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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04)화 (104/161)

104화

?

나는 뭔가 잘못 들었겠지 싶은 마음에 하하 웃으며 재차 물었다.

“미안, 뭐라고?”

카르시온은 입가에 미소를 그려내며 가볍게 말했다.

“졸업 후에 우리 리시안셔스 공작가에 들어오는 건 어때?”

입이 쩍 벌어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나 보다.

“카온. 지금 무슨…….”

“어머니가 몇 년 전부터 말동무 시녀를 구하고 있거든. 근데 워낙 성격이 통통 튀시는 분이라 잘 맞는 사람을 찾기 힘드네.”

그의 이어진 설명에 긴장이 탁 하고 풀렸다.

난 또 살림 차리자는 줄 알았네.

“숙식 제공은 물론이고 네가 원할 때 언제든 그만둬도 괜찮아.”

충격적인 제안을 들었다가 오해를 푸니 어쩐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착각이 일었다.

오히려 솔깃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나는 졸업 후 갈 곳이 없지 않은가.

사실 당장 졸업이 내일 모레인데, 렉스 베고니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집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러겠노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귀족이 아니야, 카온.”

평민인 나는 하녀라면 몰라도 시녀가 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말이 시녀지 그냥 말동무인데 뭐 어때.”

카르시온은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그리고 이건 내 예상이지만, 어머니가 널 굉장히 좋아하실 것 같거든.”

이전에 공작 부인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내가 굉장히 마음에 드신 눈치였지. 생각만큼 무서운 분도 아니었고…….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안에 있던 무언가를 꽉 쥐었다.

1학년이 끝날 때 썼던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막상 졸업이 가까워져 돌려받으니 묘한 기분이었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 그 어떤 때보다도 더. 너는?>

글쎄…….

나는 잘 지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리엔.

그때의 나는 렉스 베고니아의 마수에서 벗어나 많은 것을 경험하며 행복했을 시기였다.

친구도 사귀고, 조지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며 약초에 대해 새로운 것도 배우고, 첫사랑도 시작하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사귄 소중한 인연들과 헤어짐만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였다.

언제 렉스 베고니아가 나를 찾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은 채.

“응? 리엔.”

카르시온의 애원하는 듯한 눈망울이 내게 닿았다.

“카온, 나는…….”

거절의 말을 꺼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쉬이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네 그 예쁜 눈을 계속 보고 싶어.

……그래.

새로운 집을 구할 때까지만 공작가에서 일하는 거라면 나쁘지 않을지 몰랐다.

그만큼 카르시온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니까.

리시안셔스 공작가라면 렉스 베고니아도 막무가내로 날 찾아오지 못하겠지.

베고니아 공작가와 리시안셔스 공작가 사이에 낀 신세가 불안 불안했지만, 최대한 빠르게 집을 구하고 나가면 될 일이었다.

결국, 나는 홀로 합리화를 한 채 그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좋아.”

카르시온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정말?”

“음. 근데 내가 공작가에 가면, 다른 사람이 오해할까 봐 걱정이다.”

“무슨 오해?”

“너와 나 사이의 관계라든지…….”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르는 느낌에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갈 때였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어, 리엔.”

카르시온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수줍게 말했다.

“우린 같이 뜨거운 밤을 보낸 사이가 맞잖아.”

풉-!

나는 마시고 있던 차를 그대로 뿜었다.

햇살 좋은 날 밖에서 했으면 작은 무지개가 생겼을 법한 완벽한 뿜기였다.

“……리엔?”

앞을 보니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르시온이 뿜어진 차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뇌를 거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꼬, 꽃에 물 준 거야.”

역사적인 흑역사 생성의 순간이었다.

말을 뱉고 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실감이 났다.

그냥 사과하고 끝냈어야지, 이 빌어먹을 주둥아리가!

“풉, 푸하하!”

카르시온이 대놓고 웃기 시작하자 내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웃지마……!”

나는 씩씩거리면서도 손수건을 꺼내 카르시온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약간의 분노를 담아 벅벅.

그는 얌전히 내게 얼굴을 맡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누가 보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 줄 알겠어, 리엔.”

카르시온이 눈을 사르르 접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날 잡아먹은 건 넌데.”

적나라한 발언에 놀라 파드득 떨며 멀어지자,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안 그래?”

* * *

카르시온과의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바로 편지를 작성했다.

얼마 전, 아저씨로부터 온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아저씨가 보낸 편지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부담 없이 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언제든 부담 없이’를 어찌나 강조하던지 대부업자가 연상될 정도였다.

편지를 읽고 나서 며칠 동안은 아저씨한테 도움을 청해 볼까 고민했었는데…….

이제 급한 불은 껐으니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최근에 곤란한 일이 생겼었는데,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잘 해결되었답니다.

아, 그리고 갈리르 영지의 어브서 마을로는 사정이 생겨 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나중에 다시 거처가 정해지면 편지할게요.>

* * *

졸업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보통 지루할 거라 생각되는 이사장님의 훈화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졸업장도 한 명씩 수여하는 게 아닌, 반에서 담임 교수님이 미리 나누어 줬다.

내가 지목한 이사장님이 공로상을 받기 위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던 상장 수여 시간은…….

“공로상 수상 대상이신 이사장님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나오지 못하게 됐습니다.”

장내에 탄식이 쏟아졌다.

졸업 전에 이사장님의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실망한 까닭이다.

