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익숙지도 않은 술이건만, 나는 막힘없이 쭉쭉 들이켰다. 벌써 넉 잔째였다.
“후…….”
뒤늦게 올라오는 쓴맛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걸음을 옮길 때였다.
다음 잔을 가져올 요량이었다.
“리엔, 과음은 좋지 않습니다.”
파티장에 있는지도 몰랐던 쿤이 다가와 앞을 막고 나섰다.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말리지 마. 인생의 쓰디쓴 맛을 알아가는 중이니까.”
“그런 건 앞으로 천천히 알아가도 됩니다.”
쿤은 유려한 손놀림으로 내 손에 든 빈 잔을 앗아 갔다.
“나 완전 멀쩡해.”
“그러다 훅 갑니다.”
“아니야. 나 주량 꽤 센 편인 것 같아.”
쿤의 손에 들린 잔을 가져오려 손을 뻗자 그는 어림없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가져오기는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힘을 뺐다.
게다가 단시간에 너무 많이 마신 건 맞는 말이기도 했고.
“쿤. 그러고 보니 너는 이제껏 어디에 가 있었어?”
“잠시……. 바람을 쐬며 열기를 식히고 왔습니다.”
“더워?”
“아뇨. 그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힐끔 본 쿤의 귓불이 붉었다.
나는 괜히 물었다는 생각을 하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너는 인재 영업 같은 거 안 해?”
파티장은 졸업 후 제 가문에 와달라는 영업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카데미 안이 아니었기에 신분을 드러내는 데에 제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리엔이 영업 당해 주신다면야 하겠습니다만…….”
쿤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얼마를 제시한다고 한들, 아바스칸투스로 넘어오시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응. 나는 가족들이 있는 라그라스 제국이 좋아서.”
만나지는 못 하겠지만, 같은 땅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이 될 것 같았다.
순간 쿤의 표정이 죄책감으로 얼룩지며 일그러졌다.
“죄송합니다, 리엔.”
“갑자기 웬 사과?”
“저는 비겁한 사람입니다. 추악하고 더러운…….”
인정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쿤처럼 올곧은 사람이 추악하다면, 세상은 지옥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지 않을까.
“질투를 억눌러 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카르시온과 리엔이 결혼하는 것을 빌어 주고 싶지 않아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카르시온이 누군가와 결혼한다고 하면 마냥 행복을 빌어 주지는 못할 것 같으니까.
다만, 쿤의 말에서 이해되지 않는 점은…….
“여기서 결혼 이야기가 왜 나와?”
나도 치지 못한 결혼 설레발을 왜 쿤이 치고 있냐는 거다.
내 질문에도, 그는 엉뚱한 소리를 하기 바빴다.
“리엔이라면 외면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리고 원한다는 걸 알게 됐으면서도. 저는, 저는 차마…….”
의미를 파악하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원하고 있다는 거지?
카르시온과의 결혼?
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더없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쿤.”
“……예, 리엔.”
쿤의 보라색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너 울어?”
그는 살짝 입을 벌렸다. 자신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에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잠시 감정을 다스리고 오겠습니다.”
그는 허둥지둥 제 눈물을 닦고는 등을 돌리며 덧붙였다.
“제가 없다고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세요. 분명 다음 날 머리가 깨질 듯 아플 겁니다.”
그가 파티장을 벗어난다.
멀어져가는 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느샌가 다가온 제인이 내 옆에 섰다.
아까 맞을 만 하다고는 했지만, 한스가 내심 걱정됐는지 그에게 다녀온 그녀였다.
“무슨 대화를 했길래 애 표정이 저래? 쿤이 너한테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했어?”
“……글쎄. 나도 쿤이랑 무슨 대화를 했는지 모르겠어.”
제인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와인이 반쯤 담긴 잔 두 개를 들고 왔다. 내게 하나를 건넨다.
쿤이 많이 마시지 말라 당부하고 가긴 했는데…….
뭐, 내가 누구한테 허락받고 마셔야할 나이는 아니니 괜찮겠지.
나는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그녀가 건넨 잔을 받았다.
한 모금 홀짝이고 있으려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제인, 삶이란 뭘까.”
“삶은…….”
제인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와인 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더니 먼 곳을 바라보며 우수에 젖은 눈으로 아련하게 답한다.
“계란.”
풉.
“푸하하!”
참아 보려 했지만, 순간 웃음보가 터져 버려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한바탕 웃음을 토해 낸 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아. 삶은 계란 따위에 웃었다니 자존심 상해.”
다 웃고 나니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이가 말했다면 풉 소리도 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농담을 잘 하지 않는 그녀가 저런 말을 하니 참으려야 참을 수 있어야지.
“이제야 웃네.”
제인은 피식 웃으며 내 뺨을 검지로 쿡 하고 찔렸다.
“너무 속상해하지는 마, 리엔. 오늘이 마지막은 아니잖아.”
“마지막이 아니라니?”
“방학도 있고……. 방학이 끝나면 졸업식 전까지 일주일 정도 등교해야 하잖아.”
“아니,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야. 그냥 포기할래.”
“리엔…….”
“오히려 잘된 일이지.”
나는 잔에 남은 와인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와인 때문인지 입 안이 썼다.
“내 이기심이 카온을 상처 입힐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하려던 거였으니까.”
