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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87)화 (87/161)

87화

세라는 아카데미의 징계 위원회가 아닌, 제국의 중앙 재판부로 넘겨져 정식으로 재판을 받았다.

살인 미수.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후계자를 살해하려 했던 것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목격자라도 없었으면 모르겠으나,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공개된 장소였기에 빼도 박도할 수 없었다.

그녀의 가문인 블렌디 후작가에서 재판장에게 수도의 잘나가는 도박장 하나를 찔러 줬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글쎄.

세라가 국외 추방령을 받은 걸 봐서는 크게 효과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온 사교계에서 블렌디 후작가의 차녀인 세라에 대해 떠들었다.

후작가의 명예는 그렇게 땅으로 떨어졌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한 대가였다.

“갑자기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멀쩡한 손목이 망가졌다고 하질 않나. 범인이 카르시온이라며 칼을 휘두르지 않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문득, 렉스 베고니아와 비슷한 부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은 갖지 못하면 죽여 버린다는 마인드인가?”

하긴 범죄자의 범행 동기 따위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먼 건물에서 수업을 듣는 바람에 동아리실을 가려면 꽤 걸어야 했다.

빠르게 동아리실에 가려 아카데미의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분수대에 앉아 쉬고 있는 잠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잠자리가 나오기는 굉장히 이른 때인데 신기하네…….”

전에 잠자리가 모기와 하루살이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괜히 장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잠자리를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두 손을 뻗어 포획했다.

“동아리실에 가기 전에 잠깐 모고동에 들러서 건네주고 와야지.”

모고동이라면 잠자리의 배를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다.

효율적인 모기 수급을 위해 직접 모기를 기른다고 들었으니까.

모고동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노크 소리를 듣고 나온 모고동 부원은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헉! 너는 저번 약초학 과제에서 한스랑 같이 모기 기피제를 제출했다던 리엔 아니야?”

역시 모고동이라 그런지 알고 있었나 보다.

“응. 맞아.”

“뭐, 뭐라고? 누구?”

“리엔? 방금 리엔이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의 대화를 들은 학생들이 동아리실 안쪽에서 우르르 달려 나왔다.

순식간에 내게 관심이 쏠린 것을 보며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누가 보면 소문난 음유 시인이라도 나타난 줄 알겠다.

모고동에서 모기 기피제를 좋아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걸.

처음 문을 열고 나온 아이가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우리 모고동에는 왜 온 거야? 혹시 다음에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고 싶다든지?”

리사동 부원들을 마주한 것보다 더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나는 슬쩍 눈을 흘기며 손에 들고 있던 잠자리를 건넸다.

“그건 아니고, 이거…….”

예상대로 모고동 부원들은 내가 내민 잠자리를 반겼다.

“잠자리를 주려고 왔던 거구나!”

“와! 잠자리가 나오려면 아직 이른 시기인데 용케 발견했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뭘 해야 하나 했는데 모기를 대량 학살할 수 있겠어.”

“한 끼 식사로 전락하는 꼴이라니. 모기들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심어 줄 수 있겠는걸!”

……와.

그들이 신나서 떠드는 말을 듣고 있노라니 새삼 그들이 모고동의 부원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정말 모기 고문에 진심이구나.

“그럼 나는 가 볼게.”

잠자리도 건네줬겠다, 이제 내 동아리로 돌아가려고 등을 돌릴 때였다.

문득 동아리실 문패에 쓰여 있는 문구가 읽혀 들어왔다.

[모고동 최초 설립자

Walter&Baleumon.]

“……월터?”

익숙한 이름에, 무의식적으로 소리 내서 읽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앞으로 나서며 자랑스레 설명했다.

“몰랐어? 월터 교수님이 모고동 공동 설립자 중 한 분이시잖아. 우리 동아리가 그만큼 전통 있는 동아리라 이거지.”

옆에 있는 이름은 친구인 걸까.

어쩐지 월터 교수님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동아리였다.

나는 그에 대해 파고들지 않으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고는 설명해 줘서 고맙다 인사한 후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아카데미 졸업까지 앞으로 2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기간이었다.

하지만 월터 교수를 피해 다니기에는 어렵지 않은 기간임은 분명했다.

“부디 아무 일도 생기지 않고 졸업할 수 있기를.”

* * *

올 듯 말 듯했던 여름이 지나, 가을 겨울까지.

계절이 차례대로 반복되었다.

학년은 바뀌어도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은 바뀌지 않았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술제가 찾아왔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을 봤다.

시험을 보고 나면 여름 방학. 방학이 끝나면 또 시험.

그리고 겨울 방학.

쳇바퀴 굴리듯 단조로운 삶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을 고민하지 않고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입학한 후 짧은 사이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몰아쳐서 그런가, 평범한 나날들은 참 빠르게만 흘러갔다.

“흠.”

나는 턱을 비스듬히 괴고는 미쳐 돌아가는 반 풍경을 구경했다.

어디를 바라보든 정상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애들이 없었다.

한 남학생이 잉크병을 들어 올리며 옆 친구에게 말했다.

“이거 봐. 완전 까맣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내 미래 같지 않냐?”

“와, 정말이네. 진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잉크병을 들고 있던 학생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하하, 싸우자 이 새끼야.”

“그거 좋지!”