“때문에, 이번 공로상은 학생 중 한 명이 대리 수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이사장님을 뵙지 못한 건 조금 아쉽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사장님을 지목한 것은 얼굴을 보고 싶어서가 아닌, 내 나름의 고마움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4년 동안 나를 렉스 베고니아에게서 안전하게 지켜 준 것에 대한 것 말이다.

아레나 아카데미가 아니었으면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겠지.

아저씨는 항상 아무렇지도 않게 아카데미 내부에 들어오고는 했지만…….

사실 외부인이 아카데미의 방범 마법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카르시온 학생, 나와 주십시오.”

의외의 대리 수상자에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에 타격을 줬으면 줬지, 공로라고는 쥐뿔도 없는 카르시온이 왜……?

카르시온은 의외로 순순히 상을 받으러 나갔다.

귀찮게 그걸 내가 왜 받냐며 거부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오히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학생들은 이사장님이 왜 카르시온에게 대리 수상을 맡겼나에 대해 떠들었다.

졸업 여행에서 마물의 핵을 가장 많이 모아 온 사람이 카르시온이라서 그렇다는 의견.

그리고 카르시온이 수석으로 졸업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하지만 누구도 공작가의 자제라서 혜택을 주는 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학생들이 아카데미와 이사장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수상식이 끝나자 졸업식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끝이 났다.

“……이상으로 아레나 아카데미의 졸업식을 마칩니다. 졸업생 여러분 모두에게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드디어 졸업이었다.

졸업식을 마치자 학생들이 친구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나 또한 정들었던 애들과 한 명 한 명 인사를 건넸다.

제인과 한스, 리사동 부원들까지.

얼추 모두와 인사를 끝냈을 때 즈음.

피오르가 간신히 제게 달라붙은 사람들을 떨구고 나에게 다가왔다.

“리엔 너 리시안셔스 공작가에 고용됐다며?”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오래 있지는 않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씩 웃으며 놀리듯 입을 열었다.

“넌 이제 어쩌냐, 기사 선배들에게 죽도록 갈리겠네.”

졸업 후 바로 황실기사단에 입단하게 된 피오르였다.

피오르는 자신의 꿈을 좇기로 했고, 그에 집중하기 위해 작위를 잇는 것을 포기했다.

말이 포기지 형에게 미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늘 그랬듯 장난을 받아친다.

“그 무서운 공작가에 일하러 가는 너보다 힘들겠냐? 목이나 안 떨어지게 조심해라.”

“나 죽으면 과연 카온이 가만히 있을까?”

“……멸망이 찾아오겠네. 대륙을 위해 열심히 목숨 보전해 줘.”

“노력해 볼게.”

새침하게 어깨를 으쓱이자 피오르가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때, 뒤쪽에서 피오르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피오르!”

“이크. 슬슬 가야겠다.”

그는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형의 계승식 연회에는 와 줄 거지, 리엔?”

“봐서.”

내가 그때까지 공작가에서 일하고 있다면 말이다.

“와 준다니 고맙다. 형도 네가 오면 좋아할 거야.”

피오르는 내가 참석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아주 멋대로구먼.”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내 얼굴에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원하던 황실기사단에 입단한 만큼 잘 적응했으면 좋겠다.

피오르까지 인사를 했으니, 이제 남은 건 쿤인가…….

그는 아바스칸투스로 떠나야 했으니 다른 이들보다 더욱 먹먹한 기분이었다.

그를 찾기가 무섭게 시야에 쿤이 들어왔다.

쿤은 꽃다발을 든 채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꽃다발은 보통 졸업식 후 아카데미를 나가 가족들에게 받았다. 외부인 출입 금지 규칙 때문이었다.

같은 졸업생끼리는 꽃다발을 잘 주고받지 않았고.

쿤은 누구에게 받은 걸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쿤이 입가에 옅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꽃다발을 건넸다.

“응? 나 주는 거야?”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묻자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리엔에게 드리는 겁니다.”

나는 씩 웃으며 꽃다발을 받았다.

“호오, 이번에는 노란 장미가 아니네. 그 존넨 쉬름인가 뭔가 하는 거 말이야.”

“그, 그때는…….”

쿤이 당황하는 사이, 나는 그가 건넨 꽃을 확인하고 눈을 키웠다.

“물망초네? 이거 여름에 피는 거 아니야?”

“우연히 보존 마법이 걸린 것을 구했습니다.”

“여튼 고마워. 가족들한테 못 받을 꽃다발을 같은 졸업생인 너한테 받네.”

“졸업 축하의 의미만 담긴 게 아니니까요.”

“응? 그게 무슨…….”

“그보다.”

내가 의문을 해소할 새도 없이 쿤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카르시온은 어디에 갔습니까?”

“네가 어쩐 일로 카온을 찾아?”

“하도 리엔을 쫓아다녀서 이제는 옆에 없는 게 더 수상합니다.”

아. 그래서였군.

“카온은 대리 수상한 거 전해 주고 오겠다던데? 이사장님과 아는 사이였나 봐.”

하긴, 그렇게 아카데미를 부수고 다녔는데 한 번쯤은 이사장님과 면담했을 만도 했다.

“그렇군요. 리엔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다행입니다.”

“할 말이 뭔데?”

쿤이 나를 보며 옅게 웃음을 지었다.

“좋아합니다, 리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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