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리시안셔스 공작은 책상에 올라와 있는 리엔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빨리 왔군.”
리엔의 편지는 제게로 오기까지 다른 편지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주소를 공작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려놨기 때문이다.
편지의 앞쪽은 평소와 같은 안부 묻기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편지를 읽어 나가다가 겨우 나온 본론.
공작은 그 문구를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건 제 친구 이야기인데요.]
“제 이야기군.”
옅게 웃음기를 머금은 채 다시 편지를 다시 읽어 나가는데.
읽어 내려갈수록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 친구는 졸업하고도 남자애와 연락을 이어 나갈지 말지 고민 중인 것 같아요.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작은 다 읽은 편지를 조용히 책상에 내려놓았다.
“……일이 복잡하게 됐군.”
리엔이 다른 귀족가의 성을 받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누구는 리엔의 이름 뒤에 리시안셔스라는 성을 붙여 주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렸는데.
그렇지 않아도 이쯤이면 친해졌다 싶어, 다시 딸이 되겠냐는 제안을 하려던 참이었다.
예전에 리엔에게 받았던 조언대로 아내의 허락까지 맡아 놓은 상태였다.
사실 아내는 처음 제가 리시안셔스의 성을 주고 싶은 아이가 있다고 했을 때, 극구 반대하며 나섰다.
하지만 리엔에 대해 설명하자 그녀는 의아할 정도로 반색하며 좋아했다.
‘잠시만요. 이름이 리엔이라고요?’
‘응. 지금 아레나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고, 카르시온과 동갑이야.’
‘외모는 어떻게 생겼죠?’
‘흑발에 흑안. 어여쁘고 똘똘한 아이이니 당신도 마음에 들 거라 장담해.’
‘……그 아이가 우리와 완벽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드네요.’
‘그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거부감의 들 수는 있지. 하지만 실비아, 리엔은 정말 괜찮은……뭐?’
‘아이의 방은 내일부터 차차 꾸며보도록 할까요?’
그녀의 태세전환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쨌든 허락은 확실히 받았다.
그런데 그걸 다른 가문에서 결혼이라는 쉬운 수단으로 앗아가려 하다니.
공작의 눈이 일순간 날카롭게 번뜩였다.
“10년은 이르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그의 앞에 부복했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외출하겠다.”
“마차나 말을 준비할까요.”
“급한 사항이니 마법으로 다녀오겠다. 실비아에게는 저녁 먹기 전까지 오겠다 전해.”
공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발밑으로 마법진이 생겨났다.
부하는 흐릿해져 가는 공작의 신형을 보며 생각했다.
‘오랜만에 누구 하나 묻으러 가시는구나.’하고.
공작이 도착한 곳은 리엔의 기숙사 건물 앞이었다.
몇 년 전 리엔에게 꾸중을 들은 이후로 기숙사 건물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는 그였다.
기숙사가 있는 부지도 아레나 아카데미의 관할이라, 외부인 금지 규칙을 어기고 들어왔다는 건 달라지지 않지만 어쨌든.
그에게 아카데미에 걸려 있는 방범 마법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기숙사 앞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공작의 시야에 단정히 교복을 입은 리엔이 들어왔다.
공작은 리엔이 교복을 입은 모습은 처음 봤기에, 새삼 리엔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됐을 나이.
덩치 차이가 나서 그런가, 제 아들 카르시온과 동갑인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 리엔도 공작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저씨?”
공작은 생각을 구석에 몰아넣으며 리엔에게 다가갔다.
“진짜 아저씨잖아? 기별도 없이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편지를 받고 왔다.”
“편지 때문에요? 그냥 편지로 말씀해 주셔도 괜찮은데.”
“편지로 말할 사항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얼굴에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리엔은 내심 놀란 상태였다.
편지를 보낸 시기를 따져보면,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찾아온 듯했다.
게다가 표정도 심상치 않은 게 혹, 자신이 실수한 게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안 된다.”