농담이 아니었다는 듯 둘은 얼굴에 웃음을 그려낸 채 곧장 팔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탁 앞에는 막대기 하나를 들고 플롯인 것처럼 연주하는 시늉 중인 사람.

빗자루를 바이올린이라도 된 듯 켜고 있는 사람.

종이에 삐뚤빼뚤 피아노 건반을 그려 두드리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걸 또 진지하게 감상하고 있는 사람까지 참 다양했다.

힐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학생 한 명이 반 한쪽 구석에 장식된 식물에 물을 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그가 물을 주고 있는 꽃은, 조화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커다란 은색 물뿌리개는 어디서 가져온 거야?

“헤헤,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렴.”

너무나도 해맑은 웃음이었다.

4년째 저 자리에 있던 꽃이라 조화인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때, 그의 곁을 지나가던 여학생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야 거기에 물을 왜 줘?”

“그게 있지, 잎사귀를 만져 봤는데 너무 버석하더라고! 그래서 아카데미 정원사님께 부탁해 물뿌리개를 잠깐 빌려왔어.”

그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아하 그렇구나. 그럼 나도 같이 줘도 될까?”

“당연하지!”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이마를 탁, 쳤다.

당연히 조화인 것을 알리고 물 주는 걸 말릴 줄 알았는데.

나는 아직도 졸업 전 세기말 감성에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다.

이들이 이렇게 반쯤 나사를 풀고 있는 것은 곧 졸업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졸업 시험과 더불어 곧 사회인이 된다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미쳐 버린 것 같았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제정신이 아닌 것은 비단 우리 반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어제 전공 시간에 만났던 말감이만 하더라도…….

“으아아아아!”

말감이는 쪽지 시험을 풀다 말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제 머리를 거세게 헤집었다.

“교수님. 잘 들으세요. 4학년이어도 전공 지식 잘 모른다구요. 그냥 살다 보니까 4학년 됐다구요. 전 그냥 말.하.는 감.자.라.구.요. 아시겠어요?”

조지 교수님께 대들다니, 정말 정신 줄을 놓아 버린 것 같았다.

더 놀라운 것은 조지 교수님의 반응이었다. 그는 익숙한 풍경이라는 듯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앉아라.”

“……네.”

그의 평온한 대처를 보건대, 졸업 시험을 앞두고 미쳐 버리는 것은 매년 있는 일인 것 같았다.

하긴, 내가 다른 학년일 때도 유독 졸업 학년은 구분하기 쉬웠다.

이상한 행동도 행동이지만…….

늘어진 체육복을 입고 담요를 몸에 둘둘 만 채 퀭한 얼굴로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4학년이었더랬지.

“월터 교수님 오신다!”

누군가 외친 소리에, 나는 상념을 마치고 교실 문을 바라봤다.

각자 흩어져 있던 아이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헐레벌떡 제 자리를 찾아간다.

쾅-!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월터 교수님은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너네 떠드는 소리가 복도 끝에서부터 들린다.”

그러고는 혀를 내두르며 어두컴컴한 교실에 마법 전등을 켰다.

“니들이 어둠의 자식들이냐? 왔으면 불부터 켜라.”

월터 교수님은 질리지도 않는지 몇 년째 저 패턴이었다.

병든 식물처럼 책상에 엎드려 골골대는 우리를 보며 세상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냈다.

“조금만 있으면 졸업이라고 팔자 좋게 퍼져 있구나. 그러다가 졸업 시험 미달 돼서 엉엉 울며 유급한다, 너희.”

졸업이라.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조금만 있으면 졸업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누가 알았겠어.

월터 교수님과 멀리해야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와는 2학년을 제외한 3, 4학년을 내리 만나고 말았다.

무려 담임 교수로 말이다.

그동안 눈에 불을 켜고 살폈지만, 월터 교수님에게서 한 번도 수상한 낌새를 느끼지는 못했다.

월터 교수님은 입이 찢어질 듯 크게 하품하며 중얼거렸다.

“아침에 등교하기 싫어 죽을 뻔했네, 진짜.”

저렇게. 그냥 출근하기를 누구보다 싫어하는 직장인 1에 불과해 보였달까.

아니, 생각해 보니까 저 대사는 학생이 할법한 대사 아닌가?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닌지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는 그에게 대꾸했다.

“졸업 시험을 앞둔 저희보다 싫으실까요.”

“졸업 시험이라고 별거 있겠냐? 배운 곳에서 다 나와.”

우우우-

아이들의 야유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안 배운 곳에서 나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옳소!”

월터 교수님이 귀를 후비며 같잖다는 표정을 했다.

“내가 지금 너희를 가르치는 과목이 공통수업인 기초 체력이 아니라, 검술 전공이었으면 야유하는 순간 다 뒈졌어.”

월터 교수님은 출석부를 대충 펼쳐 보고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출석 체크도 안 되어 있네. 오늘 당번 누구야?”

그러자 마법처럼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반 아이들.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교수님은 이제는 화내는 것마저 귀찮다는 듯 입을 열었다.

“됐다. 오늘은 내가 하지. 안 온 사람 손들어.”

?

나를 포함한 반 아이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안 온 사람이 손을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몇 초간의 정적 후 월터 교수님은 다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무도 없군. 아무리 막 나가도 출석은 다들 꼬박꼬박해서 다행이야.”

저기요, 교수님.

군데군데 빈 자리가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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