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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84)화 (84/161)

84화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르시온의 바로 옆을 지나칠 때까지도 그는 정신을 놓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지나치나 싶었는데.

“……리엔.”

나는 그가 습관처럼 중얼거린 한마디에 그만 걸음을 멈추어 버렸다. 몸이 저절로 반응한 탓이었다.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리, 엔?”

내 기척을 느낀 건지. 아니면 쿤의 말대로 내 몸에서 나는 옅은 흙 내음을 맡은 건지.

순식간에 카르시온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오며 내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의 동공이 심하게 떨려 왔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는데 금세 물기가 서렸다.

숨이 턱 막혀 왔다.

눈물이 차오른 건 그인데 왜 내가 숨이 쉬기 어려워지는 걸까.

더는 보고 있기가 힘들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갈라진 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안. 미안해…….”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뒤이어 들려온 네 말만 아니었다면.

“네 앞에 다시 나타나서 미안해.”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 저것이었다.

……바보야. 사과할 부분이 잘못됐잖아.

나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카르시온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름 방학 때문에 한 달가량 못 봤을 때도 넌 눈물을 흘렸었지.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그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너 미쳤어?”

아무리 이곳이 아카데미라고는 하나, 공작가의 후계자가 평민에게 무릎을 꿇다니.

그것도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신분제 사회에서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카르시온을 손수 일으켜야 할지 망설이는 동안, 그가 더없이 괴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말을 지키려고 노력했어. 최대한 네 눈에 띄지 않으려 했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너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이것저것 말해 보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눈물을 비처럼 쏟으며 한마디 절규만을 내뱉었다.

“……살려 줘.”

그의 함축된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한 듯한 말이었다.

살려 달라는 한마디에 카르시온이 그간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내 한마디로 너의 그 감정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힘들게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손을 내미는 행위뿐이라도 너는 그 괴로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네가 한 말과 표정을 렉스 베고니아가 지었더라면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뺨을 후려쳐 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너라서,

너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한 채 입술을 움직였다.

“카르시온. 살려 달라는 말은 이런 곳에 쓰는 게 아니야.”

그리고 미련 없다는 듯 그에게 시선을 떼고, 스치듯 지나쳤다.

나는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 * *

“오셨습니까, 리엔.”

“응.”

리엔이 동아리실에 들어오자 쿤은 부러 평소보다 밝은 톤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늘 그녀가 복도에서 카르시온과 만났다는 사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덤덤한 얼굴로 텅 빈 동아리실을 둘러보았다.

“쿤. 다른 애들은?”

일찍 온 편이 아니었기에, 적어도 몇 명은 와 있을 줄 알았는데.

“어제 깜빡하고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오늘은 정기적으로 동아리 모임을 쉬는 날입니다.”

“……동아리를 그렇게 임의로 쉬어도 되는 거야?”

“걸리지만 않으면 되니까요.”

“생각보다 배짱 좋네.”

쿤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려내었다.

“그래서 제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걸리면 뭐……. 동아리 활동을 위해 상가에 갔다고 해 두죠.”

사실 ‘리사동’의 부원들은 오늘 리엔과 카르시온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소문을 유리한 쪽으로 바꾸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쿤은 입에 침 한번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리엔의 칭찬을 바라서 하는 행동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녀가 다시 아침의 일을 떠올리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럼 쿤, 너는 오늘 끝까지 동아리실에 있는 거야?”

“네. 이번에는 제 차례라서요.”

그 말에 리엔은 한시름을 놨다.

오늘 같은 날 바로 기숙사에 들어갔으면 그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더 길어졌을 테니까.

리엔은 동아리 부원들이 만들어 준 간이침대로 올라가 몸을 뉘었다.

책상 침대만의 딱딱함도 익숙해지니 나름대로 매력 있었다.

쿤은 그런 그녀에게 짙은 남색의 담요를 덮어 주었다.

퍽 자연스러운 행동에 리엔은 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쿤.”

“네.”

“너 아바스칸투스에서 진짜 인기 많았겠다.”

“네? 갑자기 무슨…….”

“자상하다는 얘기였어.”

카르시온도 자신에게 이렇게 담요를 덮어 줬었는데.

그를 생각하자 갑자기 기분이 확 가라앉아서, 리엔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한편, 리엔의 갑작스러운 칭찬을 받은 쿤은 제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또다.

속에서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들끓는 게.

그는 얼굴을 식히려 의자에 앉아 손등을 얼굴에 댔다.

리엔이 보기 전에 어서 가라앉아야 할 텐데.

그런데 왜?

왜 그녀가 보기 전에 얼굴을 식혀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의문을 풀어 보려 고민할 때였다.

쿤은 하프 엘프의 타고난 시력으로, 바닥을 기어 빠르게 사라진 검은색 무언가를 포착했다.

일반인의 시력이었다면 보지 못했을 형체가 그의 두 눈에 선명히 박혔다.

털이 듬성듬성 난 여섯 개의 다리와 제 몸통보다 긴 더듬이.

살이 올라 오동통한 배. 화룡점정으로 기름이라도 칠한 듯 윤기 나는 날개까지.

“아악!”

쿤은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의 자식답게 곤충을 좋아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퀴벌레만은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는 것을 넘어 혐오했다.

