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카르시온과 네가 깊은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나 내 아들 카르시온이 널 그렇게 좋아한다지?”
“공작 부인이 생각하는 사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후자는 딱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네요.”
당돌하다고도 할 수 있는 말에 그녀가 조금 눈을 키웠다. 그러고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 알면서도 방관한 내 잘못이라고도 할 수 있지. 솔직히 말하면 너희의 만남이 오래 가지 않을 줄 알았다.”
아니, 만나고 말고 하는 사이가 아니라니까요.
다시 정정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에 대해 이것저것 들었단다.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들려오더구나.”
공작 부인의 시선이 오롯이 내게 닿았다.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카르시온의 위로 살짝 휘어진 고양이 같은 눈매는 공작 부인을 닮은 건가 보다.
“편입 시험을 통해 바로 시니어에 입학했다고 들었다. 똑똑한 아이이니 현명한 판단을 할 줄 알았지.”
공작 부인은 일이 복잡하게 됐다는 듯 무거운 한숨을 뱉어 냈다.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는 마음을 먹다가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져 버린 것이고.”
“저도 이렇게까지 오래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그녀의 눈매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위로 올라갔다.
“너는 카르시온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네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아이란다. 그 아이와 평생을 같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내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시험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해 드려야겠지. 나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려내었다.
“공작 부인 앞에서 감히 말씀드리자면, 아니요.”
“알고 있는데 왜 계속 관계를 이어 나간 거지?”
“저에게는 다정했으니까요. 카온이 저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고. 소문처럼 저에게 푹 빠져 있거든요.”
나는 부러 그녀가 기분 나빠할 만한 대답을 골라서 했다.
이왕 거절당할 거라면 공작 부인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하는 쪽이 편했다.
카르시온과 빠르게 관계를 끊어 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도움도 필요했으니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만큼 더욱 학을 떼며 그와 나를 떨어뜨릴 테지.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 큰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더 세게 말했어야 했나?
하지만 이것 이상 그녀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위험할지도 몰랐다.
“……카온이라. 애칭으로 부르는 모양이구나. 평생 나만 그렇게 부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 별 타격이 없어 보였던 것은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공작 부인이 화를 삼키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며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돈이 필요했던 거니? 그럼 이 돈 받고 카르시온과 헤어지렴. 섭섭지 않게 넣었단다.”
나는 공작 부작 부인이 내민 두툼한 주머니를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
돈으로 회유라.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모멸감에 부들부들 떨며 거절하거나, 울음을 삼키고 억지로 돈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로는 모자라다.
처음부터 카르시온의 신분과 돈을 원했던 것처럼.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나는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며 진중한 눈빛을 했다.
“사귀는 건 아니고 친구인데. 오늘부터 카르시온과 교우 관계를 끊으면 될까요?”
그러자 공작 부인이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놓고 돈 때문에 어울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화가 치솟으셨나 보다.
하긴, 귀한 아들이 꽃뱀에게 홀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지.
뺨을 때리시려나. 아니면 물을 뿌리시려나.
“합격!”
“……네?”
공작 부인이 불현듯 내 양손을 부여잡고 위아래로 힘차게 휘둘렀다.
“카르시온의 얼굴을 보고 뭔가 착각에 빠진 아이라면 어떻게든 뜯어말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현명한 아이였다니!”
그녀의 볼은 발갛게 달아올라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내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내뱉는 태도. 카르시온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더불어 언제든 차 버릴 수 있다는 마인드까지!”
급기야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너라면 카르시온에게 휘둘리지 않겠구나. 앞으로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하마!”
내 얼굴이 당혹감으로 인해 서서히 썩어 들어갔다.
뭐지. 이런 건 예상에 없던 반응이었는데.
* * *
실비아는 문득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고는 쿡쿡 웃었다.
‘그간 걱정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강단 있는 아이였지.’
카르시온이 성격만 제 남편을 닮은 줄 알았는데, 여자 보는 눈도 닮은 모양이었다.
사실 처음 리엔의 얼굴을 봤을 때, 너무 흥분한 나머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리엔이라는 아이는 카르시온이 항상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한 것과 똑 닮아 있었다.
몇 년간 설명으로만 리엔을 접해 와서 그런 걸까.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어찌나 마음에 차던지.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어내느라 고역일 정도였다.
‘앗. 그러고 보니 아는 체하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말을 잘랐던 것 같기도 하고.’
옅은 후회가 올라왔다. 첫인상을 이렇게 망칠 줄이야.
하지만 앞으로 기회는 많았다.
카르시온과 결혼하면 제 며느리 아니던가.
‘세상에, 리엔이 내 며느리라니.’
실비아는 짧은 사이에 리엔과 함께할 미래를 그려 보고는, 신이 나서 남편을 불렀다.
“여보.”
“불렀나, 실비아.”
평소보다 톤이 한층 높은 실비아의 부름에 공작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걸쳐 있는 상태였다.
“있잖아요, 여보.”
“그래, 듣고 있다.”
실비아가 어떤 말을 해도 맞장구를 쳐줄 자신이 있던 공작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이어진 그녀의 말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희 손주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
“……뭐?”
* * *
공작 부인과 만남 이후 나는 일주일 넘게 혼란 상태에 빠졌었다.
