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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90)화 (90/161)

90화

“그러게. 리엔 네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제인과도 영원히 못 만났을 거야 아니야.”

한스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제인이 한시름 놨다는 듯 웃었다.

“축하해, 한스. 이제 졸업 여행도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겠네.”

“맞아. 나도 너 혼자 떨어지면 분위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레나 아카데미는 졸업 학년 때 딱 한 번,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 졸업 여행을 갔다.

아카데미 생활을 통틀어 학년 전체가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인 셈이다.

내 맞장구에 한스가 너무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나만 졸업 시험에 떨어질 거로 생각했던 거야?”

“응.”

“와 그렇게 바로 답하면 나 상처받는데.”

전혀 상처받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을 봐라. 걔들이 떨어지면 누가 아카데미를 졸업할 수 있겠어.”

“그건……! 맞는 말이네, 헤헤.”

한스가 빠르게 인정하며 실실 웃고 있을 때였다.

카르시온과 피오르가 교실 안으로 들어오며 손을 흔들었다.

“리엔, 나 왔어.”

“뭐야, 다 모여 있네.”

나는 그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 물었다.

“둘이 나란히 웬일이래. 시험 떨어져서 위로받으려고 온 거야?”

그들이라면 당연히 통과했을 것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장난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피오르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받아친다.

“아니. 너 떨어진 거 놀려 주러 왔지.”

“그것참 눈물 나게 고맙네. 네가 떨어져서 다른 사람도 떨어졌다고 생각했나 보구나.”

피오르는 통과 종이를 내 눈앞에 흔들어 보이며 여유로운 표정을 했다.

“설마. 난 머리 빼면 시체잖아.”

……누구나 머리를 빼면 시체가 되고 말 텐데.

반박할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카르시온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어왔다.

“그래서 리엔은 어떻게 됐어? 요즘 생각이 많아 보이던데. 혹시 실수한 거 아니지?”

생각이 많았던 건 또 어떻게 알았대.

나는 주머니에 구겨 넣어 놨던 졸업시험 결과 종이를 꺼내 카르시온의 손에 쥐여 주었다.

“당연히 통과지. 날 뭐로 보고.”

카르시온은 그제야 얼굴에 근심을 지우고 밝게 웃었다.

“역시 리엔이 떨어질 리가 없지. 아, 이것도 기념인데 우리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그는 내가 건넨 종이를 슬쩍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입으로는 수작을 부렸다.

나는 그의 작태에 허, 하고 짧게 웃었다. 손과 입이 아주 요망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저걸 가져가서 어디에 쓰려고. 전시라도 해놓을 건가.

“여기 모여 있는 사람 전부 합격 받았는데 무슨. 괜히 유난 떨지 마.”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거절을 입에 담자 카르시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접어 올렸다.

“이번에 수도 외각에 새로 생겼다는 디저트 가게는? 슈가 정말 예술이라더라.”

“……생각해 볼게.”

“좋아.”

피오르는 이런 우리 둘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슈에 영혼이라도 팔겠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아, 며칠 후에 졸업 여행이라서 생각난 건데 너희 그거 알아?”

“뭔데?”

나와 한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제인은 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지.”

“그게 뭔데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한스가 어서 말해 달라며 둘을 재촉했다.

그러자 피오르가 갑자기 분위기를 잡으며 낮게 깔린 음성으로 설명했다.

“아레나 아카데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7대 불가사리.”

“와, 우리 아카데미에 그런 게 있었었어?”

한스는 흥미가 동한 듯 눈을 반짝였다. 그에 비해 내 두 눈은 흐릿해져 갔다.

불가사리가 아니라 불가사의겠지.

내 반응이 신통치 않다는 것을 발견한 피오르는 씩 웃었다.

“리엔.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불가사리 맞아.”

그러고는 어디서 났는지 고무줄로 별 모양을 뚝딱 만들어 보여 주었다.

……진짜 불가사리였어?

