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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03)화 (103/161)

103화

카르시온을 따돌리고 기숙사 안으로 돌아온 리엔은 한숨을 돌렸다.

“……휴. 휘말릴 뻔했네.”

“왔어?”

손톱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던 제인은 리엔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오다가 봤는데 너 카르시온이랑 손도 잡고, 아주 분위기 좋더라?”

“분위기는 무슨, 울먹이길래 어쩔 수 없이 잡아 준 거였어.”

“에이,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평소에는 잘만 거절했으면서 핑계는.”

“……몰라.”

리엔이 가방을 툭 하고 내려놓으며 넥타이를 풀었다.

“아, 네 편지는 책상 위에 올려놨어. 두 개인데 하나는 작은 소포도 같이 왔더라.”

“소포?”

그녀는 넥타이를 풀어 헤친 채 책상으로 다가가 소포와 함께 도착한 편지를 확인했다. 아칸더스가 보낸 편지였다.

리엔은 반가운 마음에 작게 미소 지었다. 그의 편지는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종이 나이프를 가져와 편지를 열었다.

<졸업 미리 축하한다, 리엔.

직접 만나 축하해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네.

같이 보낸 소포는 네게 주는 선물이란다. 하지만 절대 지금 열어 보지는 말렴.

언젠가 때가 되면 이것이 필요해지는 날이 올 거야.

그날이 오면 내가 말한 게 무엇인지 반드시 알게 될 거다. 그러니 버리지 말고 꼭 갖고 있어.

그리고 이건…… 네게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란다.

나는 네가 이기적으로 살았으면 한다. 누군가를 동정하지 말고, 너의 것을 양보하지 말렴.

건강하거라.

너의 스승이자 친구인 아칸더스로부터.>

편지를 다 읽은 리엔은 눈을 깜빡였다.

소포는 주먹과 비슷한 크기였다.

가볍기도 해서 보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아칸더스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고, 또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게다가 어감이 마치 내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인 듯 쓰여 있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그는 언제든지 떠날 듯 굴었기 때문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 각오하고 있었달까.

‘……혹시 나와 연락을 끊는 것도 월터 교수님 때문인가?’

아칸더스가 보낸 소포도 의문스러운 것투성이였다.

그가 저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쯤 되니 정말 궁금해졌다.

리엔은 소포를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뜯어볼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소포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소설에서 보면 꼭 하지 말라는 걸 했다가 봉변을 당한다.

판도라의 상자도 꼭 하지 말라는 것을 했다가 그렇게 된 거 아닌가.

게다가 언젠가 때가 온다고 했으니 판도라의 상자처럼 기간이 무한정인 것도 아니었다.

리엔은 그냥 없는 듯 잊고 살자고 다짐하며 저에게 온 다른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번 편지는 처음 듣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었다.

리엔은 렉스 베고니아가 이름을 바꿔 보낸 것만 아니기를 바라며 편지를 열었다.

다행히 그에게서 온 편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리엔의 얼굴은 그에게 편지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어두웠다.

편지를 끝까지 읽은 리엔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인.”

“응?”

“나, 큰일 났어.”

열심히 손톱을 다듬던 제인은 리엔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놀라 행동을 멈췄다.

“무슨 일인데 그래?”

리엔은 제인을 바라보며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읊조렸다.

“전 집주인이 나한테 집을 못 팔겠대.”

제인의 눈매가 순식간에 치켜 올라간다. 그녀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앙칼지게 외쳤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미 계약한 거 아니었어?”

“대금을 이사 가면서 드리기로 해서 정확히 따지면 아직 내 집은 아니거든.”

“위약금은! 위약금은 물어준대?”

“두 배로 물어주겠대. 편지에도 거듭 사과하더라.”

그 말은 제인의 얼굴이 다소 풀렸다.

“두 배? 그나마 양심은 있어서 다행이네. 그냥 위약금 받고 다른 집을 사버리자.”

하지만 리엔의 얼굴은 도통 펴질 줄을 몰랐다.

“그게……. 그 일대에 있던 집이 다 팔렸다나 봐.”

“뭐? 설마. 잘 찾아보면 한 군데 정도는 있겠지.”

“내가 집을 보고 온 후, 갑자기 마을에 대부호가 나타나서 일대의 모든 건물을 매입했다던데.”

“엥? 주변에 금맥이라도 발견됐대? 아니면 제국에서 개발이라도 한 대?”

“모르겠어.”

리엔은 다 망했다는 듯 머리를 잡아 뜯었다.

“이제 졸업하면 당장 어디로 가야 하지? 젠장, 하필이면…….”

“그 집도 한스가 알아봐 준 거지?”

“……응. 나는 살 마을만 알아보고 나머지는 한스에게 부탁했어.”

제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봐. 내가 한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올게.”

“아니야. 걔라고 뭘 알겠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내게 먼저 말했겠지.”

“그래도 한번 물어나 볼게. 중요한 일이잖아. 리엔 너는 잠시 여기서 머리 좀 식히고 있어.”

제인은 리엔의 등을 몇 번 토닥이고는 정말로 기숙사를 나섰다.

그러고는 남자 기숙사로 달려가 주변에 나와 있는 한 명을 아무나 붙잡았다.

“야, 부탁 하나만 하자.”

