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도비를 안고 미친 듯 뛰었다.
한시라도 빨리 카르시온에게 가야만 했다. 지금 도비를 살릴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건 말건, 나는 카르시온의 기숙사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그가 어디에 지내는지 몰라 헤맸을 텐데.
다행히 학술제 때 한 번 와 본 덕분에 곧바로 찾아올 수 있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그의 기숙사 문을 쾅쾅 두드렸다.
“카르시온!”
오면서 잔뜩 눈물을 쏟은 탓에,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가득 섞여 있었다.
“카르시온, 네가 필요해. 도와줘 제발…….”
단시간에 너무 힘을 많이 쏟았기 때문일까.
도비를 안고 있는 손과 무리한 다리에 힘이 서서히 풀려 갔다.
사실 중형견과 크기가 비슷한 도비를 안고 여기까지 뛴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안 되는데.
지금 힘이 풀리면 안 되는데.
“리엔!”
불현듯 내 앞에 훅 나타난 카르시온이 무너지려는 나를 부축했다.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그는 한 손으로 내 눈을 가리며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도 못 들었으면서.
그런데 카르시온의 목소리에 마음이 놓이는 건 왜일까.
벌써 모든 것이 해결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에 의해 눈이 가려진 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카르시온. 도비가, 도비가…….”
도비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 달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 잘 해결될 거야.”
도비가 죽어 가고 있는데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억지로 힘을 짜내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할 때였다.
“리엔. 딱 5초만 세 줄 수 있어?”
“그럴 시간이…….”
“그래, 네 말대로 시간이 없지. 그럼 2초만.”
방금의 말로 인해 시간이 흘렀는데 그는 3초나 줄여 준 것처럼 말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황당했지만, 반박할 힘도 쇠해 버린 탓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 됐다. 불안했을 텐데 네 눈을 멋대로 가려서 미안해.”
그가 내 눈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떼어 내었다.
깜빡깜빡.
눈이 잘못됐나 싶어 눈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감았다가 떴다.
도비에게 나 있던 상처는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검은 털을 흠뻑 적시고 있었던 핏자국마저도 방금 씻고 말린 것 같이 보송하기만 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도비의 털을 쓸어 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크게 상처가 나 있던 부위가 매끈했다.
금방이라도 꺼져 갈 듯 옅게 호흡하던 도비는 평온하게 색색 숨을 쉬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도비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카르시온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리엔.”
나는 도비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쓰게 웃고 있었다.
“……이제 괜찮지?”
자세히 보니 그는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바다처럼 깊고 투명한 파란 눈을 여기저기 굴리다가 변명하듯 입을 연다.
“미안. 소란 때문에 다른 애들이 몰려올까 봐 급한 마음에 이곳으로 데려왔어.”
“아…….”
나는 그제야 내가 있는 곳이 기숙사 복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 카르시온과 피오르의 기숙사 방 안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텔레포트까지 했구나.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카르시온의 목소리였다.
“리엔. 나와 접촉하는 게 싫겠지만, 돌아갈 때도 내 텔레포트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고는 한다는 말이…….
“네 앞에 또 나타나서 미안해.”
너를 찾아온 건 나인데.
내 인생에서 꺼져 달라는 말을 한 주제에, 필요할 때가 되니 찾는 날 보며 기분 나빠할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도비의 치료를 빌미로 용서를 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카르시온은 모든 예상을 뒤집어엎었다.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다.
그의 반응이, 진심 어린 사과가. 과거의 나까지도 녹여 버렸다.
더 이상 그와의 화해를 막는 과거의 나는 없었다.
문득, 막연한 두려움이 떠올랐다.
……이런 너를 졸업 후의 내가 포기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카온.”
내가 제 이름을 다시 애칭으로 불렀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카르시온이 몸을 움찔했다.
“고마워. 도비를 살려 줘서.”
도움이 필요한 나를 외면하지 않아 줘서.
용서를 강요하지 않아서.
나는 손을 뻗어 저번처럼 카르시온의 뺨에 손을 얹었다.
“네가 한 행동, 전부 용서할게.”
네 눈이 커다랗게 뜨이는 것을 보며 나는 울듯이 웃었다.
그전에,
“한 대만 맞자, 카온.”
잘못한 게 있으니까 한 대 정도는 괜찮잖아?
* * *
나는 카르시온의 도움을 받아 기숙사에 도착한 후 도비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피를 많이 흘려서 빈혈기가 있었으나 그것을 제외하고는 정말 멀쩡했다.
내가 걱정했다는 것을 아는지, 도비가 내 손을 핥아 왔다.
“이 착한 애를 어떻게 그리 무자비하게…….”
쪽지는 대체 누가 보낸 걸까.
제인을 고발하려 했던 쪽지는 발신인이 내게 선의를 가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깨달았다.
쪽지의 발신인은 내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그것도 상당히.
범인은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나는 도비를 잘 눕혀 준 후 제인의 방을 찾아갔다.
사실 마음속에서 그녀를 용서해 준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다.
아직 용서하지 못한 카르시온 때문에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을 뿐.
아레나 아카데미는 사유서를 제출하면 다른 방으로 배정받을 수 있었다.
기숙사는 2인 1실이 기본 원칙이기에, 룸메이트끼리 싸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다른 방으로 배정받는 게 쉬워 보이지만, 어지간한 싸움으로는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나뉘지 않은 이상에서야.
두어 번 노크 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려니 문 안쪽에서 익숙한 소프라노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리엔.”
내 말이 마치자마자 우당탕탕하며 큰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린다.