내 당황한 표정을 본 피오르는 얼굴 근육을 씰룩였다.

“풉.”

뭐야, 왜 저래.

그러다 결국 배를 잡고 웃기 시작하는 피오르.

“그걸 속아? 푸하하!”

“…….”

젠장. 저런 얕은수에 당하다니.

나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앙다물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카르시온이 방긋 웃으며 피오르에게 정의의 넥 슬라이스를 날렸다.

“그만 처 웃어.”

“억!”

피오르가 목을 잡고 캑캑거리는 동안, 제인은 대신 설명을 이어 갔다.

“7대 불가사리…… 아니, 불가사의 중 피오르가 말한 건 졸업 여행에 관한 거일 거야.”

“졸업 여행에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어?”

제인은 조금 꺼림직하다는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우리 아카데미의 졸업 여행은 매년 같은 곳으로 가는 건 알고 있지?”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이상한 건, 누구도 일정을 모른다는 거야.”

“응?”

일정을 모른다니? 적어도 뭘 할지는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졸업생들도 교수님도 어디로 가는지, 가서 뭘 하는지 알려 주지 않는대.”

굉장히 수상했다.

“졸업생들도?”

“응. 그래서 내가 복학 전에 친했던 애들에게 연락해 물어봤는데…….”

제인은 잠시 눈을 굴리며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씩 웃으면서 최고의 졸업 여행이 될 거라고 말해 주더라.”

“……최고라고?”

“응. 다들 입을 모아 칭찬하기 바쁘더라고. 풍경이며 잠자는 곳이며 음식까지 전부 완벽했대.”

어느새 회복한 피오르도 제인의 말에 의견을 보탰다.

“그게 제일 의심스러운 부분이지. 아무리 좋았어도 귀족인 학생들도 잔뜩 있는데, 작은 불만조차 나오지 않았다는 게.”

싸늘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불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피오르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한숨처럼 말했다.

“나도 뭔가 수상해서 친했던 선배에게 그럼 또 가고 싶냐고 물어보니까, 의미심장하게 웃더라.”

“와 그거…….”

우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 같이 눈빛 교환을 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지금이라도 졸업 여행 취소 신청해야 하는 거 아니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분위기가 졸업 여행 탈주로 흐르고 있을 무렵.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자리에 없던 쿤이었다.

“다들 왜 가 보기도 전에 좋지 않을 거라 확신하십니까?”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봤다.

“들었어?”

“죄송합니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귀가 좋아서요.”

“됐어. 딱히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었고.”

나는 그가 대화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을 수 있도록 질문을 던졌다.

“쿤, 너는 졸업 여행에 대해 뭐 들은 거 없어?”

“모릅니다. 하지만 가 보면 알게 되겠지요.”

그의 대답에 나를 포함한 몇몇이 대꾸했다.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니야?”

“……탈출은 지능 순이라던데.”

“으, 나는 직접 체험하며 알고 싶지 않아서.”

그에 쿤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걸치며 나긋하게 말했다.

“졸업생들의 말이 진짜 일 수도 있지요. 설령 좋았다는 말이 거짓말이라 해도,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굶기거나 마물에게 먹이로 던지거나 하겠습니까?”

“흠.”

맞는 말이었다.

해 봤자 시설이 노후 하거나 음식이 맛없는 정도겠지.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쿤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아 넣었다.

“마지막으로 추억을 쌓을 기회이지 않습니까. 길게 다녀오는 것도 아니고 1박인데 그 정도는 감수할만하지 않겠습니까?”

저것 또한 지극히 맞는 말이었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서 가장 귀하게 자랐을 쿤이 저렇게 말을 하는 걸 보니, 어쩐지 내가 굉장히 엄살을 떤 것 같았다.

좋아. 결심했다.

“나는 갈래. 졸업 여행 끝나면 바로 방학이잖아. 방학이 끝나면 일주일 후 바로 졸업이고. 그 사이에 하나라도 더 추억을 쌓는 게 좋잖아?”

