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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92)화 (92/161)

92화

고대하고 고대하지 않았던, 졸업 여행의 날이 밝았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학생 인원 체크를 끝낸 교수님이 손짓으로 신호했다. 그러자 초대형 마법진에 서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시동어를 외친다.

“워프!”

수백 명의 학생 발밑으로 마법진이 천천히 떠오르며 시야가 반전됐다.

“으아…….”

어지러워 죽겠다.

카르시온의 마법으로 텔레포트나 공간 이동을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원래 대규모 공간 이동은 이렇게 구린 건가.

나만 어지러웠던 게 아닌지 주변 학생들도 헛구역질하거나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우욱.”

“매스꺼워…….”

나는 그 장면을 보며 혀를 찼다.

시작부터 좋지 않군.

그나마 멀미가 덜했던 나는 빠르게 회복하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베일에 싸였던 졸업 여행의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그래도 명색의 아레나 아카데미인데 짜게 굴지는 않았겠지.

라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을 굴렸건만.

“이게 뭐야.”

시야에 들어찬 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절경을 이루고 있는 빽빽한 나무였다.

“……예쁘기는 한데.”

보이는 거라고는 눈뿐인 여기서 대체 뭘 한다는 건지.

가만히 서서 상황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다들 정숙!!!”

고막이 쓰라릴 정도의 호통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산 전체에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큰 목소리였는데, 확성 마법까지 썼나 보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앞쪽의 단상이었다.

단상에는 누군가 빨간색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친애하는 아레나 아카데미 학생 여러분, 아스타 산맥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아스타 산맥? 하지만 그곳은 마물 서식지로 유명한 곳 아닌가.

설마. 내가 뭘 잘못 들은 거겠지.

대체 어떤 아카데미에서 미쳤다고 졸업 여행을 마물 서식지로 오겠어.

나는 솟구치는 불안감을 애써 가라앉히며 다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오늘 하루, 여러분들의 관리 감독을 맡게 된 교관입니다.”

조용.

그의 소개가 끝나자 장내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이쯤 되면 한 사람이라도 손뼉을 쳐 줬을 법한데.

교관도 그게 못내 언짢았는지 눈매를 잔뜩 좁히며 한층 커진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들이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 침을 찍찍 뱉는 행위. 잘 봤습니다.”

헛구역질한 건데요.

속으로 소심하게 대꾸해 봤지만 그게 저 교관에게 들릴 리 없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는 여러분들이 하는 행동에 따라 천사가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루시퍼세요?

나는 저 말 한마디에, 완벽하게 깨닫고 말았다.

선배들이 왜 이를 악물고 최고의 졸업 여행이 될 거라며 극찬했는지를.

학생들이 술렁였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모두의 얼굴에는 하나 같이 ‘조졌다.’라는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학생 여러분들도 익히 알다시피, 아레나 아카데미는 제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제국뿐이겠는가? 귀족들도 인재영입을 위해 너도나도 후원하는 곳이 아레나 아카데미였다.

“시설이 좋은 것도, 장학금 제도가 잘 되어 있는 것도 세금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는 라그라스 제국민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서론이 긴 걸까.

“그래서 아카데미를 졸업해 완전한 사회인이 되기 전,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작게나마 보답할 기회를 주려 합니다.”

……예? 누구 마음 대로요?

그는 개소리를 그럴듯한 개소리로 바꿔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개소리로밖에 안 들린다는 뜻이다.

“제가 서 있는 곳을 기준으로 반경 300m까지는 안전구역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밖은 안전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변으로 크게 선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철장과 경고 표지판이 없다는 점이 다르지만 분명 어디서 많이 본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마물이 사는 우리 아카데미 뒷산이라든지.

잠시만.

“……마물 배리어?”

누군가 읊조린 말에 교관이 친히 대답을 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이미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여기 산 전체는 마물 서식지입니다.”

미친.

진짜 마물 서식지로 데려왔다고? 그것도 학년 전체를?

교관은 썩어 들어가는 학생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한없이 태연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흡족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여러분들은 오늘 하루, 신나게 마물을 잡고 핵을 가져오시면 됩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졸업 여행을 마물 토벌로 하게 생겼다.

“그 표정은 뭡니까. 여기 놀러 왔습니까?”

우우우-

“놀러 온 거 맞는데요!”

학생들은 급기야 대놓고 불만 토해내고 있었다.

“노동력 착취 아니야?”

“아카데미에서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인데 이게 뭐야.”

“그냥 튈까.”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우리 나잇대 사람들은 유독 인성이 파탄 났다는 세대였다.

특히나 교수님들이 입을 모아 말씀하시기를, 그중 우리 학년이 최고라고 할 정도였다.

어차피 졸업유무도 결정 났겠다, 아이들의 눈에는 뵈는 게 없어 보였다.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던 교관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입을 연다.

“지금까지 제가 본 학생 중에 여러분이 최악입니다.”

짧은 시간에 우리를 정확히 파악하신 듯했다.

다른 애들이 속닥거리는 말들을 들어 보니 상당수가 탈주를 꿈꾸고 있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미 함정에 빠진 상태였다.

“여러분들이 불만을 표현하신다 하더라도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곳에 왔고, 돌아갈 방법은 올 때와 같은 대규모 공간 이동 마법뿐.”

맞는 말이라서 더욱 짜증이 났다.

빌어먹을 졸업생들, 이런 졸업 여행을 극찬하고 다녀?