흥분하는 일이 잘 없는 쿤의 비명에 놀란 리엔이 급히 담요를 걷어찼다.

“무슨 일이야!”

쿤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오들오들 떨었다.

그는 바퀴벌레가 자신의 다리를 기어 올라올 것을 걱정하듯 긴 다리를 좁은 의자 위에 구겨 넣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날개가 달린 바퀴벌레인 이상, 그 발악은 통하지 않을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바, 바퀴벌레가!”

“뭐?”

“이곳에 바퀴벌레가 있습니다!”

리엔은 다소 황당함을 느꼈지만, 이내 감정을 갈무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나자마자 쿤에게서 다급하게 말이 날아왔다.

“위험합니다, 리엔!”

쿤의 호들갑에, 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허.”

누가 보면 독사라도 나타난 줄로 오해했을 법한 언사였다.

바퀴벌레야 징그럽게 생겼으니 무서워할 수도 있지.

……라는 생각에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건 너무 오버스럽지 않나.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슥 동아리실을 둘러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벽 한쪽 구석에서 더듬이를 꿈틀거리고 있는 바퀴벌레가 보인다.

리엔은 눈에 보이는 책을 한 권 집어 들고는 바퀴벌레가 있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그러고는,

“잘 가세요, 바 선생.”

퍽.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바퀴벌레를 하늘나라로 보내 주고는 손을 탈탈 털었다.

“역시 전공 책만큼 공격력이 높은 건 없지.”

리엔은 당연한 이치라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다시 간이침대로 돌아갔다.

빠르고 완벽한 퇴치였다.

‘……어. 생각해 보니 내 전공 책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리엔이 누군지 모를 책의 주인에게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전하고 있을 무렵.

쿤은 작게 입을 벌리고는 멍한 눈으로 리엔을 바라봤다.

그는 조용히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바퀴벌레를 목격하고 놀랐을 때보다 더욱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건…… 부정맥 따위가 아니다.’

깨달음은 때로는 갑작스럽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찾아오곤 했다. 지금의 쿤이 그랬다.

우습게도, 그는 리엔이 바퀴벌레를 잡는 모습에 제 감정을 깨달아 버렸다.

* * *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뜯었다.

좋지 않은 예감에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방 안을 요리조리 걸어 다녔다.

이상하다. 분명 도비가 올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도비는 간식이라면 환장을 하고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게 오는 시간만큼은 단 1분도 늦지 않았다.

타이밍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맞춰 오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랬던 도비가 오늘은 30분이 훌쩍 지났는데도 털끝 하나 비추지 않았다.

겨우 30분 정도 늦는 것 때문에 불안에 떠는 게 더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캐비닛에서 의미심장한 쪽지를 발견했기에 불안함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너 때문에 죽는 거야.>

제인을 고발했던 쪽지와 같은 필체였다.

나는 제국의 보호를 받는 아카데미에서 살인이 날 리가 없다는 생각에 쪽지를 그냥 넘겼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마물인 도비라면 말이 달라진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싸한 기분.

“안 되겠다.”

나는 급한 마음에 원피스 위에 얇은 숄만 걸친 채 무작정 기숙사를 나섰다.

도비가 지내는 곳은 아카데미 뒷산 초입 부근. 그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발견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게 다급히 도착한 뒷산.

“도비야, 어디 있어!”

나는 초입부를 중심으로 도비의 이름을 부르며 샅샅이 살폈다.

혹시나 해서 허공에 대고 ‘간식 먹자’라는 말을 했는데도 도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해가 저물고 노을로 인해 주변이 뉘엿뉘엿해졌을 무렵.

포기하고 기숙사로 돌아가, 내일을 기약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어두워지면 더욱 찾기 어려워질 텐데. 특히나 도비의 몸은 전체가 까만색이라 더 그랬다.

“도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때였다.

예민해진 귓가로 짐승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냥 우는 소리가 아니라 헐떡이며 곧 꺼져 갈 듯한 소리였다.

“……도비야?”

나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굉장히 가까운 곳이었다.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자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검은색 생명체가 보였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시체처럼 누워 있는 도비가.

“도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비에게 달려갔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미약하게나마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도비의 상태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처참했다.

날개는 기이하게 꺾여 있었고, 온몸에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난자된 듯한 상처가 가득했다.

여태껏 과다 출혈로 명을 달리하지 않은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나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숄을 벗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도비를 감싸 안았다.

도비의 날개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가려야 했다.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나 때문에 무고한 도비가 이렇게 됐다는 생각에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내가 렉스 베고니아를 거부했을 때 펼쳐질 백작가의 미래를 엿본 것만 같았다.

나는 도비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약초로는 치료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내가 지금 도비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다.

연금술을 이용해 간단한 치유 포션 정도는 만들 수 있었으나, 제조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기숙사에 모든 재료가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도비는 태생이 마물이었기에, 아카데미에 대기 중인 의원과 사제에게 데려갈 수도 없었다.

“어떠, 어떻게 해야…….”

공황에 빠져 있을 때, 불현듯 머릿속에 스친 한 사람.

도비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상처를 단숨에 치유할 수 있는 마법사.

카르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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