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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93)화 (93/161)

93화

아레나 아카데미의 졸업 여행은 숙소까지 완벽하게 구렸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이 숙소였는데 반별로 딱 2개씩. 남녀로만 배정되었다.

오두막에 들어가서 제인이 제일 먼저 한 말이 이것이었다.

“숙소는 좁고 사람은 많아서 덜 춥기야 하겠네…….”

나는 하루만 버티자며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팀원을 뽑는 것은 숙소에 짐을 푼 후, 바로 진행되었다.

인원수가 많은 터라 뽑기 통이 여러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제인과 함께 대충 아무 곳에 가서 줄을 선 후 종이를 뽑았다.

“제인, 몇 번이야?”

“나는 4번.”

“역시 다르네.”

뭐, 학년 전체가 뽑는 거라서 제인과 같은 팀이 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낯선 애들이랑 팀을 할 생각하니까 벌써 피곤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일종의 조별과제 아니던가.

제인은 그런 나를 보더니 여유롭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네 번호가 뭐든 우리는 떨어질 일 없으니까.”

“내 주변에서 사냥하려고?”

제인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회피하고는 되물었다.

“그보다 너는 몇 번이야, 리엔?”

제인은 평소보다 크게 목청을 높여 말했다.

나는 주변 애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그런가 보다 하며 다소 크게 답해 주었다.

“26번이야.”

내가 번호를 말하자마자, 옆에서 누군가의 종이가 바람을 타고 휙 날아갔다.

“앗, 내 종이!”

아주 멀리까지 날아간 것을 보니 되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소리쳤다.

“뭐야! 내 종이 어디 갔어!”

“어라, 원래 이 번호였던가……?”

쯧쯔. 종이 하나 잡고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을 때, 제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시작됐네.”

뭐가 시작되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쿤이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리엔은 몇 번을 뽑으셨습니까? 저는 26번입니다.”

“어, 진짜? 나도 26번인데.”

“운이 좋았군요.”

쿤은 눈을 휘며 다정히 웃었다.

뭐야 왜 이렇게 덤덤해?

나는 꽤 놀랐는데, 그는 같은 팀이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해 보이기만 했다.

“진짜 26번 맞아?”

내 의심 어린 물음에 그는 입을 여는 대신, 종이를 보여 주었다.

정확히 26번이었다.

그는 카르시온처럼 마법사가 아니니 환상도 아닐 터였다.

“……신기하네.”

내가 쿤의 종이를 만져보자 제인은 어쩐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왜 또 저런 표정인지.

“그럼 제인, 나랑 쿤은 자리로 가볼게. 이따가 보자.”

팀원들을 쉽게 만나게 하려고 번호별로 모이는 장소가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제인이 나를 붙잡았다.

“나도 같이 가.”

“응? 하지만 너는 4번이라 우리랑 완전히 동떨어져 있잖아.”

“괜찮으니까 가자. 팀원들이랑 다 만날 방법이 있거든.”

제인이 등을 떠밀자, 나는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25번이나 27번 애들은 벌써 거의 다 모인 것 같은데.

“늦네.”

오는 사람은 없나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제인이 별거 아니라는 듯 던진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누구처럼 하나가 아니라 전부 모으려니 늦는 거겠지.”

“뭐?”

설마? 나는 고개를 확 돌리며 쿤을 바라봤다.

“쿤, 너 혹시…….”

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며 웃었다.

“네. 말씀하세요, 리엔.”

“너 처음 뽑았던 번호가 몇 번이었어?”

“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까 26번인 것을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까.”

“구라치다 걸리면 명치 한 대.”

“42번이었습니다.”

나는 아쉬움에 입술을 핥았다.

“……조금만 더 뻗대보지.”

“하지만 제 명치는 소중한걸요.”

쿤의 실토를 받아 낸 나는 새삼 대단하다는 눈으로 제인을 바라보았다.

“넌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야?”

“6명이라고 할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아봤지. 인원이 딱 맞잖아? 곧 카르시온이랑 다른 애들도 올 거야.”

마물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나.

카르시온이 한스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옆에는 피오르도 함께였다.

카르시온은 쿤을 보더니 얼굴을 와락 구겼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야 제가 리엔과 팀원이니까요.”

“아, 어쩐지 마지막 하나가 더럽게…….”

카르시온은 쿤에게 짜증을 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금방 웃음을 지어내었다.

“어라. 리엔도 혹시 26번이야?”

그는 정확히 26번이 적힌 종이를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그것도 한 장도 아닌 4장이나.

안 봐도 누군가의 종이를 갈취했을 게 뻔했다.

26번을 전부 찾아내서 갈취한 것도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근데 카온.”

“응, 리엔.”

“네 손에 있는 26번 종이는 왜 한 장이 아니야?”

“…….”

그는 조용히 종이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그려내었다.

“휴. 대인 기피증이 있어서 걱정했는데, 리엔이랑 팀이라 다행이다.”

그에 피오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르시온의 말에 긍정했다.

“그치. 사람들이 널 기피하지.”

“아. 그쪽이라면.”

피오르의 해석이 공감됐는지, 옆에 있던 나머지 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시온은 조용히 바닥에 있는 눈을 뭉쳐 눈덩이를 만들었다.

“하하, 무슨 소리를 그렇게 섭섭하게 해.”

평온한 얼굴로 피오르에게 눈덩이를 던지는 카르시온.

다행히도 자신에게 던질 것을 예상한 피오르는 몸을 던져 눈덩이를 피해냈다.