졸업생들을 향한 원망을 불태우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걸어서 가신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곳을 이탈한 순간, 안전은 본인의 몫입니다.”

교관은 선심을 쓰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고생해 줄 여러분들을 위해 숙소는 제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숙소제공은 당연한 거 아닌가.

있는 거라고는 눈뿐인 이 숲속에서 그대로 자다가 동사할 일 있나.

“아, 물론 여러분들의 사기 증진을 위한 상품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상품이라는 말에 그제야 학생들 낯빛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뿐이었다. 이어진 말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식사는 마물의 핵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급은 1점. 중급은 3점. 상급은 위험할 수 있으니 포함하지 않겠습니다.”

숙소제공을 선심 쓰듯 말한 게 식사는 무료가 아니어서였구나.

우우우-!

순식간에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그는 예상했다는 듯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흠. 다들 불만스러워하시는 것 같으니, 상급 마물의 핵은 5점으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야유소리가 더욱 커졌다.

뻔뻔한 대답이었다.

애초에 야유를 한 건 상급 마물의 핵은 취급하지 않겠다고 해서가 아니라, 음식을 마물의 핵으로 구매해야 한다는 점에서였다.

게다가 상급 마물은 전투계열 상위권 5명이 모여도 간신히 잡을 정도였다.

10점을 줘도 한참은 모자라는데, 5점이라는 것은 그냥 잡지 말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식사는 음식에 따라 점수가 다르니 부디 열심히 노력해 주시기를.”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기왕 잡혀 들어 온 거 하라는 대로 해야지.

반쯤 체념하고 있으려니 문득 시야에 교수님들이 들어왔다.

교수님들은 하나같이 통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특히나 월터 교수님은 배를 잡고 웃을 정도였다.

이 교수님들이……?

“이상, 질문 있습니까?”

교관의 물음에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비전투계열 전공 학생들은 어떻게 하죠?”

“좋은 질문입니다. 마물 토벌은 전투계열 3명 비전투계열 3명 이렇게 팀을 이뤄 진행합니다.”

팀을 꾸린다는 말에 비전투계열 전공 애들이 한시름 놓은 표정을 했다.

그래도 비전투계열이라고 해서 짐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처럼 도구를 이용해 마물을 죽일 수 있었다. 또 마물 사체 처리라든지 핵 회수라든지 여러 방면으로 보조가 가능했다.

“팀은 공정하게 뽑기로 배정될 예정입니다.”

그는 뒤쪽에 있던 네모난 상자들을 손으로 탕탕쳤다.

“참고로 식사는 무조건 팀원 전체가 같은 것을 먹어야 하니, 혼자만 많은 마물을 사냥했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것 참고 부탁드립니다.”

그가 덧붙인 설명으로는 무엇을 사든 6개 단위로만 살 수 있다고 한다.

제일 싼 빵이 1점이었으니, 빵 하나를 먹으려 해도 하급 마물 6마리를 잡아야 하는 셈이다.

어떻게든 노동력을 더 착취해 보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규칙이었다.

“멀리 나가지만 않는다면 이 일대는 하급 마물로만 구성되어 있으니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아레나 아카데미는 제국의 인재들이 한데 모인 곳이었다.

6명에 하급 마물이라면 위험에 처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교관은 이제 됐냐는 듯 턱을 들어 올렸다.

“또 질문 있습니까?”

“상품이 있다고 했는데, 설마 식사가 상품인가요?”

그때, 단상 앞으로 월터 교수가 걸어 들어갔다.

“그건 내가 설명하지.”

월터 교수는 언제 웃었냐는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

“마물의 핵을 가장 많이 가져온 사람은 졸업식 때 공로상을 받게 될 사람을 지목할 수 있다.”

?!

학생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꿈에도 몰랐던 상품이었다.

졸업 여행 하나에 7대 불가사리인가 뭔가가 2개나 밝혀질 줄도 몰랐고.

……어. 다시 생각해 보니까 자신이 받는 게 아니라 지목?

미간을 확 구기며 월터 교수님을 바라보자 그는 씩 웃었다.

“벌써 눈치챈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지목’할 수 있다는 거다.”

“누구나 지목 가능한가요?”

“그래. 아카데미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지목가능하다. 본인을 포함해서 말이지.”

와. 그래서 누가 받을지 예상할 수 없던 거였어?

“참고로 공로상을 받은 사람은 아카데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등록된다.”

명예의 전당에 박제된다는 말에 학생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인재들이 득실거리는 아레나 아카데미에 영원히 이름을 남긴다니, 엄청난 영예였다.

하지만 그 중에도 반발심을 가진 학생은 존재했다. 누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정하는 게 어디 있나요!”

월터 교수님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재미있잖아.”

확실히, 누가 받을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긴 했다.

“실제로 다른 학년이나 교수진 중 한 사람이 받는 사례도 있었지. 어때, 이제 좀 마물을 잡을 흥미가 생기나?”

“네!”

교관이 말을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월터 교수님이 실의의 빠진 우리를 보며 웃었다는 걸 알았다면 반응이 달랐을 텐데…….

“그럼 자신이 찍은 사람이 영예의 공로상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 봐라.”

월터 교수님은 그 말을 끝으로 단상에서 털레털레 내려갔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뒤늦게 외쳤다.

“아, 마물 핵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한 사람에게 몰아서 우승시키는 것도 가능하겠지.”

몰아주기라.

어쩐지 굉장히 치열한 싸움이 될 것 같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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