

“여기인가.”

다음 날, 나는 방과 후 쿤이 알려준 동아리실을 찾아왔다.

대충 크기를 가늠해 보니 1~8인의 소수 동아리가 배정받는 가장 작은 동아리실이었다.

이상한 동아리에 들어간 것 같더라니. 역시 소수 정예구나.

가볍게 노크하자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리엔이야? 자, 잠시만! 아, 다됐다. 이제 들어와!”

대답이 들려온 것은 쿤의 낮은 목소리가 아닌, 다른 여학생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이 목소리도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어쨌든 들어오라고 했으니 열어도 괜찮은 거겠지.

“리엔, 우리 ‘리사동’에 온 걸 환영해!”

당황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게 무슨……?”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밝은 얼굴로 색색의 종이를 뿌리는 여섯 명의 학생들.

그리고…….

<환영! 리엔을 사모하는 동아리, 리사동♡>

눈이 잘못된 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 대형 포스터였다.

“잘못 찾아온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모두 좋은 시간 보내세요.”

나는 빠르게 문을 닫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다.

하지만 내가 도주를 택했다는 것을 알아챈 누군가가 닫히려는 문 밑으로 재빠르게 발을 껴 넣었다.

끼이익, 하고 천천히 문이 열린다. 필요 이상으로 눈치가 빠른 이는 말감이었다.

그녀가 내 얼굴을 보더니 활짝 웃음꽃을 피워내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리엔.”

“……말감이 너도 이 말도 안 되는 동아리의 부원이니?”

동아리를 만들겠다며 내 허락을 받을 때부터 유심히 지켜봤어야 했는데.

“땡. 미안하지만 나는 리사동의 부원이 아니야.”

조금. 아주 조금은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여기 모인 여섯 명의 학생들이 다 부원은 아니라는 이야기겠지.

하긴, 나를 무슨 영원한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쿤이면 몰라도 누가 이런 동아리에 들어온다고.

최소 인원인 3명을 모은 것도 용한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희망찬 가정이 떠올랐다.

사실 다들 나처럼 초대받은 사람들인 거 아니야?

나를 속이려고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연기를 하는 중인 거지.

동아리실 정중앙에 걸려 있는 포스터가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영 말이 안 되는 가정은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최대한 긍정적으로 상황을 그려 나가고 있을 때였다.

말감이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뿌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일개 부원이 아닌, 부장이지! 무려 이 위대한 동아리의 설립자라고?”

“미친.”

말감이의 말로 인해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왔다.

그에 동아리실 안에 있던 아이들이 놀라며 입을 틀어막는다.

“야, 방금 들었어?”

“응. 똑똑히 들었어.”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는 모습에 나는 또 다른 희망을 보았다.

이거다. 일부러 정을 떨어뜨려서 동아리를 나가게 하면……!

“와 진짜. 리엔은 욕하는 모습도 멋있다.”

뭐라고?

“이거 완전 업계 포상이잖아.”

“내가 ‘미친’이라는 단어를 멋있다고 생각할 날이 올 줄은 몰랐어.”

“저 발성과 발음은 또 어떻고? 100m 밖에서 들어도 선명히 들리겠다.”

아니, 그…….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이 아이들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주접을 관망하던 쿤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어조였다.

“저는 더 심한 욕도 들어 본 적 있습니다. ‘미친’ 정도는 인사말에 불과하죠.”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욕을 달고 사는 줄로 오해하잖아.

“역시 전학 온 후부터 리엔을 졸졸 쫓아다니던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부러워!”

그런 거 부러워하지 마.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며 생각했다.

이모, 얘네 좀 이상한 것 같아요.

* * *

아레나 아카데미에는 자잘한 것을 제외하면 2개의 큰 팬클럽 동아리가 있었다.

첫 번째는 피사동.

피오르를 사모하는 동아리로, 말 그대로 피오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였다.

특징은 압도적인 인원수를 자랑했다는 것.

두 번째는 카사동.

예상했듯이 카르시온을 사모하는 동아리다.

특징은 남자 부원도 꽤 있는 피사동과 달리, 전체가 여학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정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에게 시비를 걸다가 퇴학당한 애들도 피사동, 카사동이었다고 한다.

피오르와 카르시온의 팬클럽 동아리는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생각했다. 실제로 존재하기도 했고.

조만간 쿤사동도 생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종종 했었다.

하지만…….

그게 내 상황이 될 줄은 몰랐지.

나는 착잡한 마음에 눈을 여기저기 굴리며 물었다.

“어……. 그러니까 너희가 전부 ‘리사동’의 부원들이라고?”

그들은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주억였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나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하나같이 초롱초롱하다.

마치 말 잘 듣는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선생님이 된 것 같았다.

“왜?”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음의 소리가 또 필터링 없이 나오고 말았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오묘한 얼굴을 했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라는 듯.

“왜냐니…….”

“그야, 리엔 너니까?”

이들이 왜 ‘리사동’에 들어 왔는지 납득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스스로 이유를 추론해 보기로 하고 찬찬히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이 익은 애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처음 보는 것 같은 사람도 섞여 있었다.

도저히 모르겠다. 포기.

“쿤과 말감이는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고 너희들은 나랑 무슨 일이 있었다고?”

