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루카를 달래 보낸 나는 기숙사에 들어왔다.
자잘한 감정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어제오늘 감정적으로 너무 힘이 들었다.
가방을 한쪽에 팽개친 채 침대로 직행하려던 찰나였다.
그새 내 상태를 눈치챈 제인이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리엔? 루카랑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
들키지 않았으면 했는데.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자 서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표정을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눈시울을 붉히는 나를 보며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따스한 손길이었다.
“루카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처리하고 올까?”
웃을 힘이 없었는데도 옅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 그게 뭐야.”
“농담 아니야. 아무리 네 가족이라고 해도 네 속을 썩인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제인의 눈 속에는 짙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런 제인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고 있는데. 나는 그런 그녀와 연락을 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그래서일까.
입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말았다.
“제인. 사실 네게 하지 못한 말이 있어.”
이유를 전부 말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졸업 후 갑자기 연락을 끊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졸업 후 수도와 멀리 떨어진 마을로 이사 갈 계획을 고백했다.
백작가를 포함한 친구 모두와 연락을 끊으려 했었다는 것도.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제인은 내게 물었다.
“넌 괜찮은 거야?”
괜찮냐니.
왜 연락을 끊으려 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게 서운함을 표출할 줄 알았다.
왜 진즉 말하지 않았냐며. 자신과도 평생 연락을 끊으려 했냐며.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되지 않았냐며 성을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제인은 나를 먼저 걱정해 주었다.
“너 카르시온 좋아하잖아. 정말 다시는 안 볼 자신 있어?”
아니. 자신이 있을 리 없었다.
제인이 나와 또렷이 두 눈을 마주하며 똑똑히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할게, 리엔. 나는 카르시온이 결혼한다고 하면 그 상대를 진심으로 동정했을 거야.”
제인은 내가 카르시온에 대해 좋은 말을 늘어놓을 때마다 몸서리를 쳤으니, 저 말은 농담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게 너라면 달라. 카르시온이 널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 장담해.”
확신이 없으면 말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 덕분일까.
제인이 뱉은 말은 대개 현실이 되고는 했다.
“신분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거라면 나는 말리고 싶어.”
어젯밤 아이들과 모여 했던 말 때문인 걸까.
제인은 내가 카르시온을 밀어내는 이유가 단순히 신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가 잡은 내 손에 힘을 줬다.
“카르시온을 믿어 보는 건 어때?”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신분 때문만은 아니야. 그랬다면 굳이 먼 곳으로 이사 갈 필요는 없었겠지.”
신분 문제만 있었더라면 그저 밀어내는 거면 충분했을 것이다.
아니, 그와 미래를 꿈꿔봤을 수도 있겠지.
나는 쓰디쓴 얼굴을 하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을 피워내었다.
“이건 제인 너여서 말해 줄 수 있는 건데, 나 그래서 카온을 유혹해 보려고.”
“……유혹?”
연락을 끊는 마당에 유혹이라니, 이상하게 들릴 만했다.
그러나 농담이 아니었다.
“응. 졸업 파티 때 카온을 유혹할 거야.”
카르시온과 더 깊은 추억을 새기길 바랐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의 모든 것을 가져보고 싶었다.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았다.
내가 말하는 유혹의 뜻을 눈치챈 제인은 잠시 눈을 키웠다가 이내 나를 따라 웃었다.
“마침 잘됐네. 내가 졸업 과제로 만든 드레스가 널 모델로 생각하고 제작한 거거든.”
“날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네가 파티의 주인공이 되게 해 줄게. 모든 이들이 너에게 눈을 떼지 못할 거야.”
“어. 음. 나는 카르시온만 유혹하면 되는데…….”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내가 최선을 다해 꾸밀 예정이거든.”
제인의 단호함에 나는 잠시 눈을 요리조리 굴리다가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뭐, 카르시온이야 네가 진흙탕에 구른 모습으로 유혹한다고 해도 넘어갈 테지만…….”
그녀가 어깨를 으쓱인다.
“기왕이면 예뻐 보이고 싶을 거 아니야? 네게 중요한 날이잖아.”
“……고마워, 제인.”
하지만 제인은 되레 내게 고마워했다.
“나야말로 고마워. 먼저 내게 털어놔 주어서. 말해 주기 어려웠을 텐데.”
“왜 연락을 끊으려 했는지는 묻지 않는 거야?”
그녀가 내 눈을 맞추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사정이 있는 거잖아. 그렇지?”
언젠가 내가 그녀를 이해하며 생각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뭉클했다. 친구는 닮는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다시는 우리가 못 만날지도 모르는데도?”
“그건 좀 많이 아프네.”
제인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흐리게 웃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 안쪽에 숨겨 놨던 서류를 꺼냈다.
“나도 네게 줄 선물이 있어. 사실 헤어지면서 마지막 선물로 주고 가려던 건데…….”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제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제 네가 알아 버렸으니 이별 선물로 주는 것보다는 미리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서류를 받아들었다. 종이에 쓰인 글자를 읽는다.
“건물 매입증서?”
제인이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바라봤다.
