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카르시온은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나를 찾는 모양새였다.
나는 카르시온이 나를 찾기 쉽게 하려 그에게 고정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 노력 덕분일까. 그가 나를 발견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푸른 벽안이 내게로 향한다.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반응을 기대했는데. 카르시온은 생각보다 더 정적이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그에게 걸어갔다. 내 눈에는 카르시온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쿵 맥동하기 시작했다.
내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항상 너였는데.
너도 나에게 올 때면, 이런 설레는 기분이었을까.
짧지만 길었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그에게로 당도했다.
나는 수없이 연습했던 유혹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녕, 카온.”
카르시온은 이상하리만치 얼굴에 변화가 없었다.
놀라는 기색도. 얼굴이 붉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그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이것도 예상 범위 안에 있었던 반응이었다.
그가 석화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여유를 부리며 옆에 있던 피오르에게 인사했다.
“너도 안녕.”
“……너.”
피오르는 입을 벌리며 나를 바라봤다.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 반응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네.
피오르는 입을 몇 번이고 뻐끔거리다가 겨우 한마디를 툭 뱉었다.
“……예쁘네.”
의외인 반응이었다. 뭐라도 트집 잡고 놀려 댈 줄 알았는데.
나는 키득이며 웃었다.
“응. 내가 봐도 예쁘긴 하더라.”
피오르는 내 당당한 반응에 화가 났는지 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빼고는 픽 웃는다.
조금 초연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너 오늘 결혼할 신부처럼 보이는 거 알아?”
다른 사람 눈에도 웨딩드레스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잘 눈치챘네. 그게 오늘 내 콘셉트거든.”
“신랑은 누군데?”
나는 장난을 치듯 슬쩍 진심을 드러냈다.
“글쎄. 기껏 입은 드레스가 물거품이 되지 않으려면 오늘이 가기 전에 누구 한 명 열심히 유혹해 봐야겠지?”
그에 피오르가 카르시온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짓궂게 입매를 끌어 올린다.
“어쩌냐, 이 조각상은 사람이 될 기미가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나야말로 그 상대가 카온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
피오르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호오, 얘 말고 다른 신랑이 있었어? 누구?”
“적어도 넌 아닐걸.”
“시작도 전에 탈락이라니, 서운한데 그래.”
“나 말고 다른 여자도 많으면서 무슨.”
피오르는 서운하다는 듯 과장되게 눈썹을 그러모았다.
“그게 대체 몇 년 전 이야기야? 내 주변에 무슨 여자가 있다고.”
지금도 이쪽을 흘끔 힐끔거리는 여자애들이 많은 것을 보건대, 썩 신뢰가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못들은 체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슬슬 카온이 정신을 차릴 때가 된 것 같은데.”
피오르는 카르시온을 슬쩍 곁눈질하더니 눈매를 좁혔다.
“……네가 작정하고 꾸미고 온 이상 오늘 안에는 무리지 않을까?”
“설마.”
나는 안 되겠다 싶어 카르시온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카온.”
몇 번 더 두드려 봤지만 미동도 없다.
“카온?”
……잠시만.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움직임이 없을 수 있나?
뭔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손을 뻗어 카르시온의 코밑에 손가락을 댔다.
……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이곳이 파티장이라는 것도 잊고 빽 외쳤다.
“맙소사! 카온이 숨을 안 쉬어!”
“뭐?”
“계속 숨을 안 쉬었던 거야? 미쳤나 봐!”
피오르가 카르시온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야, 카르시온! 정신 차려!”
평소 같았으면 피오르가 제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마법으로 처리했을 텐데, 카르시온은 요지부동이었다.
피오르는 급기야 환장한다는 얼굴로 카르시온을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미친놈아! 아무리 숨이 멎을 만큼 예쁘다고 해도 그렇지, 진짜 숨을 안 쉬는 놈이 세상천지 어디 있냐고!!”
* * *
리엔은 완벽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제인의 솜씨는 일품이었고, 치장은 성공적이었다.
걸핏하면 그녀와 장난을 주고받는 피오르까지 장난은 한 수 접고 인정해 줄 정도였지 않은가.
하지만 리엔이 크게 간과한 게 하나 있었으니…….
카르시온의 ‘리엔’ 치사량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
유혹을 과하게 해 버렸다.
물론 리엔 딴에는 억울했다.
유혹다운 유혹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얼굴만 보고 쓰러져 버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리엔이 제인의 위로를 받으며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였다.
카르시온을 휴게실로 데려갔던 피오르가 돌아왔다.
휴게실은 남녀가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리엔은 같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엔이 급히 피오르에게 물었다.
“카온은 괜찮아?”
“일단 살려는 놨어.”
“……어떤 상태길래 살려는 놨대?”
피오르는 제 입으로 말하기도 창피하다는 듯 엄지로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어떻게 정신은 돌아오게 했어. 문제는 일어나자마자 코피를 한 웅덩이는 흘렸다는 거지.”
“코피?”
“응. 얼굴에 피가 잔뜩 몰려서 헤롱헤롱 하더라고. 그 와중에 널 보러 가겠다고 고집이란 고집은 다 부리고.”
리엔은 이 상황에 왠지 모를 데자뷔를 느꼈다.
자신을 보겠다며 난동을 부렸을 카르시온과 그런 그에게 화를 내며 말렸을 피오르.
자연히 그 장면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처럼 생생했다.
