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나는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쿤이 날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내게 고백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전조 없이 말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졸업 여행 때 그에게 돌려서 내 마음을 전하지 않았나.
꽃다발은 졸업을 축하해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고백의 용도였나?
한참을 굳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 질질 끄는 건 좋지 않았다.
나에게도, 쿤에게도.
“미안해. 네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군요.”
내 거절에 쿤은 오히려 후련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사실 거절하실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저 아바스칸투스로 가기 전, 리엔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어요.”
“쿤.”
“사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었습니다만…….”
내가 거절을 말할 때조차 미소 지었던 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시 그건 제 옹졸함 때문에 안 될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리엔.”
나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그가 건네줬던 꽃다발을 매만졌다.
고백을 거절했으니 꽃다발은 돌려주는 게 맞겠지.
이런 내 생각을 눈치챈 듯 그가 선수를 쳤다.
“저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라면 꽃은 받아 주세요. 고백하기 전에 드렸지 않습니까.”
“……응.”
물망초 꽃다발을 끌어안는 나를 보며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일로 인해 리엔과 멀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혹, 괜찮으시다면 가끔 저와 편지해 주실 수 있나요?”
편지라. 내가 언제까지 공작가에서 지낼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지금처럼 편하게 굴어도 불경죄로 잡아가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나는 결국, 거절을 입에 담지 못했다.
고백은 거절했지만, 그가 나에게 있어 소중한 친구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은 까닭이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그랬듯, 조금이라도 더 쿤과 연락을 이어 나가고 싶었다.
쿤이 졸업을 실감한 듯 눈을 키웠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리엔은 제 은인입니다. 오히려 태도를 바꾸는 게 더 서운했을 거예요.”
“친구.”
“……네?”
“은인이 아니라, 친구라서 그렇다고 하자. 그게 더 딱딱하지 않잖아?”
“친구라. 오늘만큼은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요.”
쿤이 얼굴에 따스한 웃음을 그려 냈다.
“아카데미에서 함께하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나도 네가 친구여서 즐거웠어.”
“……친구라는 말 듣기 좋지 않다니까요.”
“부끄러워하긴.”
쿤은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다가 결국 픽 웃어 버렸다.
“다음에는 아바스칸투스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리엔에게 보여 드리고 싶은 게 많습니다.”
“소시민인 내가 다른 제국으로 넘어갈 일이 있을까는 모르겠다.”
쿤이 답지 않게 불쌍한 척 눈썹을 그러모았다.
“친구를 보기 위해서 그 정도도 감수 못 해 주십니까?”
“친구라는 말 듣기 싫다며?”
“생각해 보니 썩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얼씨구.
그의 빠른 태도 변화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웃음을 흘릴 때였다.
“아, 그리고.”
“응?”
쿤은 내가 들고 있는 물망초 꽃다발에서 줄기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꽃 부분만을 똑 떼어 내게 다시 건넸다.
“리엔, 이건 따로 주머니에 넣어 주실 수 있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다 뭉개질 텐데?”
“괜찮습니다.”
“네가 괜찮다면야…….”
나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꽃을 교복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쿤을 처음 만난 날, 그가 내게 꽃을 꺾었다는 이유로 엄청 화냈었는데.
내 표정에 쿤은 변명처럼 말했다.
“줄기가 길면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아서요.”
“왜 주머니에 넣으라는 건데?”
“그건…….”
그의 시선이 내 뒤쪽 어딘가로 향했다.
“금방 알게 되실 겁니다.”
쿤이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말며 내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리엔. 다시 보는 날까지 건강하시길.”
인사 후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시온이 나타났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별로. 다른 애들이랑 인사하고 있었어.”
그럼 다행이라며 웃던 카르시온은 내가 들고 있는 꽃다발을 보고는 눈을 문질렀다.
내가 들고 있는 꽃다발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그의 눈이 가라앉는다.
“……리엔. 지금 들고 있는 건 누가 준 거야?”
어쩐지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무슨 바람이라도 피우다가 걸린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이윽고 나는 잘못한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쿤이 졸업 축하한다며 줬어.”
“아하.”
카르시온이 싱긋 웃었다. 무언가 일을 치르기 전 습관처럼 짓는 웃음이었다.
* * *
“미안해…….”
“이거 놓으세요, 소공작님.”
나는 카르시온에게 1cm가량 잡힌 옷자락을 힘을 줘 뺐다.
그가 울상을 지으며 허공에 남겨진 손을 꼬물거린다.
“내가 잘못했어…….”
아. 미쳤다. 너무 귀엽다.
