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카르시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가지 않을 거야.”
“……가려고 했잖아.”
“여직원을 불러오려고 했어. 네 드레스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야 하고, 화장도…….”
리엔은 카르시온을 말을 잇는 도중에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한다.
“카온.”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한 카르시온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리엔은 그런 그의 크라바트를 느슨히 잡았다.
“싫으면 지금 말해.”
일순간 카르시온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그녀의 손을 떼어 내었다.
“취했어, 리엔.”
“앞뒤 분간 못 할 정도는 아니야.”
“……네가 한 말과 행동이 내게 어떻게 해석됐는지 알고는 있어?”
“알고 있어.”
기다렸다는 듯 나온 대답에, 카르시온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자신이라도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고 그녀를 달래야만 했다.
“리엔. 나는 네가 취한 상태일 때를 노려 밤을 보내고 싶지 않아.”
“오늘이 아니면 안 돼.”
“리엔.”
카르시온은 사납게 일어나는 욕정을 가라앉히려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널 소중히 생각하는 만큼 너도 자신을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어. 이렇게 충동적인 거, 분명 후회할 거야.”
“내 눈을 봐. 정말 충동적으로 말했다 생각해?”
카르시온은 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카온. 날 보라고 했잖아.”
리엔은 그런 그의 얼굴을 돌려 다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렇게 의심되면 내게 정화 마법을 걸어 봐.”
카르시온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정화마법은 몸에 있는 더러운 것과 약한 독소를 정화하는 마법으로, 알코올 정도는 말끔히 해독되었다.
그녀가 옅게 웃으며 카르시온의 귓가에 야살스럽게 속삭인다.
“그 정도는 손쉽게 걸 수 있잖아. 그렇지?”
넌 능력 있는 마법사니까.
리엔의 달콤한 목소리가 카르시온의 고막을 휘감는 순간, 그는 머릿속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카르시온은 느릿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손을 댔다. 긴장했는지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카르시온은 리엔의 눈동자가 또렷해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있던 웃음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이제 핑계 댈 건 없는 거지?”
그는 헛숨을 들이켰다.
궁지에 몰린 생쥐도 이렇게 숨이 턱턱 막히지는 않았을 터였다.
제어 마법을 닥치는 대로 걸어 놓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수십 번은 심장 마비로 죽었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 카르시온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엔이 느른히 웃으며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널 갖고 싶어.”
아찔했다.
카르시온은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워졌다.
“단 한 번이라도 좋아. 너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리엔이 달뜬 얼굴로 흑수정처럼 까만 눈동자에 저를 담아냈다.
“사랑해.”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감각에, 카르시온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사랑한다고 했다.
리엔이, 자신을.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직시했다.
꿈이 아니었다.
“……리엔.”
입 안이 바짝 말라 목소리까지 거칠게 긁어져 나왔다. 카르시온의 눈빛이 탁해졌다.
‘너는 알고 있을까.’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을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
카르시온은 이를 악물며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었다.
그러자 리엔의 유혹적인 목소리가 다시금 자신을 녹여내었다.
“뭘 망설이는 거야, 카온?”
그는 본능에 넘어갈 뻔하면서도 간신히 이성의 끈을 잡아냈다.
안 된다.
지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면 이후로는 저를 절제할 자신이 없었다.
카르시온은 오랜 시간 끝에 힘겹게 그녀를 밀어내었다. 그러고는 혹여나 그녀가 오해할까 서둘러 덧붙였다.
“……오늘은 안 돼. 준비되지 않았잖아.”
하룻밤이면 괜찮을 거라 안일하게 굴었다가 태어난 아이가 제국에 얼마나 많던가.
자신의 욕망 때문에 그녀가 상처받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카르시온을 보며 리엔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자신이 오늘을 위해 얼마나 준비 한지 모르는 듯했다.
“쉬, 괜찮아.”
괜찮다는 말로 얼버무린 그녀는 카르시온을 끌어당겼다.
둘의 눈동자가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곳에서 얽혔다.
서로의 입술이 닿으려던 때였다.
텁.
순간 리엔의 눈동자가 커지며, 다급하게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무언가 깨달은 얼굴이었다.
‘뒤늦게 술이 깬 건가.’
카르시온은 짙은 허무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흐리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자 온갖 유혹의 말을 내뱉을 때도 하얗기만 했던 리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말하기 창피하다는 듯 머뭇거리며 입을 연다.
“나……. 이 안 닦았어.”
카르시온은 멍해졌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일 줄은 상상도 못 한 까닭이다.
어쩜 생각하는 것조차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리엔, 그거 알아?”
카르시온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마주 대며 푸스스 웃어 보였다.
“정화 마법은 해독 효과뿐만 아니라, 몸도 깨끗이 정화해 준다는 거.”
그 말을 끝으로 카르시온이 그녀의 뒷덜미에 손을 얹었다. 강하지 않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리엔은 그 작은 힘에 기꺼이 끌어 당겨갔다.
이윽고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숨결이 섞인다.