제인은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나직이 입술을 연다.
“……한 잔 더 마실래?”
“그거 좋지.”
* * *
홀로 감정을 다스린 쿤은 다시 파티장으로 향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네…….”
리엔이 기숙사로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실제로 절반 이상은 파티장을 빠져나간 듯했다.
쿤은 파티장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한숨을 푹 쉬며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죄스러웠다.
대부님께도. 리엔에게도.
어머니는 리엔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말라 당부했다.
어머니의 말을 지키려던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리엔이 귀족 신분을 얻어 카르시온과 잘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일 뿐이었음을.
“……내가 질투에 눈이 멀게 될 줄은 몰랐지.”
어느새 파티장에 도착한 쿤은 초토화가 된 장내를 둘러봤다.
아직 취하려면 멀었다는 듯 술을 쭉쭉 들이켜고 있는 사람부터, 정신 줄을 놓고 주정을 부리고 있는 사람.
파티장 한쪽에서 구토하는 사람.
주변이 시끄럽든 말든 바닥에 널브러져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까지 참 다양했다.
‘리엔은 어디 있지?’
그녀만을 찾으려 집중하니 발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리엔은 의자 몇 개를 나란히 놓은 곳 위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겉옷과 숄이 그녀의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걸 보아, 다행히 리사동 부원들이 리엔을 챙긴 듯했다.
새근새근 자는 리엔을 보며, 쿤은 우울했던 것도 잊고 입가에 옅게 웃음을 그려내었다.
“리엔, 실례하겠습니다.”
쿤이 조심스럽게 리엔을 안아 들려 할 때였다.
“실례되는 행동인 거 알면 꺼져.”
쿤은 리엔에게 향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카르시온. 또 그였다.
“나와 주시죠. 리엔을 기숙사까지 데려다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카르시온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당장이라도 쿤을 찢어 죽여 버리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그걸 왜 네가 하냐고.”
쿤은 덤덤히 대꾸했다.
“당신은 리엔의 얼굴조차 바라보지 못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리엔을 데려다준다는 겁니까.”
“내가 마법사라는 건 벌써 잊었나 보지?”
“텔레포트 중간에 리엔과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사고가 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카르시온은 빙글 웃었다.
“뭣 같은 휴게실에 갇혀 있는 동안 내가 뭘 했게.”
카르시온이 소매를 걷으며 제 팔을 보여 주었다.
그의 팔은 온갖 마법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다소 기이한 모습에 쿤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마법을 새긴 겁니까.”
“걸 수 있는 제어 마법은 전부.”
하. 쿤의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꼴값을 떠시는군요.”
카르시온은 그런 쿤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귀하신 황자 전하께서 못 본 사이 아주 험해졌네.”
불현듯 카르시온이 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리엔 주변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패배자는 패배자답게 꺼져.”
쿤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응시하다가 기분 나쁘다는 듯 카르시온을 밀쳐 냈다.
“제가 왜 패배자입니까?”
“그야…….”
카르시온은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자연스럽게 잠든 리엔을 안아 들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쿤은 그 모습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술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굳어 움직이지 않은 탓이다.
리엔을 품에 안은 카르시온은 쿤을 바라보며 상큼하게 눈을 접어 올렸다.
“리엔은 날 좋아하니까.”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 말을 끝으로 카르시온은 등을 돌려 파티장을 걸어 나갔다.
* * *
카르시온은 작은 고민에 빠졌다.
리엔을 기숙사에 데려다줘야 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제 품에 안긴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렬히 들었다.
자신이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일까. 리엔이 그의 품에서 작게 바르작거렸다.
“으응…….”
카르시온은 눈을 질끈 감은 후 심호흡을 했다.
뒤이어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리엔. 그렇게 움직이면 내가 조금 힘들어.”
그의 목소리를 들은 듯 리엔이 몽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카, 온이야?”
평소였으면 자기 발로 걷겠다며 내려 달라고 했을 텐데.
순순히 제게 안겨 있는 것을 보니 완전히 취한 듯했다.
“응. 나야 리엔. 내가 금방 기숙사로 데려다줄게. 조금만 기다려.”
리엔은 얼굴을 카르시온의 품에 묻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아니야……. 주변에 여관 잡아 놨어. 거기서 잘래…….”
파티장이 아카데미와 가깝지만은 않은 거리였기에, 리엔처럼 근처 여관을 예약해 놓는 학생들은 꽤 많았다.
아예 밤을 지새우겠다고 한 학생들도 있고, 일찍 돌아간 이들도 있고.
“어디?”
“……oo여관 301호.”
카르시온은 작게 웃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여관 이름과 호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그녀가 귀여웠다.
예약한 여관도 썩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질 떨어지는 곳이면 몰래 다른 곳에 데려가려고 했는데.
안목도 좋지.
카르시온은 그녀를 리엔을 고쳐 안으며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단숨에 여관으로 도착한 그는 프런트에 열쇠를 받아 호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힘껏 뒹굴어도 떨어질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보이는 큰 크기였다.
카르시온은 리엔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그녀를 받치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빼는데…….
잠든 줄만 알았던 리엔이 돌연 카르시온의 손을 잡아 왔다.
“가지 마.”
야트막하게 내뱉어진 말과 그녀의 표정에, 카르시온이 눈을 키웠다.
리엔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