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심지어 피오르의 주변으로는 그와 같은 검술부 친구들이 쭉 서 있었다.
금세 피사동이 아닌 제 친구들을 포섭해 온 듯했다.
……마물의 핵이 대결의 핵심인데, 검술부 애들이 대거 참여했다면 이건 뭐 시작도 전에 졌네.
별로 이길 생각도 없었으니 상관없지만.
피오르가 오늘따라 더욱 유치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리사동 쪽에서 굉장히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보? 그건 너희가 우세할 때 쓰는 말이지.”
리사동 쪽에는 어느새 카르시온과 쿤이 서 있었다.
너희는 또 왜 진심인 건데.
일이 커졌다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학생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려 있었다.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재미있어하는 분위기였다.
이미 한쪽에서는 내기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수습하기에는 늦었군.”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생각하기를 그만 포기했다.
* * *
결국, 피사동과 리사동의 대결이 확정되고 학생 전체의 내기 거리로 떠올랐다.
일단 우승이고 뭐고 다 뒤로하고 마물을 잡으러 나오긴 했는데…….
어쩌다 보니 시간이 남아돌게 되었다.
나는 다정히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제인과 한스를 바라봤다.
커플다운 달달한 모습이었다.
카르시온은 적당한 공간에 우리를 데려다 놓은 후, 마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마법을 걸어 주고는 자리를 떴다.
마물의 핵은 자신이 채울 테니 안전한 곳에서 편히 놀고 있으라고 당부하며.
리사동의 승리를 위해 아주 마물의 씨를 말려 버릴 기세였다.
피오르도 지지 않으려 검을 챙기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이럴 거면 팀을 왜 짠 거야.”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유일하게 자리를 뜨지 않은 전투계열 전공인 사람을 바라봤다.
“쿤, 넌 안가?”
아. 이렇게 말하면 넌 리사동이 우승하는 데에 관심 없는 거냐고 들리려나.
다행히 쿤은 별 의미를 두지 않았는지 옅게 웃을 뿐이었다.
“저까지 가면 저희 팀은 비전투계열만 남지 않습니까.”
“카르시온이 마법 걸어 주고 갔잖아. 마법이 없었다고 해도 하급 마물 정도면 나 혼자서도 충분해.”
쿤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그 독침 말입니까?”
“응.”
“……확실히 카르시온 같은 괴물을 쓰러뜨릴 정도면 무시 못 할만하겠군요.”
그가 나지막이 읊조린 말에 나는 눈을 집어 흩뿌렸다.
“야,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내는 건 반칙이지……!”
꺼내고 싶지 않은 흑역사였기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하하 웃으며 눈을 털어 내던 쿤은, 내 얼굴을 보고는 눈동자를 키웠다. 그가 돌연 움직임을 멈춘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의 눈앞에 손을 휘저었다.
“쿤. 갑자기 왜 그래?”
“……아. 죄송합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
그는 입을 달싹이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입술을 움직여 목소리를 냈다.
“리엔의 뺨이 달아오른 게 귀여워 보여서 그랬다고 하면 싫어하실 겁니까?”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이 굳어 버렸다. 카르시온이 아니라 쿤이 저런 말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퍽-!
어디선가 쿤에게 눈덩이가 날아와 어깨에 정확히 명중했다.
카르시온이 돌아왔나 했는데, 눈덩이를 던진 것은 의외로 제인이었다.
쿤이 무슨 짓이냐는 듯 제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가볍게 턱짓했다.
“심심한데 눈싸움이나 하자고.”
쿤은 한참 동안 제인과 눈빛을 교환하다가, 곧 시선을 떼고 제 어깨를 툭툭 털어 냈다.
“……그거 좋지요.”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말이었다.
오른쪽 왼쪽. 눈덩이가 쉼 없이 잘도 날아다녔다.
나는 카르시온이 놓고 간 따뜻한 코코아를 홀짝이며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쟁을 구경했다.
마침 주변에 적당한 나무 그루터기도 있어서 아예 자리를 잡은 참이었다.
“일 등급 관람석이 따로 없군.”
팝콘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오! 쿤 쟤는 혼자인데 왜 이렇게 눈덩이 만드는 게 빨라?”
“제인. 방금 한스가 눈덩이에 물 뿌린 거 봤습니다! 이건 거의 돌 아닙니까?”
“너야말로 은근슬쩍 정령으로 바람 일으키고 있지! 눈보라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네!”
나는 느긋하게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코코아를 털어 마셨다.
재미있네. 솔직히 제인이 밀릴 줄 알았는데…….
제인 쪽에는 한스가 보조로 있어서 그런지 나름 팽팽함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한스가 방금까지 제인 옆에 있던 걸 분명 봤는데.
그새 어딜 갔지?
슬쩍 눈을 굴리며 한스를 찾았다.
그는 제인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문제는…….
뒤늦게 발견한 한스가 내게 눈덩이를 조준하고 있었다는 것.
“이 비겁한……!”
나는 급하게 피하려다가 오히려 눈덩이를 정면으로 맞고 말았다.
퍽.
그것도 얼굴로.
맞은 눈덩이로 인해 시야는 가려졌지만, 한스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앗! 어, 얼굴에 던지려던 건 아니었는데……!”
거칠게 눈을 털어 내며 한스를 향해 웃었다.