오랫동안 서로만을 향했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불타듯 뜨거우면서도 황홀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
입술만 겹쳤을 뿐인데, 벌써 지친 듯 리엔이 숨을 헐떡였다.
카르시온의 시선이 그런 리엔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그는 이미 끓을 대로 끓어 잔뜩 성나 있는 상태였다.
리엔이 지쳤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밤은 길었고, 자신은 리엔의 달리는 체력을 보충시켜 줄 마법 능력을 갖고 있었으니까.
카르시온은 포식자가 먹잇감에게 엄포를 놓듯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이건 네가 먼저 자초한 거야, 리엔.”
* * *
감은 눈꺼풀 위로 햇살이 느껴지며 단잠을 깨웠다.
직감적으로 지독히 늦잠을 잤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맨살이 이불에 닿는 감촉은 언제 느껴도 좋았다. 게다가 지금 안고 있는 베개는 따스하기까지 했다.
“으응…….”
나는 좀 더 그것을 만끽하고 싶어 몸을 웅크리며 파고들었다.
그러자 내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더 자.”
다정한 손길에, 목소리까지 꿀에 절인 듯 달콤했다.
잠시만.
베개가 말을 한다고? 심지어 온열 기능이 있어?
나는 벌떡 일어나 방금까지 안고 있었던 베개를 응시했다.
“……아.”
카르시온이었다.
그를 시야에 담자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깨어나며 무슨 상황인지 단숨에 파악됐다.
맞다. 나 어제 카온과…….
그는 벙벙한 표정을 한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내 잔 머리카락을 자상히 뒤로 넘겨주고는 눈을 접어 올린다.
“깼어?”
드러난 맨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였다.
나는 그런 카르시온을 보며 눈을 잔뜩 찌푸렸다.
그래야 더 잘 보이니까.
아침에도 굴욕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을 타고 내려와 셔츠 아래 감춰져 있던 탄탄한 가슴과 복근.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광경이었다.
그때, 카르시온의 수줍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엔,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부끄러워.”
나는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카르시온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동자도 진득하게 맞춰 오지 못하고 나를 향했다가 손에 얼굴을 묻었다가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조금 어이없었다.
저런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잘도…….
나도 모르게 마음속 말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
문득, 침대 위에 몇 가닥 빠진 나와 그의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블랙핑크…….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상태가 조금 나아진 듯 카르시온이 내게 물어왔다.
“리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하?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너무나도 멀쩡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가볍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어……?”
당황한 내 얼굴을 본 카르시온이 씩 웃었다.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다.”
아. 마법이구나.
그러고 보니 씻지도 않고 기절하듯 잠든 것 같은데 몸도 깨끗했다.
하긴, 내가 지친 기색을 보일 때마다 회복 마법을 비롯한 각종 버프 마법을 걸어 주던 그였다.
애프터서비스까지 확실하네.
그의 세심함에 잠시 감탄하던 나는, 이제 슬슬 기숙사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치듯 그의 눈에서 아직 꺼지지 못한 열기와 미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쟤는 나처럼 회복 마법을 걸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쌩쌩하지?
체력이 사람 수준이 아니잖아.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나조차도 카르시온이 작정하고 유혹한다면 또 넘어가고 말 것 같았다.
어젯밤도 그랬지 않은가.
이제 자는 건가 싶을 때면…….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얼굴로, 목소리로, 몸으로 나를 유혹했다.
그렇게 몇 번을 넘어갔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재빠르게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가 볼세라 급히 옷을 껴입었다.
빠르게 속옷을 입고, 드레스만 남겨 놓은 상황이 되자 조금 곤란해졌다.
혼자 입기는 어려운 드레스였기 때문이다.
먼저 옷을 다 꿰입은 카르시온이 내게 다가왔다.
“리엔, 잠깐.”
도와주려는 줄 알았던 카르시온은 대뜸 내 이마에 키스했다.
나는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같이 밤을 보낸 사이에 뭐가 놀랍나 싶겠냐마는, 사실 이건 정말 놀랄 만한 일이었다.
손을 잡을 때조차 조심스레 허락을 맡던 그가 내게 아무런 말 없이 입을 맞추다니.
잠시 후, 입술을 뗀 카르시온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푹 쉬어.”
그리고 눈앞에서 바로 사라져 버리는 카르시온.
그가 사라지자 나는 내가 지금 서 있는 장소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숙사 방 안이었다.
나는 곧바로 침대로 직행해 주먹으로 베개를 마구 내리쳤다.
“으아아아아아!”
“저렇게 귀여운 건 반칙 아니야? 할 거 다 해놓고 뽀뽀 한 번에 부끄러워하는 건 뭐야!”
“그걸 보고도 안 넘어가고 배길 수 있겠냐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씩씩거리며 열기를 식혔다.
그와 일을 치른 후를 생각하지 않은 후회도 함께였다.
카르시온과 깊은 추억을 새기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미련이 더욱 짙게 남을 것 같았다.
“졸업식 전까지는 또 어떻게 대해야 하냐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