“네?”
얼을 타던 것도 잠시, 리엔은 금세 공작의 말이 편지에 쓴 물음에 대한 답임을 깨달았다.
기분이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작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게 호감을 표했다던 귀부인의 말에 넘어가서는 안 돼.”
“……분명 친구 이야기라고 적어 놨던 것 같은데요.”
공작은 슬쩍 눈을 흘기고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그 귀부인이 제 아들을 낮추는 말을 하며 네게 호감을 표했다고 했나? 아주 여우가 따로 없는 작자로군.”
“제 친구 이야기라니까요.”
리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제 이야기라고 할 걸 그랬나 보다.
“그보다, 그 귀부인이 왜 여우 같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잘 듣거라. 그 귀부인은 네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저 외척 가문이 없는 힘없는 꼭두각시가 필요했던 거다.”
“……꼭두각시요?”
리엔이 다소 충격받은 얼굴로 읊조리자 공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민 아이를 며느리로 들일 정도로 자신의 권력이 오래 유지되길 바랐던 거지.”
아저씨가 자신에게 해 준 말은 허황된 말이 아니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
리엔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하지만 제 눈에는 귀부인이 제게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공작은 묵묵히 리엔의 머리에 툭 손을 얹었다. 그러자 리엔이 머리를 털어 내며 따지듯 물었다.
“아저씨도 저를 몇 번 만나보지 않았을 당시, 딸이 되겠냐 제안하신 적 있잖아요.”
공작은 갈 곳을 잃은 손을 다소 시무룩하게 내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리엔을 바라봤다.
“어쩌면 아저씨처럼 정말 제가 마음에 들으셨던 걸 수도 있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널 반긴다고 해도 문제다.”
그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 막힘없이 이유를 늘어놓았다.
“라이벌 관계에 있는 가문의 영식도 네게 집착하고 있다고 했지. 두 가문 사이에 낀 너는 필시 위험해 처할 거다.”
“그건…….”
리엔 또한 생각했던 문제였다.
제가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 자신 때문에 두 가문 사이에 분란이 일어날까 걱정했다는 게 다르지만.
“두 가문의 영식들이 아무리 너를 좋아한다고 한들, 제 안위보다 중요하게 생각할까?”
공작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두 영식 중 어느 쪽에 붙든, 불리해지는 순간 상대방의 전리품으로 전락할 테지.”
“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언제나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자고 다짐했었는데.
어느새 다짐은 흐트러지고 헛된 꿈에 젖어 있었다.
아카데미가 작은 우물이라면, 사교계는 호수였다.
저보다 어여쁘고 다정하며 집안까지 좋은 영애는 널리고 널렸을 터였다.
졸업하고 나서도 그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믿음은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카르시온이 제게 보이는 다정함에 취해서,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으려 했던 것 같다.
리엔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먼발치에서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
‘이것 또한 사랑이겠지.’
사실 이미 한스를 통해 졸업 후 지낼 거처를 마련해 둔 상태였다.
백작가에는 그간 진통제로 벌었던 돈을 전부 달아 놓기로 했고.
자신이 떠난 후 렉스 베고니아가 날뛸 것을 대비한 것이다.
다른 약들로 벌어들인 돈도 많았지만, 진통제로 쌓은 부는 더욱 어마어마했다.
최근에는 라그라스 제국뿐 아니라 여러 국가에 수출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 해도 어딘가에서는 진통제가 팔리고 있을 터였다.
렉스 베고니아가 백작가에 어떤 보복을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시달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경제적’인 부분만이라는 게 맹점이지만, 이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리엔은 눈을 번쩍 뜨며 공작에게 감사를 표했다.
“조언 감사드려요. 덕분에 마음을 정했어요.”
리엔의 단호한 대답에, 급한 불을 껐다 생각한 공작은 슬며시 본론을 꺼냈다.
“사실 다른 방법이 있긴 하다.”