문 앞에는 극심히 긴장한 듯한 얼굴의 제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벙긋댔다.
나는 시간 끌 거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넌 친구를 팔아먹은 새끼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고, 그녀 자신이 뱉은 말이기도 했으니까.
제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하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순순히 시인했다.
“네 말이 맞아. 나는 너를 팔아 돈을 벌었어.”
하지만 표정은 숨겨도 감정을 조절할 수는 없었는지, 그녀의 눈가에 차츰 물기가 서렸다.
“근데, 그 친구를 한 번 더 믿어 보려고.”
그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홉 뜨였다.
“용서……해 주는 거야?”
나는 그녀의 말에 바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말해 줬는데, 나는 옛날부터 정이 많았다더라.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그냥 미련해서 그런 것 같아.”
바보 같지?
그러고는 멀거니 서 있는 제인을 덥석 끌어안았다.
“용서할게. 이제 우리 방으로 돌아와, 제인.”
그 말을 끝으로 제인의 큰 울음소리가 기숙사 복도에 메아리쳤다.
그녀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며 내게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꼭 안아 주었다.
* * *
쿤은 제 감정을 자각한 후 새로운 것들이 눈에 보이는 기현상을 겪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래,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저런 거.
카르시온은 리엔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눈을 사르르 접어 올렸다.
“리엔. 아침에 기숙사 앞까지 데리러 가도 될까?”
“무슨 소리야. 기숙사랑 아카데미까지 몇 분이나 차이 난다고.”
“그 몇 분을 같이 걷고 싶은걸.”
“방과 후에 만날 건데 굳이? 그리고 카온 너, 들어 보니까 텔레포트로 1초 만에 등교한다며.”
“그걸 누구한테 들었어?”
“누구긴 누구겠어. 네 잘난 동거인이지.”
카르시온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피오르에게 닿았다.
“아, 왜 사실을 말해도 난리야.”
피오르는 미간을 좁히며 카르시온을 향한 욕을 작게 중얼거렸다.
카르시온은 피오르가 제 욕을 하든 말든 시선을 떼고는 다시 헤실 웃으며 리엔을 바라봤다.
“그럼 통신구로 아침에 깨워 주는 건? 리엔은 잠이 많으니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제인이 있어서 필요 없어.”
빠르고 단호한 거절에 카르시온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쿤은 그것을 보며 옅은 불쾌감을 느꼈다. 어쩐지 저 행위가 가증스러워 보인 까닭이다.
분명 전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번의 일 이후로 카르시온을 대하는 리엔의 철벽이 한층 강해졌다는 거다.
하지만 쿤이 간과한 게 있었으니, 카르시온은 리엔이 저를 받아 주는 것보다 밀어내는 것에 더 면역이 있었다는 것.
카르시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쉼 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리엔은 손도 진짜 작고 귀엽다. 나랑 한번 대볼래?”
쿤은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저건 카르시온의 개수작이 틀림없었다.
제 손 크기를 굳이 왜 리엔의 손과 대보며 잰단 말인가.
쿤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티 내지 않으려 다스릴 때였다.
리엔이 귀찮다는 듯 카르시온을 밀어내며 말했다.
“손이라면 피오르도 키에 비해 작은 편이던데 쟤랑 대보든가.”
그러자 피오르는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작지 않아!!!”
리엔은 그의 격한 반응에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뭐, 뭔데 그렇게 역정이야?”
“나는! 작지! 않아!”
피오르는 얼마나 자신의 손이 작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는지, 얼굴 전체가 사과처럼 빨겠다.
그가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은 모습에, 리엔은 어깨를 으쓱이며 한발 물러나 주었다.
“진짜 작다는 말은 아니었어. 그냥 큰 키에 비해 조금 작아 보인다는 거였을 뿐이지.”
“작지! 않다고!”
“아, 알았어. 그래, 너 크다 커.”
카르시온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런 피오르를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승리자의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피오르가 광분하며 달려가 카르시온의 정강이를 노렸다.
“인류의 밸런스 붕괴를 촉진시키는 주범! 뒈져라!”
하지만 피오르의 공격이 무색하게, 카르시온은 공중으로 날아 피했다.
“어딜. 내 정강이는 리엔 거라고.”
그러고는 제 정강이를 소중히 쓰다듬는 카르시온.
리엔의 눈이 단숨에 흐려졌다.
“그런 거 필요 없어.”
이럴 줄 알았으면 다시는 저런 말을 할 수 없게 감정을 최대한 실어서 때릴걸.
카르시온이 하는 양을 보고 있자니 급격히 피곤함이 몰려온 리엔은 소파에 털썩 누워 버렸다.
쿤은 그것을 보고 기회다 싶어 분홍색 담요를 집어 리엔에게로 갔다.
저번처럼 덮어 줄 요량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가 저에게 자상하다고 한 이야기를 떠올리면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곤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리엔의 앞을 단단히 지키는 수문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뭐야?”
카르시온이 쿤을 막고는 마법으로 손쉽게 담요를 앗아 들었다.
“네가 뭔데 리엔의 담요를 만져.”
그는 쿤의 손길이 닿은 건 리엔에게 줘서는 안 된다는 듯 분홍 담요를 아공간에 집어넣어 버렸다.
대신 동아리실에 있는 하늘색 담요를 가져와 리엔의 위로 다정히 덮어 주는 카르시온.
쿤은 오늘의 담요가 된 하늘색의 담요를 보며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 카르시온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부러 분홍색 담요를 고른 것이었다.
‘분홍색 담요만 아니면 됐다.’
차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실로 유치한 질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