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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95)화 (95/161)

95화

쿤은 멀거니 서 있다가 결국, 자리를 떴다.

나는 그를 잡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제인과 한스 사이에 껴들어 어울렸다.

쿤은 어디 갔냐는 한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한스는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없었다.

“아하. 쿤도 뒤늦게 마물 잡으러 갔구나.”

제인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활짝 웃으며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말을 걸어 줬다.

하릴없이 놀기만 해서 그런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카르시온과 피오르는 식사 시간에도 급히 배만 채우고는 다시 마물을 잡으러 갔다.

그리고 돌아온 쿤은 내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괜찮은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마음을 수습한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렇게 주어진 마물 사냥 시간이 끝나고, 대망의 집계 시간이 찾아왔다.

피사동과 리사동의 싸움은 정말 학년 전체의 내기가 되어 버린 듯했다.

많은 이들이 나와 피오르에게 핵을 주고 갔다.

간혹 ‘리엔, 너에게 역배를 걸었으니 잘 부탁해!’라고 응원해 주는 애들도 있었다.

그걸 나한테 잘 부탁한다고 해 봤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지.”

나는 아예 마물을 잡지 않았다. 물론 열심히 잡았다고 해도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의미 없는 승부에 참가한 사람이 몇 명인데.

사실 다들 전반적으로 피사동의 승리를 예견하는 분위기였다.

내게 역배를 걸었다고 한 애도, 결국은 내가 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소리 아니던가.

아무래도 검술부 애들이 대거 피사동 쪽에 붙은 탓에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리사동 쪽에 카르시온이 있다고는 하나 머릿수가 월등히 밀렸으니까.

확실히 지금 상황을 보면 그럭저럭 맞는 예측이긴 했다.

받은 마물의 핵을 비교해 보면, 피오르는 세 자루가 족히 나왔지만 나는 한 자루 하고도 반이 나왔기 때문이다.

비슷하거나 조금 차이가 나는 정도라면 하급과 중급 핵의 점수 차이가 있으니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면 안 봐도 결과는 뻔했다.

승부가 육안으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갈리자, 피오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섰다.

“미안하지만 공로상은 내가 가져갈게, 리엔.”

나는 그를 바라보며 대충 손뼉을 쳐 주었다.

“우와. 대단하다. 멋져.”

“벌칙은 받을 준비는 됐지?”

나는 처음 듣는 소리에 얼굴에 잔뜩 물음표를 띄웠다.

“무슨 소리야? 그런 거 건 적 없잖아.”

“당연하지.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니까.”

피오르는 제 마음대로 벌칙을 추가하겠다는 말을 잘도 했다.

“양심은 어디 있냐. 거짓말하는 척이라도 해라.”

그러자, 피오르가 냉큼 말을 바꿨다.

“아까 지는 사람이 벌칙 받기로 했던 거 대화했던 거 기억 안 나, 리엔?”

이미 늦었어 인마.

나는 무슨 벌칙인지 들어나 보려고 질문했다.

“내가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무슨 벌칙이었더라?”

“오 분 동안 무릎 꿇고 손들고 서 있기.”

뭔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가능한 자세긴 해?”

“내가 못하는 걸 벌칙으로 내세웠겠어?”

“그럼 정식으로 벌칙 걸어.”

흔쾌히 벌칙을 걸자고 하자 피오르의 표정이 묘해졌다.

“정말?”

“네가 하자며.”

“리엔. 아직 카르시온 걸 포함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정도 차이면 가망 없어.”

“쫄리면 하지 말던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제가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럼 진짜 지는 쪽이 벌칙 수행하는 거다?”

걸렸다.

나는 얼굴에 싱그러운 웃음을 그려냈다.

“좋아.”

내가 웃자 피오르가 오한이라도 들은 듯 몸을 떨었다.

“왜 갑자기 불안하지? 저걸 뒤집을 수 있을 리 없는데.”

나는 그런 피오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넌 나중에 도박 같은 거 하지 마라, 피오르.”

사실 점심시간에 카르시온이 자신이 모은 핵을 내게 보여 줬었다.

짧은 사이에 어떻게 모았는지, 반 자루는 족히 되는 양이었다.

그것도 전부 상급 마물의 핵으로.

정말 말 그대로 학살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점심 이후의 사냥 시간이 더 길었으니 아마 한 자루는 모아왔을 것이다.

피오르가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고 있을 때였다.

타이밍이 좋게도 카르시온이 자루를 질질 끌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 미친놈이, 혼자 한 자루를 가져왔잖아?!”

피오르가 급히 달려 나가 카르시온이 가져온 자루를 열어 봤다.

그는 자루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전부 하급이랑 중급 핵이네.”

뭐?

아까 내가 뭘 잘못 봤던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피오르랑 내기 안 했지……!

나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카온. 점심시간에 나한테 보여 줬던 거 상급 마물의 핵 아니었어?”

“아, 저건 잠깐 시간이 남길래 잡아 온 거야.”

카르시온은 별거 아니라는 듯 아공간에서 자루 하나를 더 꺼냈다.

쿵.

“진짜는 여기.”

나와 피오르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피오르와 내가 동시에 카르시온이 꺼낸 자루를 열어 봤다.

아니나 다를까, 자루는 상급 마물의 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조용히 카르시온을 올려다봤다.