“……뭔데요?”
“네가 내 딸로 입양 오는 것.”
“그거 아직도 유효한 거였어요?”
공작은 당연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아내가 손주 이야기를 꺼내더군.”
“손주요?”
뜬금없는 손주 타령에 리엔은 얼굴을 구기며 이상한 표정을 지어냈다.
그러다 문득, 아저씨 아들이 자신과 동갑이라고 했던 걸 상기했다.
연말이니 아들도 웬만하면 생일이 지나 성인일 테고, 몇 년 안에 손주를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귀족들은 후계자를 낳기 위해 혼인을 일찍이 하곤 했으니까.
“아무래도 아내가 외로움을 타는 것 같은데, 네가 우리 부부의 딸이 되는 건 어떤가. 물론 네 조언대로 아내의 허락은 받아놨다.”
……?
손주 이야기가 대체 어떻게 거기로 넘어간 것인지.
“왜 결론이 그렇게 되는 거죠. 아들이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되는 거잖아요.”
청산유수로 말을 하던 공작은 그 질문만큼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손주를 보겠다는 생각은 일찍이 접어 놓은 상태였다.
도무지 자신의 아들이 누군가와 결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리엔에게 곧이곧대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카르시온 성격이 파탄 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입양 오려 하지 않겠지.’
그동안 리엔에게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공작은 세간에 퍼진 자신의 소문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대부분이 부풀려지거나 거짓이 아닌, 있었던 그대로의 일이라는 것도.
리엔이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다면…….
‘높은 확률로 도망간다.’
일단 계약서를 작성하든, 구두로 확답을 듣든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공작은 부디 리엔이 혹하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딸이 된다면 고민할 필요 없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이든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어.”
공작은 눈을 번뜩이며 덧붙였다.
“단, 연애는 네가 선택한 영식이 아비인 내 눈에 차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이미 저를 딸로 들인 것 같은 언사에, 리엔은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저씨 눈빛만 보면 평생 결혼 못 할 것 같은데요.”
제국은 넓고 귀족은 많았다.
하지만 공작가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수가 적었다.
특히나 그 중 리시안셔스 공작가는 황실을 제외하면 명실상부 제국의 최고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저씨가 높은 신분이라 해도, 두 공작가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
리엔은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애둘러 변명했다.
“제안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돌아가신 엄마 아빠의 딸로 남고 싶어서요.”
공작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렇게 말한다면 더 설득할 명분이 없어지지 않나.
그때, 리엔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아, 그리고 저 졸업하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독립할 예정이에요.”
공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수도와 멀리 떨어지면 만나서 설득하기가 어려워질 텐데.
“……바뀐 주소는 어떻게 되지?”
리엔은 잠깐 고민에 빠졌다.
렉스 베고니아를 피해 도망가는 입장이기에, 선뜻 알려 주기가 힘들었다.
친구들과도 사업과 연관된 한스 말고는 전부 연락을 끊으려 했다.
……아저씨는 베고니아와 연관될 일이 없으니까 알려 드려도 괜찮지 않을까?
오히려 아카데미에서 대놓고 붙어 다녔던 제인보다 안전할지도 몰랐다.
“주소는 아직 외우지 못했어요. 나중에 편지로 알려 드릴게요.”
“영지와 마을 이름은?”
“가리르 영지의 어브서 마을로 갈 예정이에요.”
“둘 다 처음 들어 보는군.”
공작이 작게 읊조린 말에 리엔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도에 이름조차 표기되지 못한, 작고 작은 마을이었으니까.
‘제국이 넓어서 다행이야.’
드넓은 제국에서 숨어 사는 사람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격과 같았다.
오죽하면 제국에서 범죄자에게 가장 먼저 새기는 마법이 추적 마법이겠는가.
리엔이 자국에 대한 애국심을 불태우고 있을 무렵.
공작은 속으로 그 이름을 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겼다.
‘……가리르 어브서. 어감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