내가 먼저 참가 의사를 밝히자 뒤이어 다른 애들도 긍정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리엔이 간다면 나도 갈게.”

“그래, 쿤의 말처럼 굶기기야 하겠어? 풀떼기만 먹이면 자동으로 다이어트 돼서 오히려 좋지.”

“마물 먹이로 던져지면 그 자리에서 마물 기피제를 팔아야겠다.”

피오르는 씩 웃으며 여유까지 부렸다.

“하긴. 아무리 못해도 검술부에서 분기별로 가는 훈련보다 열악한 환경은 아니겠지.”

전부 참가 의사를 내비친 것을 확인하고, 나는 피오르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럼 대충 졸업 여행 관련 건은 알겠고, 나머지 불가사의는 뭐야?”

“하나는 좀 유명한 건데, 우리 아카데미는 학생회장이 없잖아.”

“그치.”

특별히 정해야 하는 사항이 있다면 반 대표끼리 모여 의논했다.

반대표 또한 언제든지 바꿀 수 있었기에 사실상 권력을 가진 학생은 없는 셈이었다.

“그런데 졸업식 때는 학생대표로 공로상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

“무슨 기준으로?”

“그 기준은 아무도 몰라. 그래서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거지.”

“……여기서 아레나 아카데미의 실체가 드러나는 건가.”

이만큼 학생의 편의를 봐주는 아카데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단체는 없나 보다.

조금 시무룩한 기색으로 있으려니 피오르가 다소 희망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쪽으로만 확신할 수만은 없는 게, 뽑힌 기준을 진짜 모르겠거든.”

“고위 귀족 아니면 돈이 많은 가문의 학생이 받은 거 아니야?”

“아니야. 신분과 전혀 관련 없었어. 대체로 인기 많은 학생이 받긴 했지만, 절대적인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상을 교수님이 받은 해도 있다고.”

뭐야, 거기서 교수님이 왜 나와요.

“……학생대표 공로상이라며?”

“벌써 세 번째 말하는 거지만, 그래서 7대 불가사의라니까.”

하긴. 쉽게 추론할 수 있었으면 불가사의라는 이름이 붙지도 않았겠지.

“다른 건?”

이번에는 제인이 설명을 이어 갔다.

“다른 건 불가사의라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사소한 의문이야. 그냥 확인되지 않은 소문 같은 것도 있고.”

“예를 들어?”

“아레나 아카데미 이사장의 정체라든지, 고양이 액체 설이라든지…….”

뭔가 우리 아카데미와 전혀 상관없는 게 껴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아카데미가 설립되기 전에는 이곳이 공동묘지였다는 소문도 있고. 분수대 쪽 동상이 살아 움직이는 걸 봤다는 애도 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학교는 공동묘지 위에 짓는 게 국룰 인가 보다.

“그럼 마지막 하나는 뭔데?”

“괴팍한 조지 교수님과 귀차니즘 마스터인 월터 교수님이 어떻게 친해졌는지였을 걸.”

아. 조지 교수님과 월터 교수님이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내가 알고 있었다.

월터 교수님이 학생 시절에 조지 교수님이 내내 담임이었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나는 아칸더스의 조언대로 월터 교수님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조지 교수님은 월터 교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지 않나.

불안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걱정됐다.

나는 그동안 방학 때 백작가로 돌아가지 않고 버텨왔다.

렉스 베고니아가 기다리고 있을까 겁이 난 탓이다.

그래서 할 것도 없겠다. 방학 때면 못 이기는 척 조지 교수님의 연구를 도와드리곤 했는데.

그 때문일까, 조지 교수님에게 정이 많이 들어 버렸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나는 결국 나서지 않기로 했다.

조지 교수님을 설득할 명분도 없을뿐더러 묘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월터 교수님이 조지 교수님을 해칠 리 없다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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