“리엔, 이게 무슨……!”
“수도의 부티크들이 한데 모인 곳이야. 매물 구하느라 고생 좀 했다고?”
물론 내가 아니라 한스가.
“거기서 네 꿈을 펼쳐봐, 제인.”
“이건 아니야. 그냥 받기에는 너무 큰…….”
나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말을 이었다.
“참고로 가게 인테리어는 한스에게 맡겼어. 난 그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어서.”
“리엔!”
저렇게 말은 하지만 나는 그녀가 결국 내 선물을 받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제인은 야망이 있는 아이였다.
지금 내가 내민 것을 거절하기보다는 몇 배로 부풀려 갚으려 할 터였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진통제를 비롯한 여러 의약품을 개발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정도는 내게 무리 되지 않는 선이라는 걸 금방 깨달을 거다.
나는 입가에 짓궂은 웃음을 그려내었다.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면 나 말고 네 남자 친구 탓해야 한다?”
* * *
시간이 흘러 결전의 날이 되었다.
졸업 파티는 졸업생들끼리만 모여서 즐기는 파티였다.
춤도 추고 술도 마시면서 마지막으로 회포를 푸는.
파티는 해가 바뀐 후 연초에 열렸기 때문에, 12월 31일이 생일인 아이도 성인이 되어 술을 즐기는 데에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너무 취하지 않게 조심해야겠지.
나는 파티가 주목적이 아니었으니까.
“제인. 이제 슬슬 가야 하지 않을까?”
나와 제인 둘 다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졸업파티는 늦은 저녁에 열렸건만, 나는 제인에 의해 새벽에 가까운 아침부터 단장해야만 했다.
괜히 부탁했다는 후회가 올라올 때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단장이 끝났더랬지.
막상 제인은 나 때문에 꾸밀 시간이 없어서 어떡하나 했는데…….
삼십 분만에 완벽 변신을 하고 나타나서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
빠르게 끝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으면서……!
제인이 작품을 감상하듯 꼼꼼한 눈으로 나를 살피다가 물었다.
“그래. 이제 슬슬 가야겠지. 너는 준비 됐어, 리엔?”
“완벽해.”
하지만 제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듯 매서운 눈빛으로 질문했다.
“여관은?”
“최고급으로 예약했어.”
“대자연의 부름은?”
“완벽한 타이밍이야. 혹시 몰라서 약도 먹었어.”
“마음의 준비는?”
“완벽해.”
나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쓱 보고는 살포시 웃었다. 그러자 거울 속에 비친 미인이 나를 따라 웃는다.
몇 번이나 거울을 확인했지만, 아직도 어색하기만 했다.
저 미인이 나라니.
고된 시간이긴 했으나, 확실히 불만을 쏙 들어가게 하는 실력이었다.
그녀가 직접 제작한 드레스는 또 어떤가.
나는 다시금 감탄하며 어깨를 시원하게 드러낸 새하얀 벨 라인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나뭇잎과 넝쿨 모양의 자수들이 나를 휘감은 듯한 모습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이거 꼭 웨딩 드레스 같아.”
제인은 모르고 있었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웨딩 드레스 맞아.”
“어?”
“원래는 네가 카르시온이랑 결혼할 때 선물하려고 한 드레스거든. 파티에 입고 갈 수 있도록 살짝 변형만 했어.”
……정말 웨딩 드레스였다고?
심지어 카르시온과 내가 결혼할 때 선물하려고 했던?
“푸핫.”
그녀의 과한 설레발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카온과 연애한 적도 없는데, 너무 멀리 간 거 아니야?”
“글쎄. 사람 일이야 모르는 거지. 나는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제인은 농담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여상한 표정이었다.
“아, 혹시라도 그럼 진짜 결혼식 때는 뭐를 입어야 하나 걱정하지는 마. 그때는 더 완벽한 옷을 선물해 줄게.”
“하하, 마음은 고맙지만 그럴 일 없네요.”
그녀가 내 웃음에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럼 이제 네 신랑을 보러 가볼까?”
“좋아.”
마차를 타고 도착한 파티장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파티장 문 앞에 선 제인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들어가자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러 시선이 느껴졌다. 헉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도.
나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재빨리 제인과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다들 이날을 위해 한껏 꾸민 모습들이었다.
다행히 드레스나 연회복을 입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사정이 넉넉지 않은 이들을 위해, 아카데미와 의상 디자인부가 합동해 지원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새삼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사장님이 참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세심히 학생들을 생각하기는 어려울 텐데.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방금 도착한 듯 피오르와 함께 파티장 안으로 들어오는 카르시온을 발견했다.
카르시온이 입은 옷도 제인이 직접 디자인했다고 했나.
그 또한 오늘따라 더욱 빛나 보였다.
평소와 다르게 머리카락의 반은 단정하게 뒤로 넘기고 반은 내린 모습.
그에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내가 유혹당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다.
나는 그에게 가 보겠다는 의미로 제인의 허리를 툭 치고는 그대로 카르시온에게 직행했다.
뚜벅뚜벅.
열심히 준비했으니, 이제 그의 반응을 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