내 물음에 같은 반 낸시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혹시 땀 억제제 기억해? 네가 몰래 기숙사 앞에 두고 가는 걸 본 적 있거든.”

젠장. 봤었구나.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동아리에 들어온 걸 설명할 수 없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낸시는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그려내었다.

“리엔. 너의 작은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가 될 수도 있어. 내가 그랬고.”

낸시를 시작으로 다른 부원들이 수줍은 표정으로 줄줄이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여드름에 좋다며 약을 만들어 준 적 있잖아.”

“급하게 뛰다가 카르시온과 부딪혔는데 리엔 네가 말려 준 덕분에 잘 넘어간 적 있었지.”

“헤헤, 나는 그냥 전부터 네가 멋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들을 도와준 것은 사실 큰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눈에 밟히니까. 오지랖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어찌 보면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나를 위했던 사소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생경한 느낌이었다.

어색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처음 ‘리사동’이란 게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럼 동아리 활동으로는 주로 뭘 하는데?”

실적 점수야, 비학업 동아리이니 다른 것으로 채울 테고.

동아리 시간에는 뭘 하는 걸까.

“포동.”

“뭐?”

“동아리로 사람들을 포섭하는 활동이야. 일명 포동이라고 하지.”

그런 시간 아까운 짓을…….

“우리 동아리의 목표는 전교생이 너의 굉장함을 알게 하는 거야.”

어째서……?

“우리는 네가 바람둥이인 피오르와 성격 파탄자인 카르시온에게 가려져 있는 걸 참을 수 없어.”

어떻게 좀 참아 보면 안 될까?

틀렸다.

그들은 이미 포동 활동에 대한 열의로 차올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신분? 그런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 따위로 리엔을 평가할 순 없지.”

“외모? 흥. 우리 리엔이 더 예쁘고 멋있어!”

“성격? 비교할 것도 없는 거 아니야? 아예 압승이지.”

“공부? 리엔도 잘하는 편이라고! 특히 약초 분야는 카르시온이랑 피오르보다 잘해!”

그건 전공이 다르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

뭔가 굉장히 편향된 주접을 듣고 있노라니 정말 ‘리사동’ 부원이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어디론가 사라졌던 말감이가 큰 트레이를 들고 나타났다.

트레이 위에는 뭔가가 쌓여 있는 듯했는데, 흰색 천으로 덮어져 있어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말감이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내 앞에 선다.

뭔가 싶어서 다른 부원들을 바라봤더니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네가 우리 동아리에 흔쾌히 와 준다고 해서 선물로 뭘 준비할까 고민 많이 했어.”

“선물까지……?”

“요즘 이런저런 일로 우울했잖아. 네가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렸으면 해서.”

하긴, 리사동인 너희가 소문을 신경 쓰지 않을 리 없겠구나.

“게다가 리사동에 무려 ‘리엔’ 네가 오는 건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아?”

말감이가 과장되게 호호 웃으며 흰색 천을 확 걷어 내었다. 나는 내용물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트레이 위에 있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슈.

“쿤에게 들었는데, 네가 슈를 좋아한다고 해서 어제 동아리 부원들끼리 사 왔어!”

“어때, 마음에 들어?”

나는 결국, 얼굴에 그늘을 지워내고는 함박웃음을 피워내었다.

최고의 선물이었다.

슈 때문이 아니라 너희들이 날 생각해 주는 마음과 배려가.

그래, 나는 사람이 고팠던 거다. 나를 순수하게 좋아해 줄 사람이.

* * *

나는 그날 이후 방과 후에 기숙사로 향하지 않고 ‘리사동’으로 향했다.

가서 딱히 하는 일은 없었으나 그것은 피고동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내가 잠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동아리실 안에 책상을 겹쳐 담요를 잔뜩 쌓아 올리고는 간이침대도 만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나를 붙잡으려 그런 것 같은데…….

그들은 알까.

동아리에 오지 않고 기숙사에 바로 가면 더 푹신한 침대에 누울 수 있다는걸.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귀여워서, 나는 간이침대가 마음에 들어 동아리에 오는 척했다.

교내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잡다한 소문이 쏟아졌다.

제인의 눈이 돌아갔다는 둥, 카르시온이 복도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마법을 날렸다는 둥.

나는 듣지 못한 척하며 카르시온과 제인으로 꽉 차 있던 생각을 줄여 나갔다.

둘을 용서하고 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모순된 감정.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리사동은 생각보다 효과적인 피난처였다.

홀로 있지 않으니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그들과 함께 있다 보면 은근 재미있기도 했다.

“오늘은 또 무슨 주접을 늘어놓으려나.”

오전 전공 수업이 끝나 반으로 이동할 때였다.

시야에 누군가가 담겼다.

마주치기 싫었던, 하지만 너무도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한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나는 카르시온의 얼굴을 본 적 없었다.

우연한 만남조차 전무했다.

그에게 ‘제발 내 인생에서 그만 꺼져 줘.’라는 말을 했었지.

그 말 때문에 의도적으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제인이야 같은 반이니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었지만.

한 달 만에 보게 된 그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퀭한 눈가와 메마른 입술.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 멍해 보이는 눈빛.

어찌나 넋을 놓고 있는지 직선에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길을 돌아갈까 하다가 그대로 걸어가기로 했다.

한 발짝, 두 발짝.

그와의 거리가 점차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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