“넌 뒤졌다, 새끼야.”
나는 약초가 보이면 캐려고 가져온 자루에 눈을 쓸어 담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한스에게 달려가 쏟아부었다.
“악! 눈이 옷 안으로 들어갔어!”
한스는 몸을 부르르 떨며 얼굴에 묻은 눈을 어푸어푸 털어 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나와 눈을 마주했다.
한스의 시선이 조용히 내가 들고 있는 자루로 향했다.
그가 눈을 털어 내는 동안, 나는 다시 열심히 자루에 눈을 채워 넣은 상태였다.
“항복!”
위협을 느낀 재빨리 한스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을 외쳤다.
그러나 한스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나는 그 위로 눈을 쏟아부었다.
“안됐지만 선빵을 친자에게는 자비가 없단다.”
“아아악!”
그 후로는 난장판이었다.
나는 어느새 인가부터 쿤과 제인에게도 눈을 던지고 있었고, 그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더 이상 못해. 공격하려면 하든지. 마음대로 해.”
너무 힘이 들어서 자포자기하며 뒤로 벌렁 누웠다. 그러자 제인과 한스도 그대로 누워 버렸다.
“나도.”
주변을 힐끔 둘러보니 하얗기만 했던 눈밭이 초토화 되어 있었다.
한참 밭은 숨을 뱉어 내고 있을 때였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며 누군가가 손을 뻗어 왔다.
“바닥은 찹니다, 리엔.”
“뭘, 제인이랑 한스도…….”
누워 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둘은 이미 일어나서 서로의 몸에 묻은 눈을 다정히 털어 내고 있었다.
거,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나.
나는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대충 몸을 털고는 내 전용 그루터기에 앉으려는데, 불현듯 쿤이 그런 나를 막아 세웠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쿤은 주섬주섬 목도리를 벗더니 그루터기에 깔아주었다.
“이제 됐습니다.”
“……원래는 내가 깔아 줘야 하는 건데.”
“왜 리엔이 깔아주십니까?”
쿤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얘는 자기가 아바스칸투스 제국의 황자라는 걸 인지하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긴, 이런 것도 졸업하면 못할 텐데.
황자가 제 옷을 깔아주는 걸 언제 태연히 받아보겠어. 누릴 수 있을 때 누리자.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며 그의 마음이 바뀔세라, 냉큼 자리에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저기 앉으면 엉덩이가 차가웠었는데 나야 좋지 뭐.
“쿤. 그거 알아? 이제 내가 너한테 반말할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거.”
쿤은 옅게 웃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내 말을 듣고는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다른 이는 몰라도, 리엔 만큼은 저를 대하는 말이나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럼 평생 아카데미에 다니든지.”
“리엔은 제 은인이니 말을 낮추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너는 상관없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상관있을걸.”
신분제 사회에서는 그게 당연한 이치였다.
아카데미라는 특수함이 일시적으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 냈을 뿐.
쿤은 말이 없었다. 무언가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는 둘만의 세계에 빠진 제인과 한스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리엔, 질문 하나 해도 괜찮습니까?”
나는 평소답지 않은 그의 진지한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 범죄자, 그것도 흉악한 범죄자라면 리엔은 그 가족을 감싸줄 겁니까?”
질문은 다소 뜬금없기도 했고, 저의를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네 이야기야?”
“그냥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곤란하다면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냥 궁금했던 사람치고는 표정이 지나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말해 주기로 했다.
“무슨 짓을 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하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들 보다, 내 주변 사람들이 더 소중하거든. 어지간한 일은 넘길 것 같아.”
사람이라면 팔은 안으로 굽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그게 조금 더 강했다.
“카르시온이랑 피오르만 해도 그들이 한 나쁜 행위 자체는 나무랄지언정, 그들에게 실망하고 연을 끊지는 않았잖아?”
어느 날 갑자기 한스가 사람을 죽였다며 찾아온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숨겨 줄 터였다.
친구도 그러한데, 가족은 오죽하겠는가?
“뭐, 그런 거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자, 쿤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만 더 질문해도 됩니까?”
“뭔데?”
“리엔은 귀족의 삶이 부럽습니까?
나는 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자안은 지나치게 차분해 보였다. 자그마한 파문에도 큰 파도가 일 것처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질문만큼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궁금했다.
“그 질문을 하는 저의가 뭐야, 쿤?”
“…….”
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딱히 대답이 돌아올 거라 예상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딱히 부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귀족들도 그들만의 고충이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렇, 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어. 응. 권력이 최고인 것 같더라.”
“……무엇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나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쿤은 달라지는 것 없이,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아. 이 순간이 너무나도 싫었다.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쿤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고 있기에.
하지만 나는 기어코 그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내가 고위 귀족이었으면 문제없이 카르시온과 결혼했겠지.”
그의 자안에 파문이 일었다.
나는 결국 시선을 돌리며 말을 끝맺었다.
“……라는 생각 때문에.”
그 후 쿤은 입을 열지 않았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어색한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졸업하기 전, 쿤에게 말해 주고 싶었으니까.
날 좋아하지 말라고.
그래서 일부러 카르시온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직접적으로 내보인 것이다.
1학년까지만 해도, 쿤이 나를 보는 눈빛은 정말 은인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쿤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쿤. 그는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