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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96)화 (96/161)

96화

나는 카르시온이 완전히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숙소 문을 닫았다.

어서 이불이나 깔고 자려 몸을 돌렸는데…….

숙소 안에 있던 여자애들이 전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왜들 그렇게 봐?”

그러자 너도나도 입을 열며 오두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리엔은 진짜 좋겠다아!”

“방금 봤어?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 방 안이 따뜻해진 거?”

“이불은 또 어떻고? 일부러 생각해서 챙겨온 거 아니야.”

“나는 카르시온이 리엔에게만 다정해지는 게 제일 부럽더라.”

“맞아. 그게 포인트지. 차가운 북부 대공이지만, 내 여자에게만큼은 따듯하겠지라니……!”

나는 데구루루 눈을 굴렀다.

“음…….”

엄밀히 따지면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영지는 북부에 있지 않았다.

카르시온은 대공이 아니었을뿐더러, 나는 그의 여자도 아니었고.

“새삼스럽게 뭘 그래. 4년 동안 제일 많이 본 게 너희들일 텐데.”

카르시온이 우리 반에 한두 번 찾아왔었어야지.

“하지만 그때는 목격했어도 카르시온 눈치를 보느라, 리엔 너한테 말하지 못했는걸?”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그러는 건 좀 익숙해졌는데, 나와서 보니까 더 놀라운 거 있지!”

그녀들은 후후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이대로 자기는 아쉬운데 우리 찐한 대화라도 나누는 건 어때?”

어딘가 음흉함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주춤거리며 잡힌 손을 빼보려고 했다. 하지만 내 손은 이미 단단히 붙잡힌 채였다.

“뭘 기대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건 없을 거야.”

“그건 들어 보면 알지 않을까?”

어떻게든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나는 화제를 돌려보려 급히 다른 것을 생각해냈다. 문득 베개가 눈에 들어온다.

“얘들아. 그런 시시한 이야기 말고, 베개 싸움은 어때?”

그러자 내 제안을 들은 아이 중 한 명이 자신의 베개를 들어 보였다.

“내 베개는 이건데 괜찮아?”

그녀가 들어 올린 베개는 굉장히 견고해 보이는 목침이었다.

저걸로 베개 싸움을 했다간, 여기가 내 묫자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목숨이 소중했던 나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찐한 얘기는 나도 들을 수 있는 거지?”

“그럼 그럼!”

합의를 마친 우리는 다 같이 둘러앉았다.

숙소가 좁아서 앉은 게 삐뚤빼뚤했지만, 그럭저럭 원형처럼 보이긴 했다.

처음에는 다들 간을 보듯 식상한 질문들이 오갔다.

개인에게 하는 질문보다는 다수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들.

“우리 반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해?”

이 질문에서는 한 명을 제외한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쿤.”

“쿤이지.”

“리엔.”

모두가 쿤이라고 외칠 때 홀로 내 이름을 외친 사람은 제인이었다.

“제인……?”

그녀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한 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멋있는 사람이 꼭 남자여야 한다는 말은 없었잖아.”

“확실히…….”

“리엔이 멋있긴 하지.”

뜻밖에도, 제인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특히나 리사동인 낸시는 땅을 치며 제 선택을 후회하기도 했다.

“흐흑, 내가 리엔을 두고 쿤을 지목하다니……!”

그녀들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나였다. 모두 어이없어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내가?”

검지로 나 스스로를 가리키자 애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부분에서?”

“그야 예쁘기도 하고…….”

“그 유명한 다한증 치료제를 개발한 게 너라는 것도 그렇고.”

“일대 다수의 상황이나 높은 신분인 사람에게도 잘 주눅 들지 않는 점이라거나.”

“누군가를 도와주고 생색내지 않는 점도! 리엔도 보면 은근 자상하지 않아?”

“그리고 뭐니 뭐니해도 양손에 꽃을 들었다는 점?”

“그것도 전교에서 가장 높은 신분인 사람 두 명을 말이야.”

마지막으로 말한 아이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막았다.

“앗. 이거 말해도 되나?”

“사적으로 말하는 건데 뭐 어때. 솔직히 여기서 쿤이나 카르시온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 있어?”

“없지.”

“맞아. 안 보는 곳에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는 데 뭐.”

“그리고 따지려면 아까 북부 대공어쩌고 했을 때부터 따졌어야지.”

다들 신분 언급은 신경도 안 쓰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리엔 너는 둘 중에 누가 더 좋아? 카르시온? 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첫 번째는 나인가.

“쿤은 나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날 쫓아다니는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내 변명에 그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 교환을 했다.

“하지만…….”

“카르시온은 쿤에게 유독 모질게 굴잖아. 그건 쿤이 널 좋아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맞아. 좋아하는 사람에 관해서는 그런 거에 예민할 수밖에 없잖아.”

나는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쿤이 날 좋아하는 걸 카르시온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카르시온은 내가 쿤과 대화할 때면 유독 눈에 불을 켜곤 했다.

피오르나 한스와 대화할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생각해 보면, 카르시온이 쿤에게 더욱 날을 세우기 시작한 것도 쿤이 날 바라보는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오늘 팀 배정을 할 때만 해도…….

