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없어도 될 것 같은 아침 조회를 끝낸 월터 교수님은, 우리를 슥 둘러보더니 답지 않게 응원의 말을 하며 교실을 나섰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시험 한번 떨어져도 인생이 망하는 건 아니니까. 졸업도 막상 하고 나면 별거 없어.”
아무래도 반쯤 정신을 놓은 우리가 썩 불쌍해 보였던 것 같다.
그가 나가고 난 후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 연령은 입학했을 당시랑 별반 달라진 게 없는데 졸업이라니.
심지어 반 아이들의 대부분이 성인이었다. 생일이 느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카르시온부터 피오르, 쿤, 한스에 이르기까지 이미 성인이 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나도 성인이지.”
나는 4학년이 되는 동안 달라진 게 조금도 없었다.
평소와 같이 약초를 연구했으며 동아리실에 갔고, 친구들과 어울렸다.
카르시온과도 친구 관계를 잘 유지했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 주변에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큰 변화 중 하나는 베고니아 공작이 명을 달리하고, 렉스 베고니아가 공작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
전 베고니아 공작의 사인은 공작 부인 때와 같이 원인 불명이었다.
렉스 베고니아가 일부러 제 부친을 죽인 것 아니냐는 말은 당연히 나돌았다.
하지만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이 우후죽순 죽어 나가자, 차츰 그에 대해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어져 갔다.
그 일로 인해 은연중에 모두가 전 공작을 죽인 범인이 렉스 베고니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베고니아 공작가의 모든 권력은 이제 렉스 베고니아에게 있었으므로.
이제 그를 가로막을 것은 없었다.
내가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순간, 그는 나를 취하려 할 것이다.
마치 내가 우승 트로피라도 된 듯이.
물론 나도 그대로 잡혀 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괜히 한스를 빌어 자금을 마련한 게 아니니까.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제인, 나왔어!”
월터 교수님이 나가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스가 득달같이 반에 들어오며 제인을 찾았다.
“한스, 나는?”
아니꼬운 마음에 눈매를 좁히며 그를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그가 헤헤 웃었다.
“아 리엔 너도 있었구나. 안녕?”
친구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
“얼마 후면 계약 만료일인데 이번 기회에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으로 상단을 바꿔야…….”
내가 표정을 굳히며 음산하게 읊조린 말에 식은땀을 흘리며 수습하기 시작했다.
“하하,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 거 알면서 왜 그래? 네 영혼의 단짝!”
“세상에, 제인. 방금 들었어? 네 남자 친구가 나한테 나밖에 없다고 한 거?”
느릿하게 하품을 하던 제인은 내 말에 빠르게 표정을 고치고는 한스를 노려봤다.
“한스, 실망이야. 이렇게 대놓고 바람을 피우겠다 이거지? 이제 나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거구나.”
그에 한스가 펄쩍 뛰며 제인의 말을 부정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친구로서 그렇다는 거였어! 제인 너도 내가 리엔과 친구 사이일 뿐이라는 거 잘 알잖아!”
제인은 울먹이며 한스를 교실 밖으로 우악스럽게 밀쳐내었다.
“그런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아! 가! 나가 버리라고!”
“제, 제인……!”
쿵.
교실 문이 닫히자 제인은 비련의 여주인공과 같았던 얼굴을 지워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눈가에 아롱거리던 눈물도 어느새 쏙 들어간 상태였다.
“쫓아냈으니까 이제 됐지?”
“나야 좋지만……. 네 남자 친구인데 괜찮아?”
제인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눈썹을 올렸다.
“뭐, 한스도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걸. 좀 토라져도 이따가 풀어 주면 돼.”
“아주 조련사 다 됐네.”
지금 보니 내가 연애를 말렸어야 했던 것은 제인이 아니라 한스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실 둘이 연인이 된 것은 벌써 이 년이 다 되어 갔다.
전에 내가 제인에게 실망하고 돌아섰을 때, 한스가 그녀의 옆에 있어 주었던 것이 굉장한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이후로 부쩍 사이가 가까워진다 싶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더랬지.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생의 진리에 대해 생각하다가 제인에게 물었다.
“너는 졸업 시험 준비 좀 했어?”
졸업 시험은 전공별로 상이했는데, 필기시험을 보는 곳도 있었고 실기시험을 보는 곳도 있었다.
물론 우리 대단하신 약초학 전공 조지 교수님처럼 두 개 다 보는 곳도 존재했다.
제인은 씩 웃으며 설명했다.
“우리 의상 디자인부는 일 년 동안 준비한 드레스를 평가받는 거라서. 지금 와서 준비하면 늦지.”
“긴장은 안 되고?”
제인이 씩 웃으며 짧게 윙크를 했다.
“떨어질 거란 생각은 안 들어. 내 인생의 역작이라고도 할 수 있거든.”
하긴, 제인의 실력이라면 떨어질 리 만무했다. 게다가 자신 있게 인생의 역작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더더욱.
“카르시온이랑 피오르는 당연히 통과할 테고. 쿤도 정령학 부에서 나름 상위권인 것 같던데.”
그럼 문제는…….
내 흐린 눈빛을 본 제인이 쓰게 웃었다.
“한스가 문제지.”
안 그래도 약초학부에서 바닥을 기던 성적이었는데. 지금은 상단을 운영하느라 바빠서 땅을 파고 들어갈 지경이었다.