“근데 다시 널 보면 진짜 심장 마비로 죽든 과다 출혈로 죽든 할 것 같아서 네 이름 좀 팔았다.”
“……잘했어.”
리엔은 제 계획이 단단히 어그러졌음을 느꼈다.
‘얼굴만 봐도 좋아 죽으려고 하는데, 밤은 같이 어떻게 보내.’
제 실책이었다.
나름 카르시온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고생이 많다, 피오르.”
“너만 하겠냐.”
리엔과 피오르는 서로의 얼굴을 연민이 듬뿍 담긴 바라보다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두 명이 서로를 위로해 주고 있을 무렵.
여기저기서 슬슬 건배해야 하지 않냐는 의견이 나왔다.
졸업 파티의 진정한 시작은 다 함께 건배를 한 후였다.
이 파티는 사실, 졸업 파티라고 쓰고 알코올 파티라고 불렸다.
학생들은 체면을 차릴 필요 없는 이곳에서 함께 한계를 도전하고 주량을 알아가고는 했다.
금액은 전액 아카데미에서 대주었기에 더욱 거리낌 없었다.
말이 나오기 시작하자 하나둘 잔을 들었다.
“건배사는 누가 할래?”
“그러게?”
학생들만 참여할 수 있는 파티였기에 대표로 나와 건배사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레나 아카데미는 학생 대표도 없었으니까.
“피오르 네가 하는 건 어때!”
“그거 좋다!”
“피오르! 피오르!”
자연스럽게 피오르로 의견이 모일 때였다.
리사동 부장인 말감이가 팔짱을 끼며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피오르는 무슨, 건배사는 졸업 여행 때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리엔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옳소!”
“리엔! 리엔!”
뒤이어 리사동 부원들도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자 피사동 부원들이 눈에 불을 켰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지금 또 겨뤄 보자 이거야?”
“저번처럼 발려도 괜찮으면 덤비던가.”
리엔은 또 일이 커져 버릴 것 같은 예감에,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
“다들 주목!”
사람들의 시선이 리엔에게로 향한다.
리사동 부원들은 얼굴이 밝아졌고, 피사동 부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하는 얼굴이었다.
리엔은 조용해진 장내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뒷일을 한스에게 떠넘겼다.
“건배사는 한스가 해 준대.”
“뭐? 내가?”
리엔은 당황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한스에게 입 모양으로 말을 전했다.
‘지금 개발 중인 약이 곧 완성인데, 탐나지 않아?’
‘완벽한 건배사를 보여 줄게.’
한스는 윙크와 함께 금방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더니 단상 위로 올라갔다.
“자자, 좋은 날 싸우지 말자.”
한스는 여유롭게 웃으며 달궈진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피오르와 리엔 둘 다 준비해 온 건배사도 없는 것 같은데, 부담 주지 말자고.”
한스가 건배사를 한다는 말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는 넉살 좋은 성격 덕분에 두루두루 얕고 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름 이미지가 좋은 편이었달까.
아카데미에서 이것저것 파는 덕분에 유명하기도 했고.
리사동과 피사동 부원의 얼굴에는 살짝 아쉬움이 스쳤다. 하지만 구태여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한스의 말대로, 피오르와 리엔이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반대하는 애는 없는 것 같으니 내가 하는 거다? 좋아. 다들 잔에 술 따르고 건배 준비해!”
한스의 말에 다들 잔을 손에 드는 아이들.
그는 씩 웃으며 설명했다.
“내가 건배사를 말하면 앞글자만 따서 같이 외쳐 줘.”
“예를 들어?”
“내가 ‘리엔 최고, 피오르 최고!’라고 하면 너희가 ‘리최! 피최!’ 하고 외치는 거지.”
그에 피사동 부원이 미간을 좁혔다.
“왜 피오르가 리엔 뒤에 나와?”
“에헤이, 예를 든 거잖아.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자.”
중년 아저씨들이나 할 것 같은 건배사였다.
하지만 많이 해 보지 않은 건배라 그런지 다들 한스의 제안에 긍정적인 분위기였다.
한스가 술이 가득 채워진 잔을 들고 단상 위에 비장하게 섰다.
“긴 아카데미 생활을 하는 동안 다들 고생 많았고, 사회에 나가서는 최대한 적게 일하고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한스는 짤막하게 건배사를 말한 후 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성공을 기원하며, 발전을 기원하며!”
“성……!”
순간 단체로 정적이 일었다.
당황했던 것도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타파하려 급하게 뒤 구호를 외치려 하지만.
“발……!”
다시금 정적이 일었다.
“에라이!”
“당장 끌어내!”
한스가 몇몇에 의해 파티장 구석으로 질질 끌려갔다.
“아악! 나도 고의는 아니었어! 진짜야!”
그의 절규 어린 비명이 배경 음악과 함께 울려 퍼졌다.
리엔은 세상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웬일로 그럴듯한 건배사가 나왔다고 생각했더니…….”
문득 친구가 걱정된 리엔이 제인을 툭 치며 예의상 물었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맞을 만했지 뭐.”
제인은 도도한 얼굴로 와인을 입가에 가져갔다. 자신과는 관련 없다는 얼굴이었다.
한스의 건배사가 끝난 후 파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친했던 애들끼리 도란도란 모여 음식과 술을 마시기도 했고, 댄스 플로어에 나가 춤을 추기도 했다.
그리고 리엔은…….
계획이 전부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한숨을 푹푹 쉬며 빠르게 잔을 비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