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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86)화 (86/161)

86화

리엔은 문득 옆을 올려다보았다.

동아리실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카르시온이 언제나처럼 잘난 얼굴로 서 있었다.

‘확실히 키가 크긴 크네…….’

알고는 있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는 그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끝도 모르고 자라는 것 같달까.

리엔의 집요한 시선에 카르시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엔, 뭐 물어볼 거라도 있어?”

“너 키 진짜 크다.”

불시에 리엔의 칭찬 공격을 받은 카르시온이 얼굴을 확 붉히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칭찬 고마워.”

하지만 칭찬이었다는 건 카르시온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리엔은 혀를 짧게 차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갈 길을 갔다. 그러고는 스치듯 툭 말을 뱉어 냈다.

“나중에 애인이랑 입술 박치기하려면 힘들겠네…….”

“……!”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문제였기에, 카르시온은 충격을 받고 입을 쩍하고 벌렸다.

그러다 몇 초 뒤,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급히 걸음을 옮겨 리엔의 옆까지 당도했다.

“무릎으로 걸어 다닐까? 앉아 다니는 건? 마법으로 공중에 떠다니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야.”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리엔이 걸음을 뚝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어느새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쭉 밀어내었다.

“내가 너랑 그런 걸 할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리엔은 카르시온과 제인을 용서한 날, 다짐했다.

그와는 철저히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로.

잠시나마 카르시온과 연인이 되려고 했었다니 참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여기서 더 관계가 깊어진다면 그를 영원히 포기하지 못하겠지.

그리고 졸업 후에는 다른 영애와 혼인하는 그를 보며 죽도록 후회할 것이다.

그를 사랑했던 것을.

더 깊은 관계를 세웠던 것을.

어린 날의 감정에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네 미래 연인을 위해 조언해 주자면, 그냥 네가 고개를 숙여 주면 되는 거잖아.”

카르시온은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처럼 붉게 익은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리엔 네가 먼저 해 줬으면 하는걸…….”

“글쎄, 너랑 그런 걸 할 일은 없을 거라니까.”

그때였다.

누군가가 둘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카르시온을 광적으로 좋아했었다는 아이, 세라였다.

리엔은 그녀를 보며 얼굴을 와락 구겼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우연히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더 그랬다.

몇몇 개를 열거해 보면, 세라는 카사동에 들어온 아이를 평민이라는 이유로 따돌리고 폭행하는 건 기본.

카르시온 기숙사에 몰래 들어가려다가 걸려서 여러 번 징계를 먹곤 했다고 한다.

분명 자퇴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유예 기간이라서 아카데미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가?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추론하고 있는데 문득, 그녀에게서 어딘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흰자위가 잔뜩 드러난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녀의 온몸은 화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치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목격한 것처럼.

그녀가 다리에 못 박힌 듯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자 카르시온이 눈매를 좁혔다.

“넌 뭐야.”

“……왜, 왜 너희 둘이 같이 있어?!”

그녀가 다리를 세차게 구르며 비명처럼 소리쳤다.

“죽일 듯이 싸웠잖아!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굴었잖아! 왜 둘이 내 앞에 버젓이 같이 있는 거냐고!”

리엔은 차분히 그녀를 훑어보고는 입술을 움직였다.

그거야…….

“화해했으니까.”

리엔의 대수롭지 않은 어조에 더욱 화가 끓어오른 듯 그녀가 눈을 뒤집어 깠다.

“머리가 모자라서 이해를 못 한 거야? 아니면 네가 성녀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는 거야? 제인이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시녀였다는 걸 알고도 그를 용서했다고?”

순식간의 일이었다. 리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것은.

“카르시온이 제인을 보내 너를 감시한 거라고! 알아?”

리엔은 차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싸늘하게 변하는 리엔의 얼굴을 목격한 세라의 입꼬리가 기괴할 정도로 비틀어 올라갔다.

“꺄하, 꺄하하하하!”

한참을 소리 내 웃던 그녀는 히쭉 웃으며 노래하듯 뇌까렸다.

“네가 기르는 마물은 잘 묻어 줬니? 마물 주제에 동물의 외양이라 그런가, 정말 소름 돋더라.”

“……도비를 그렇게 만든 게 너야?”

리엔이 화를 억누르며 조용히 말을 뱉어 냈다. 이에 세라는 더없이 즐거운 얼굴로 입을 가렸다.

“어머나, 마물 따위에게 이름까지 지어 준 거니? 자상도 해라.”

“내 말에나 똑바로 대답해, 세라. 도비를 그렇게 만든 게 너냐고 물었어.”

“하, 그 표정은 뭐야?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마물 따위에게 정을 준 네가 정신이 나간 거지!”

리엔이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으려 할 때였다.

지금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상큼한 어조의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가르며 들어왔다.

“아하. 어디서 뭣 같은 게 튀어나왔나 했더니, 저번의 걔였구나?”

카르시온은 눈을 사르르 접으며 리엔의 앞을 나섰다. 그러고는 세라를 응시하며 다정히 말했다.

“어때, 몸은 좀 괜찮아?”

그의 말과 행동에 제일 당황한 건 다름 아닌 리엔이었다.

‘카르시온이 나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걱정 어린 물음을 던진다고? 심지어 저렇게 다정히?’

그에 반해 세라는 카르시온의 다정한 음성이 소름 끼친다는 듯 제 양팔을 거칠게 긁어 내렸다.