한스의 손을 빌려야 할 만큼 상단이 성장한 것은 기쁜 일이었다.
분명 기쁜 일인데…….
“졸업할 수 있을까 걔.”
제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졸업 못 한다에 한 표.”
“아무리 그래도 네 남자 친구인데, 굉장히 냉정한걸……?”
“나야 한스가 졸업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으면 하지. 하지만 바라는 것과 현실은 다른 거잖아.”
이미 해탈한 듯한 제인을 보니 조금 안쓰러워졌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래도 아예 놓은 건 아닌지 한스가 요즘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
“응? 아니야. 사실 크게 걱정한 적은 없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네가 걱정을 안 하면 한스 걱정은 누가 해 줘……?
“떨어지면 뭐 어때. 어차피 한스는 상단 운영 쪽으로 갈 건데. 아카데미 졸업장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그럼 아까 쓰게 웃은 건 뭔데?”
제인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거야 졸업 시험에서 떨어지면 한스가 서운해할까 봐 그런 거지.”
“네가 한스를 좋아하긴 하는구나…….”
“새삼스럽게 왜 그래?”
“맨날 남처럼 굴길래, 사실 정 때문에 사귀어 주는 건가도 생각했거든.”
내 진지한 어조에 제인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네. 한스도 잘 보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오. 전혀.”
나는 그럼 네 눈에는 카르시온이 귀여워 보이냐고 물어보려다가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한스와 제인은 사귀는 사이지만, 나는 카르시온과 친구일 뿐이었으니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제인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다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리엔, 그거 ‘내일’ 맞지?”
“응.”
“뭐라고 할지는 생각해 놨고?”
“모르겠어. 그냥 적당히 숙이면서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걸 피력해야겠지.”
얼마 전, 내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었다. 발신인은 무려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공작 부인.
카르시온의 어머니였다.
나와 만나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주말에 시간을 내줄 수 있냐는 물음이 담긴 편지였다.
리시안셔스 공작 부인이 일면식 하나 없는 나와 할 이야기가 있다면 당연히 카르시온과 관련된 이야기겠지.
사실 카르시온이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그렇게나 자자한데, 이제야 연락이 온 것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리엔, 너도 알다시피 내가 전에 공작 부인 밑에서 일했었잖아? 그분은…….”
“됐어.”
나는 제인의 말허리를 잘라 내었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한미한 가문이라고는 하나, 제인도 엄연한 귀족 영애였다.
평민인 나와 대접이 같을 거라 생각하는 건 머릿속이 꽃밭이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었다.
다행히, 내가 지금껏 만나 왔던 사람 중에는 그런 권위 의식에 사로잡힌 귀족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운이 좋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졸업이 다가옴에 따라 슬슬 카르시온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나는 애써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며 웃어 보였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 내가 밀어내는 것도 한계가 보이던 참인데, 공작 부인이 만나지 말라고 하면 카르시온도 별수 있겠어?”
* * *
“또 이곳이네…….”
나는 퍽 익숙하게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공작 부인과 만나기로 한 곳은 리시안셔스 가문의 소유라고 했던 ‘그 레스토랑’이었다.
비싸서 잘 안 오게 될 줄 알았는데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처음 카르시온과 이곳에 온 이후로도 그와 종종 왔더니, 이제는 지배인은 물론이고 직원들 모두가 내 얼굴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티는 안 내려고 노력 중인 것 같은데…….
날 보는 그들의 얼굴에서 긴장이 묻어 나와 있는 게 선명히 보였다.
역시, 같이 나가서 식사하자는 부탁을 수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카르시온은 친구끼리 밥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매번 나를 꾀려고 했다.
때로는 울먹이거나 시무룩한 얼굴로 내 양심을 공격하기도 했다.
“점점 여우같아지는 건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저를 불렀다고 생각했는지, 웨이터가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나는 괜찮다고 하려다가 머릿속으로 무언가 떠올리고는 비장하게 부탁했다.
“찬물을 두 잔 준비해 주세요.”
개인적으로 뺨보다는 물 정도로 끝났으면 하는데.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테이블에 물잔이 놓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지배인까지 자세를 잡았다.
공작 부인이 도착한 듯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맞을 준비를 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공작 부인으로 추정되는 분이 구두를 또각이며 들어왔다.
“와…….”
그녀를 눈에 담자 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분홍색 곱슬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공작 부인은, 도저히 성인 남성을 아들로 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고운 피부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
거기에 당당한 표정과 걸음걸이가 그녀를 더욱 우아하게 보이게 했다.
공작 부인은 살짝 멍하게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곧장 내게로 걸음 했다.
그러고는 내가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자리에 앉으며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일찍 왔구나. 인사는 됐으니, 앉으렴.”
인사조차 받기 싫다는 건가.
나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나를 복잡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평화롭게 식사하며 할 말은 아닌 것 같으니 바로 말하도록 하지.”
“그럼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공작 부인. 제 이름은…….”
“리엔. 맞지?”
공작 부인은 피식 웃으며 느릿하게 다리를 꼬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단다. 귀에 피딱지가 내려앉도록 들었지.”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알고 계실 건 알았지만, 그래도 처음 만나 뵙는 자리이니 예의를 차리려고 했는데.
뭐, 소개가 필요 없으시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