덕분에 졸업 시험도 어떻게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무의식이 나 대신 시험을 봐줬다고 하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려나.
“뭐, 통과했으면 됐지.”
나는 개별 통지로 받은 졸업 시험 결과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책상에 엎드려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카르시온을 밀어냈던 것은, 리시안셔스 공작 가문에서 평민인 나를 반길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되레 나를 반기시는 눈치였지…….”
공작 부인이 제 아들은 평생 결혼을 못 할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기숙사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얼떨떨했지만, 확실히 며칠간은 기쁜 마음이었다.
어쩌면 카르시온과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금방 꺼져 버렸다.
뒤늦게 깨달은 까닭이다.
‘렉스 베고니아.’
나에게는 렉스 베고니아라는 걸림돌이 남아 있다는 것을.
베고니아 공작가와 리시안셔스 공작가는 옛날부터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각각 제국의 검과 마법을 대표하는 가문이라 더욱 그랬다.
운명의 장난질인지 뭔지.
장차 베고니아와 리시안셔스 공작가를 이끌어 갈 두 명이 나에게 집착하고 있었으니.
장차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렉스 베고니아는 이미 권력을 쥐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사이에 낀다면 정말 가문끼리 피를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공작 부인이 내게 호감을 보였다 한들, 리시안셔스 공작 또한 나를 반길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공작 부인이 한 말도 지금 생각해 보면 의심이 갔다.
내가 카르시온을 언제든 차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서 마음에 든다니.
“……아무리 카온이 제멋대로라고는 하지만, 나는 남이고 카온은 아들이잖아.”
게다가 카르시온의 성격이 어떻든 간, 그와 혼인하고 싶어 하는 영애들은 차고 넘쳤다.
지금처럼 공작 부인이 나서서 설득한다면 한도 끝도 없다는 얘기다.
카르시온이 그의 평판이 바닥을 기고 있는 와중에도 그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존재하는 것만 봐도 쉽게 도출할 수 있는 문제였다.
정말 좋아해서인지, 그의 옆자리가 탐이 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긴 고민 끝에 다른 사람에게 이 문제에 관해 상담해 보기로 했다.
제인은 공작 부인과 친분이 있어 편파적일 수 있으니 제외하도록 하고.
지극히 어른의 관점에서 내 결혼 문제에 관해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
이모에게는 상담할 수 없었다. 나와 렉스 베고니아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는 건 아칸더스와 애처가 아저씨인데.
아칸더스는 귀족도 아닐뿐더러 결혼한 적이 없으니…….
나는 결국 아저씨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사실 편지를 붙이면서도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괜찮다고, 한번 부딪혀 보라고 떠밀어 주기를 말이다.
시끄러운 교실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였다.
교실 뒷문이 쾅 하고 열리며 누군가의 달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인, 리엔! 나 졸업 시험 통과했어!”
목소리의 주인은 한스였다.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던 나는 그의 졸업 시험 통과 소식에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뭐? 진짜?”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닌지 단잠에 빠져 있던 제인이 아직 잠이 채 가지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꿈인가? 이상하다. 한스가 졸업 시험에 통과할 리 없는데.”
야, 너 그거 지금 입으로 말했어.
다행히 한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신난 얼굴이었다.
“이것 봐!”
그가 제인과 내 앞에서 ‘통과’라고 적힌 종이를 펼쳐 보였다.
믿기지 않아 눈을 비벼 봤지만, 글씨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와 잘됐다. 축하해.’
“와 진짜네. 필기시험 커닝했냐.”
아차.
나도 너무 놀란 나머지 실수로 속마음과 바꿔 말하고 말았다.
그에 한스는 더욱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설명했다.
“솔직히 꼼짝없이 떨어질 줄 알았거든? 미리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고.”
응. 나도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지 뭐야.
“필기시험은 벼락치기로 과락을 겨우 면하긴 했는데, 실기는 더더욱 자신 없어서 말이야.”
그렇지. 실기는 필기처럼 찍는 것도 못하니까…….
“그런데 실기에서 어떤 약을 만들지 뽑는데 글쎄, 진통제가 나온 거야!”
“와우.”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진통제를 뽑았다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스는 감정이 벅차올랐는지, 울먹이며 내게 달라붙었다.
“고마워 리엔! 넌 내 구원이야!”
나는 질색하며 그를 밀어내었다.
“떨어져. 징그럽게 왜 이래? 네 여자 친구도 보고 있잖아.”
2학년 때 한스를 통해 유통했던 진통제는 이제 온 제국민이 쓰는 국민 진통제가 되었다.
사실 약의 레시피는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지 오래다.
하지만 원조라는 이미지 때문일까, 사람들은 대부분 한스네 상단에서 유통하는 진통제만 구매하곤 했다.
가격이 폭리를 취하지 않고 적당했다는 점도 한몫했고.
어쨌든 결론은 진통제가 공개 레시피가 됐다는 것.
약초를 응용한 약이라서 그런지, 아카데미에서도 진통제 만드는 법을 배운 적 있다.
졸업 시험에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거다.
진통제는 한스가 완벽히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약 중 하나였다.
상단에서 대량 생산 과정을 거치며 만드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넌 정말 나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