26번 종이는 카르시온이 나와 친한 사람의 몫을 전부 모아왔다.

쿤의 종이만 빼고.

쿤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 몫의 종이를 구해왔었지.

내가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생각에 빠져 있자 다들 한발 물러나 주었다.

“뭐, 리엔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우리가 우길 이유는 없지.”

“그럼 슬슬 진짜 질문을 시작해 볼까?”

“좋지!”

잠시 눈치를 보던 아이 중 한 명이 용기 내 입을 열었다.

“쿤은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럼 리엔 너는 카르시온을 어떻게 생각해?”

“와. 이거 진짜 궁금했어.”

“맞아. 카르시온은 4년째 쫓아다니고 있는데 막상 리엔 너는 항상 덤덤했잖아.”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기대로 물들어 있었다.

당연히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변덕이 일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 한 번쯤은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좋아해. 물론 이성적으로.”

오오오-!

내 발언에 숙소 안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와! 나는 솔직히 리엔이 하도 철벽을 치길래 아예 남자로는 안 보고 있는 건가 했어.”

“카르시온의 짝사랑인 줄 알았는데, 쌍방이었다니!”

“뭐야 뭐야, 그럼 신분을 초월한 세기의 커플 탄생인 거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건데?”

“그럼 왜 진작 교제하지 않았어?”

나는 흥분한 그녀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녀들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누구나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는 법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마냥 동화 같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평민인 내가 공작가와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어……?”

“그래서 밀어냈어.”

숙소 내에 정적이 찾아왔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려갔다. 꿈속에서 깨어나 현실을 인지한 듯한 표정.

누군가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급히 제인에게 질문했다.

“제, 제인! 너는 한스랑 사귄지 2년 정도 됐잖아.”

“그렇지.”

“진도 어디까지 나갔어?”

호기심을 자극하는 질문이었다. 금세 아이들의 눈이 반짝인다.

“……뭐, 뽀뽀 정도?”

“의외다!”

“제인 네가 저돌적인 성격이라서 당연히 그 이상일 줄 알았어.”

제인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랑 나이 차이가 있으니까 성인이 될 때까지 지켜 준 거지. 안 그래도 슬슬 생각하고 있어.”

“꺄아아아아!”

제인의 선언에 분위기는 다시금 달아올랐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애들도 거침없이 제 연애담을 말하기 시작했다.

“진도 하니까 생각 난 건데, 나는 옆 반에 샘이랑…….”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즐거운 대화였다.

* * *

모두가 잠든 새벽.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어제 이런저런 일로 체력을 쏟느라 피곤했는지 다들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나도 잠 좀 자고 싶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원래는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잘 수 있을 정도로 잘 자는데.

쉬이 잠에 빠지지 못할 정도로 생각이 많은 밤이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겨울 방학이 시작될 터였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점령해,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나는 졸업 후, 사업적으로 얽힌 한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과 연락을 끊기로 했다.

나를 위해.

그리고 나 때문에 피해를 받게 될지 모를 친구들을 위해.

나는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 외투를 챙겼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올 생각이었다.

숙소 문을 열고 나오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산 전체에 내리고 있는 함박눈이었다.

손을 뻗은 채 잠시 있으니, 눈이 손바닥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서 보아도, 새하얀 눈송이는 한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체온 때문인지 눈송이가 금방 녹아 물이 되어 버린다.

나는 텅 비어 버린 손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허무함을 느꼈다.

“잡은 줄 알았는데. 결국, 내 손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네.”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처음부터 잡으려 욕심내는 게 아니었다.

잡히지 않을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멍청하기도 하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며 여유롭게 굴었다. 막연히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손에 남은 물기를 옷에 닦아냈다. 그러자 옷이 물에 젖어 들어 색이 짙어진다.

“……아.”

그것을 보며 작은 깨달음이 머리에 스쳤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게 아니었다.

녹아 사라져 버린 줄 알았는데. 어떤 형태로든 남아 함께하고 있었다.

지금도 이렇게 나를 적시고 있지 않나.

눈송이가 다시 내 손에 내려앉았다. 나는 의도치 않게 받게 된 눈송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 기다리다 보면 지금처럼 다른 인연도 나를 찾아오겠지.

지금의 인연을 다시는 볼 수 없다 해도, 함께했던 기억은 오랫동안 남을 거야.

그렇다면 눈송이를 잡으려 했던 것을 후회하는 게 맞는 일인가?

아니,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눈송이가 손에 닿았던 찰나의 순간이 달콤했으니까.

그걸로 된 거다.

손을 내린 나는 천천히 경계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은 새벽이었지만 앞은 잘 보이는 편이었다.

마물이 빛을 싫어한다는 습성 때문에, 일대에 작게나마 불을 켜둔 상태였던 까닭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파란색 불빛이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마나?”

마물 서식지에서는 간혹 마나가 시각화되고는 했다.

한 곳에 마나가 집중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쉬이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그곳으로 눈길이 갔다.

한 발짝, 두 발짝.

나는 홀린 듯 빛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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