“봤냐. 이게 검술부 엘리트의 반사신경이다.”

자신만만해하던 피오르는 빗나간 눈덩이의 잔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반으로 쩍 갈라진 눈덩이 안에는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피오르는 이건 살인미수 아니냐며 광광 날뛰었다.

그가 복수하겠다며 눈덩이를 뭉치기 시작했다.

카르시온은 피오르가 복수의 칼을 갈거나 말거나 태연하게 제인과 종이를 교환해 주었다.

그러고는 제인에게 받은 종이를 한 치의 고민 없이 땅으로 내다 버렸다.

……와, 인성.

그의 파탄 난 인성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살짝 걱정이 올라왔다.

나야 친한 애들끼리 모이면 편하고 좋지만, 이렇게 대놓고 조작해도 되는 건가.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챈 듯 제인이 나를 한 번 툭 치고는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런 애도 있는데 뭐.”

그녀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니 한스가 종이 여러 장을 들고 교환판매를 하는 중이었다.

“대체 한스 쟤는 한 장만 뽑을 수 있는 종이를 어떻게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거야.”

“아까 땅에 떨어진 거 줍는 거 봤어.”

“위조한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한스 말고도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친구와 팀이 되려고 열심히 번호를 교환 중이었다.

“걱정한 내가 바보였네.”

마음을 편하게 하며 허허 웃고 있을 때였다.

눈덩이를 잔뜩 만든 피오르가 카르시온에게 눈덩이를 던질 준비를 했다.

그러자 카르시온은 기다렸다는 듯 불 마법으로 피오르가 만든 눈덩이 녹여 버렸다.

“어라. 추워서 불 좀 피웠는데 눈이 다 녹아 버렸네.”

“아악! 잔학무도한 놈. 내 소중한 눈덩이들을……!”

“잘 노네.”

나는 그들이 하는 양을 보며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했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언성이 높아지며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때문인가 봤더니, 개인 간의 싸움이 아닌지 두 무리가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앞쪽에 나와 있는 사람은 어디서 본듯한 남자애와 말감이.

……말감이?

나는 정신이 번쩍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네가 거기 왜 있어?

당황스러운 마음에 자세히 살펴봤더니, 말감이 뒤쪽으로 서 있는 애들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리사동 부원들.

그럼 반대편은 설마?

나는 급히 말감이와 대치하고 있는 남자애가 누구인지 머리를 굴려봤다.

“아……!”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피사동 부장이잖아.

옛날에 따돌림을 당하다가 피오르가 꾸준히 말을 걸어 준 덕분에 벗어 날 수 있었다고 했나.

나중에 피오르에게 따로 들은 말을 듣고 푸시식 식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 걔? 그때 당시 그 애 가문에서 대대적으로 무역 흑자를 이루어냈다고 들었거든.’

라고 했었지 분명.

하긴, 의도가 나빴든 좋았든 피오르의 그 행동이 그에게 구원이었으면 된 거겠지.

나는 짧았던 상념을 마치고 그들이 싸우게 된 이유를 알아내려 대화에 집중했다.

피사동 부장은 제 가슴을 탕 치며 열렬히 소리쳤다.

“당연히 피오르가 상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애초에 그 상은 리엔을 위한 것이었어!”

싸움의 원인을 파악하는 건 몇 초면 충분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싸우는 건 피사동과 리사동인데, 창피함은 왜 내 몫인 건지.

“하? 우리 아카데미가 학생회장을 뽑았으면 당연히 피오르가 됐을 텐데,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뭐로? 학술제 때마다 미스 아레나에 우승하는 그 잘난 인기투표로?”

피사동의 부장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감이를 비웃었다.

“오호라, 인기가 없으니까 그런 것도 질투하는구나.”

“지금 말 다 했어? 누가 인기가 없다는 거야? 리엔은 피오르처럼 나대지 않아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많을 뿐이라고!”

“……피오르가 나대? 성격이 좋은 걸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말감이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됐고, 우리 리사동은 피사동보다 한참이나 늦게 설립됐잖아. 오히려 기간을 생각한다면 우리 쪽이 더 대단한 거 아닌가?”

말감이의 말대로, 리사동은 해가 지나갈수록 부원 수가 많아져 피사동과 필적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피사동이 많기는 했지만 무시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카사동이야 카르시온의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원래 인원수가 많지 않았다.

쿤사동도 존재하기는 했지만, 인원이 적은 건 매한가지.

아니, 그 전에 도대체 왜 저런 거로 싸우는 거야.

나는 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요.

피사동 부장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입만 털지 말고 결과로 증명해 보든지.”

“웃겨 죽겠네. 보아하니 너희 인원수가 조금 더 많다고 뻗대는 모양인데, 머리만 많다고 이기는 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야. 점수 차이가 너무 많이 차이 나서 너희의 소중한 리엔이 얼굴도 못 들고 다니면 어떡하냐?”

얼굴은 지금도 못 들 것 같은데.

“아가리 여물어. 그건 결과가 말해 주겠지.”

나는 말감이의 다소 험한 언사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눈빛을 불태우고 있었다.

“정작 본인들은 관심 없는데 너무 과열된 것 같다. 그치, 피오르.”

애써 싸움을 말려보려 했는데 이상하게도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나는 어느새 피사동 진영에 가 있는 피오르를 발견했다.

……?

너는 또 왜 거기 있냐.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니, 그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같은 팀이라고 해도 이건 양보할 수 없어, 리엔.”

나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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