“카온, 내가 말한 적 있었나?”

“뭘?”

“넌 정말 최고라고.”

카르시온은 눈을 초승달처럼 접으며 느른히 웃었다.

“말한 적 있냐니, 너에게서 정확히 3번째 듣는 이야기인걸.”

카르시온이 내게 마물의 핵을 양도한 이후 더 이상의 이변은 없었다.

나는 당연하다시피 졸업식 때 공로상을 받게 될 사람을 지목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리엔. 누가 공로상을 받게 될지 지목하거라.”

월터 교수님의 재촉에 나는 좌중을 둘러봤다.

리사동 애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흠. 다들 내가 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대표로 상을 받으며 관심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졸업 후에는 렉스 베고니아를 피해 도망가야 하니까 더더욱.

나는 싱긋 웃었다.

“제가 지목할 사람은…….”

* * *

지목이 끝난 후 바로 숙소에 보내 재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일정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캠프 파이어.

학생들은 불을 중심으로 큰 원을 만들어 자리를 잡았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장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절로 평온해졌다.

그러다 어디선가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녹음구를 재생시킨 듯했다.

워낙 유명한 노래였던지라,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몇몇은 앞으로 나와 춤을 추기도 했다.

얼굴에 웃음기 가득한 애들을 보며 나는 이제야 조금 졸업 여행답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에 근엄한 얼굴로 호통을 치던 교관의 주도로 여러 게임이 이어졌다.

천사와 악마를 오간다더니, 그는 하루가 다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천사가 됐다.

그의 태도가 360도 바뀐 것은 마물의 핵을 총 집계할 때였다.

역대 최고 점수를 기록 했더랬지.

몇몇 게임에서 작은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가 진행하는 게임은 대체로 재미있었다.

예를들어 옆 사람의 어깨를 주물러 주는 거라든지…….

하필 카르시온 옆에 쿤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볼만한 장면이 펼쳐졌다.

그들은 어깨를 주무르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탈골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진 듯했다.

아예 대놓고 팔꿈치로 어깨를 찍기도 했다.

아. 그리고 피오르가 나와 내기를 했다는 게 알려지는 바람에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벌칙을 수행했다.

그의 말대로, 손들고 무릎 꿇고 서는 것은 가능했다.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이었다.

갑자기 슬픈 음악이 깔리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교관은 어리둥절한 학생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마물을 잡느라 많이 힘드셨습니까?”

그에 학생들이 무언의 긍정의 담긴 눈빛을 했다.

나야 종일 놀다시피했지만, 다른 이들은 굶지 않기 위해 열심히 마물을 사냥했을 터였다.

“집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들의 부모님은 더욱 고된 하루였을 겁니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일단 부모님이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할 거 아니야.

교관은 ‘부모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시는지 압니까.’부터 시작해 ‘효도는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는 명언까지 날렸다.

말은 안 했지만, 식사 때에도 ‘농민들의 피와 땀이 섞인…….’하면서 길게 설교를 늘어놓던 그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말을 한다고 누가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아나.

부모님을 보고 싶지 않냐며 감성을 자극해 봤자다.

오늘이 지나면 겨울 방학이 시작된다. 바로 집에 가서 가족들을 실컷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기숙사에 있어야겠지만.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분명 다들 나처럼 코웃음을 칠 줄 알았는데.

주변 둘러보니 어느새 다들 눈가를 벌겋게 붉히고는 훌쩍거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언제나 든든하기만 했던 제인마저도 말이다.

이쯤 되니 나는 내 감수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슬픈 척을 해야 하나 생각할 때였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카르시온이 날 보며 빙그레 웃었다.

“예쁘다, 리엔.”

나는 주변 상황과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너도.”

* * *

한바탕 학생들의 눈물을 쏟게 만든 후에야 캠프 파이어는 끝났다.

이제 잠을 청할 시간이었다.

하품을 하며 숙소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누군가 내 소매를 당겨왔다.

“카온?”

“혹시 침대 필요한가 해서.”

그러면서 아공간을 소환해 내는 게, 정말 침대를 가져온 눈치였다.

……세상에.

나는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단칼에 거절했다.

“사람도 간신히 누울 정도인데 무슨 침대야.”

카르시온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리엔이라면 거절할 줄 알았어. 대신 이대로 자면 추우니까 마법만 걸어 주고 갈게.”

탁.

“이 정도면 괜찮아?”

손가락을 한번 튕겼을 뿐인데 순식간에 숙소 내 공기가 훈훈해진 것을 느꼈다.

카르시온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아공간에서 두꺼운 이불을 꺼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이거 덮고 자. 여기 이불은 너무 얇더라.”

아공간에 살림이라도 차렸나.

나는 얼떨떨한 어조로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카온.”

그러자 그는 볼을 살짝 붉히며 기쁜 얼굴을 했다.

“그럼 잘 자고, 내일 보자.”

나는 카르시온이 걷는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좀 더 질척일 줄 알았는데. 줄 것만 주고 빠르게 돌아서자 어쩐지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카르시온이 몸을 홱 돌렸다.

훔쳐보다가 들킨 것만 같아서 심장이 콩닥거렸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나.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뒤로 걸어갔다.

위험하다며 잔소리를 해 봤지만, 그는 결국 작아져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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