“깜짝이야, 갑자기 뭐야?”

붙잡힌 아이가 짜증을 내며 제인을 거칠게 쳐냈다.

그녀는 아이가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용건을 말했다.

“카르시온 좀 불러와 줘.”

“뭐?”

아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보고 성격 파탄자인 카르시온을 불러오라니 미친 건가.

“난 안 해. 못해!”

제인은 정리가 덜 된 제 손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약간의 무서움을 참고 지금 다녀오는 게 나을까, 아니면 너 때문에 내가 가져온 소식을 제때 듣지 못한 카르시온에게 죽도록 처맞는 게 나을까.”

그녀는 아이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선택해.”

잠시 후, 카르시온을 성공적으로 불러낸 제인은 팔짱을 낀 상태로 그를 맞이했다.

카르시온의 밑에서 일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태도였다.

그는 제인을 발견하자마자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리엔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

“거두절미하고 말할게. 리엔은 지금 졸업하고 갈 곳이 없는 상태야.”

카르시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르메리아 백작가는?”

“그곳에는 사정이 있어서 못 간대. 방학 때마다 백작가에 가지 않고 기숙사에 있었던 거와 같은 이유겠지.”

카르시온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듯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걸 알려 주려고 온 거야?”

“아니. 너한테 기회를 주려고 온 거야.”

“……기회?”

“잘 들어. 리엔은 졸업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려 했어. 모두와 연락을 끊고 잠적한다고 했지. 물론 너랑도 말이야.”

카르시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사실이야?”

“사실이야. 다행히도 졸업 후 리엔이 들어가 살려고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 지금이 기회야.”

제인은 입술을 짓씹으며 잘 알아들으라는 듯 말했다.

“리엔이 내게 실망해서 돌아설 것도 각오하고 말하는 거라고. 알아?”

한스에게 다녀온다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카르시온에게 달려온 것은, 리엔을 잡기 위해서였다.

리엔을 멀리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것도 한몫했지만,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리엔은 카르시온을 사랑했고, 제인은 그것이 쉽게 지울 수 없는 마음임을 잘 알았다.

그깟 신분 따위를 카르시온이 신경이나 쓸 것 같은가?

설사 리시안셔스 공작이 거품을 물며 반대하더라도 기어코 리엔과 결혼할 사람이었다.

리엔은 자신이 떠나려 했던 이유가 신분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설득력이 떨어졌다.

리엔과 카르시온 사이에서 신분 문제만큼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니 그 부분만 해결된다면 뭐가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공작가의 공작 부인이 될 텐데.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리엔은 자신이 정해 놓은 선 안에 든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헌신적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녀라면 카르시온에게 피해가 가는 것보다는 자신이 카르시온을 포기하는 것을 택할 터였다.

지금처럼.

제인은 카르시온에게 경고했다.

“리엔이 다른 머물 곳을 찾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카르시온은 제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상으로는 얼마를 원해.”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우리 리엔 못 붙잡기만 해라. 그날로 공작가에 달려가 아주 쑥대밭을 만들어 버릴 테니까.”

“선전 포고라니. 재밌는데.”

카르시온이 흥미롭다는 듯 입매를 끌어 올리자 제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꼬우면 죽이든지. 리엔이 나를 위해 얼마나 화내 줄지 궁금하네.”

리엔을 인질로 삼은 것에 불쾌함을 느낀 카르시온이 뭐라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제인이 어느새 촉촉해진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간절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부탁할 테니까, 우리 리엔 좀 잡아 주라. 너 말고는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

* * *

“카온, 그러다 내 얼굴 뚫리겠어.”

“하지만 데이트 상대는 리엔 너인걸. 달리 누구를 바라봐?”

나는 지금 그와 근처 카페를 온 상태였다.

어제 기숙사 앞에서 뽀뽀를 해 주지 않고 튀었다는 죄목으로 붙잡혔기 때문이었다.

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초조한 마음에 집중하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을 뜯었다.

당장 졸업이 내일 모레인데, 한시라도 빨리 살 집을 찾아야 했다.

그냥 집은 안 된다.

렉스 베고니아가 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구석지거나 그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장소여야만 했다.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정한 곳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차마 티를 내지는 못 하고 한숨을 속으로만 푹푹 내쉬고 있으려니 카르시온이 말을 걸어 왔다.

“맞다. 리엔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상념을 몰아넣고 그를 바라봤다. 부족한 거 없는 카르시온이 내게 부탁할 거라니.

“뭔데?”

“들어줄 거야?”

그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니 대충 무슨 부탁을 하려고 했는지 예상이 갔다.

손을 잡아 달라거나, 어제 못한 것을 해 달라는 종류겠지.

“들어 보고.”

확답을 주지 않자 카르시온은 대번에 표정을 시무룩하게 바꿨다.

“그러면 말 안 할래.”

“그러던지.”

“……정말 안 들어줄 거야?”

윽, 또다. 저 얼굴 공격.

나는 한숨을 내쉬며 딱 이번까지만 져 주기로 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려고 노력해 볼게.”

그제야 카르시온의 얼굴에 생글생글 예쁜 웃음이 올라왔다.

그가 턱밑에 꽃받침을 만들며 눈을 접는다.

“우리 같이 살자, 리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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