“괜찮냐고? 지금 몸이 괜찮냐고 물어본 거야?! 내가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카르시온은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뭘?”

“으아아아아아악!!!”

그녀가 상상만으로 괴롭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잡아 뜯었다.

그때의 악몽이 머릿속을 파고든 까닭이다.

그날.

카르시온과 리엔의 데이트를 훼방 놓으려고 한 날, 세라는 인생에 다시없을 끔찍한 경험을 체험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세라가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며 어딘가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였다.

목덜미가 주뼛 설 정도의 낮은 음성이 그녀의 고막에 박혔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뇌리에 선명히 박혀 들어올 만큼 섬뜩한 목소리였다.

‘내 마법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서 말이야. 어떤 것이든 금방 되돌려 놓을 수 있거든.’

카르시온의 말이 끝마치는 순간 거짓말처럼 고통이 멎었다.

세라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손을 더듬거려 보았다.

너무나도 말끔했다. 더러워졌던 드레스마저도 마치 꿈을 꾼 듯 깨끗하기만 했다.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카르시온의 서슬 퍼런 벽안과 마주쳤다.

‘어라, 표정이 왜 그래? 방금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러고는 씩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악마와 겹쳐 보였다.

‘……그걸 몰라서 물어?! 네, 네가 방금!!!’

‘아아, 이거?’

그의 말이 끝마침과 동시에 다시금 세라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카르시온은 그렇게 몇 번이나 더 마법을 반복해 사용했다.

회상을 마친 세라가 광기에 휩싸인 채 카르시온에게 달려들었다.

“너도 한 번 겪어봐!!”

그녀가 올린 손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짧은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아무도 말릴 새 없이 그녀가 가까워지고 결국,

푹.

카르시온의 심장 부근에 그녀의 단도가 박혀 들어갔다.

세라는 손잡이로 전해져 오는 느낌에 제 복수가 성공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환상통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고통받았던 것이 단숨에 씻겨 내려갔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카르시온이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귀한 외동아들인 것? 그가 제국의 황태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제 손에 죽어 주기만 한다면 훗날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칼을 쥐고 있는 손을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흐, 흐하하하! 아프지?! 고통스럽지?!”

한 번, 두 번.

그를 찌를 때마다 쌓였던 설움이 먼지처럼 흩어져 내려갔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이렇게,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려줬어야 했는데……!

“세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리엔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세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덤덤한 얼굴이었다. 세라는 그것에 더욱 흥분해 소리쳤다.

“왜? 너도 이렇게 만들어 줄까?!”

“진짜 미쳤나 보네.”

리엔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까닥였다.

“정신 차리고 앞이나 봐.”

세라가 설마 싶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공황에 빠져 버렸다.

“이게, 어떠, 어떻게 된…….”

자신이 칼을 휘두르고 있던 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럼 내가 찌른 건 뭔데. 내가 찌른 건 뭐야!!!”

혼란스러웠다.

설령 자신이 본 것이 환상이라고 해도, 그렇다면 현실처럼 느껴졌던 선명한 감각은 무엇이란 말인가.

설마 자신이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세라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에 어느새 리엔의 옆에 나타난 카르시온이 눈썹을 그러모으며 안타깝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런. 리엔 네 말대로 정신이 나갔나 보다.”

“쟤 좀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리엔은 여기 있어. 내가 징계 의원회에 데려갈게.”

카르시온은 저를 열렬히 노려보는 세라와 눈을 맞추고는 눈을 반달로 휘었다.

“아무리 피해자는 없었다고 해도 아카데미 내에서 칼을 휘두르다니. 보통 일이 아니잖아?”

그러자 세라가 비척거리며 일어나 다시 카르시온에게 달려들었다.

“제발, 제발. 제발!!!”

하지만 그녀는 카르시온의 지척에도 가지 못한 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튕겨 나동그라졌다.

“아아악!”

카르시온은 발치에 떨어진 칼을 멀리 차내며 여상스레 말했다.

“와, 이번에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나한테 달려들었네. 내가 뭘 했다고 그런 무서운 걸 휘두르는 거야?”

“너 때문에 내 손이 망가졌어! 너 때문에……!”

“흐응.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고개를 내려 네 몸을 봐, 멀쩡하잖아.”

세라가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끼고 있던 장갑을 벗겨 냈다.

반전은 없었다. 그녀의 손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럽기만 했다.

“아냐! 이럴 리 없어! 잘 살펴보면 자국이 있을 거라고……!”

카르시온은 그런 세라를 잠시 쳐다보다가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막상 그가 제게 다가오자 그녀는 깜짝 놀라며 바닥을 기듯 뒤로 물러났다.

“저, 저리 가! 저리 가라고!”

급기야 손과 발을 마구 휘두르는 세라.

카르시온은 그녀의 발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 그대로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

‘꽤 실감 나지 않았어? 내 마법.’

입 모양을 읽은 세라의 눈이 공포로 점철되었다.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 거지?

그날 자신이 겪었던 고통도 환상에 불과했던 건가?

아니. 그건 실제였다. 절대 환상 따위로 치부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단 말이다.

카르시온의 시리도록 푸른 벽안이 세라를 향했다.

그녀는 차라리 혼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미수로 그치긴 했지만, 실수가 아닌 고의로 나를 찌르려 했으니 처벌을 면하기는 힘들겠네.”

카르시온은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를 그려내었다.

“자, 죗값을 치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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