나는 순간 흐물흐물 풀릴 뻔했던 표정을 고치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요. 소공작님은 잘못하신 거 없어요. 그러니까 전 무시하시고 갈 길 가세요.”
그렇다. 나는 지금 카르시온에게 화난 척을 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쿤이 내게 준 물망초 꽃다발을 카르시온이 재로 만들어 버린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괘씸한 마음에 정말로 화를 낼까 했었는데…….
패기롭게 일을 저질러 놓고는 한껏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사과를 건네는 그를 보자 화는 눈 녹듯 빠르게 사라졌다.
게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 또한 카르시온이 그를 짝사랑하는 여학생에게 받은 꽃다발을 들고 있었으면 질투가 났을 테니.
쿤도 이 상황을 예견해서 꽃을 따로 주머니에 넣어 달라고 부탁한 것 같고.
하지만 내가 아직도 화가 난 척을 하고 있는 것은…….
“리엔, 화 많이 났어……?”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카르시온의 파란 눈망울이 옅게 일렁인다.
그래. 저것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썹을 그러모으고, 달려 있지도 않은 꼬리를 시무룩하게 늘어뜨린 저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후, 너무 좋다.
곧 있으면 울먹일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놀려 볼까.
내 성격에 살짝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건 잠시였다.
저 얼굴을 보고도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화 안 났다니까요. 저는 이만 마차를 타고 리시안셔스 공작가에 가야 하니 놔주세요.”
나는 카르시온을 스쳐 지나가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가 다시금 내 옆으로 빠르게 붙었다.
“내가 있잖아 리엔. 마법으로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데 왜 불편하게 마차를 왜 타려고 해.”
“그걸 몰라서 물으세요?”
내 단호한 대답에 카르시온의 눈빛에 공황의 눈빛이 떠올랐다.
이윽고 나를 열심히 따라오던 그가 불현듯 발걸음을 뚝 멈췄다.
“……역시 그걸 써야 하나. 나름 비장의 수였는데 지금 써도 괜찮은 건가. 조금만 더 아껴도 되지 않을까. 아니, 멍청아. 지금이 비상인데 아끼긴 뭘 아껴.”
그는 내가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다가 결국,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리엔, 혹시 크로캉부슈 좋아해?”
“……뭐?”
화난 척하느라 말투를 딱딱하게 하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반말이 튀어 나갔다.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단어였던 까닭이다.
크로캉부슈.
슈를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뒤, 캐러멜 시럽을 뿌려 고정시킨 디저트였다.
여기서 그걸 꺼내는 건 너무 반칙이잖아.
“화를 풀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내가 정말 잘하는 곳을 알고 있거든. 같이 먹기만 해 주라. 응?”
내가 무슨 슈만 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줄 아나 본데.
“하, 내가 고작 그런 거에…….”
넘어갔다.
그것도 그냥 넘어간 게 아니라, 너무나도 만족스럽게 먹은 나머지 이후 카르시온과 오붓하게 데이트까지 해 버렸다.
그것도 저녁 늦게까지 말이다.
나도 단단하게 쌓아 놨던 내 철벽이 이렇게 쉽게 허물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데려간 디저트 가게의 크로캉부슈는 정말이지 환상이었다.
내 마음을 녹여내기에는 충분했다는 뜻이다.
내가 번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공작가에 도착한 후였다.
리시안셔스의 수도 저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무작정 화려하기보다는 적당히 꾸밈이 있으면서 깔끔하다고 해야 하나.
군데군데에 복잡스러운 마법진이 새겨져 있는 건 덤이었다.
신기한 표정으로 저택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카르시온이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
“천천히 둘러봐. 이제부터 너와 내가 함께 살 곳이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는데.”
“뭘. 내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뻔뻔스럽게 입을 놀리던 카르시온은 덧붙였다.
“조금 있으면 마나의 흐름을 느낀 어머니가 이리로 오실 거야.”
“오…….”
마법사 가문다운 방식이었다. 어쩐지 사용인들이 안 보이더라. 뭔가 멋있네.
“공작님은?”
“아버지는 저택에 없는 것 같아. 근데 있어도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무시해도 돼.”
“……무시?”
명색의 공작님한테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냐고 말하려 할 때였다.
바닥에 마법진이 생겨나며 우리 둘 앞에 공작 부인이 나타났다. 그리고선 두 팔을 벌리며 하는 말.
“우리 새아가가 왔구나!”
……새아가라니, 설마 나?
나는 벙찐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늦게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공작 부인의 말동무 시녀로 일하게 된 리엔이라고 합니다.”
“어머,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단다. 이제 가족이 될 텐데.”
나는 당황했다.
저 가족이라는 말이, 흔한 채용 공고에 붙어 있는 가‘족’ 같은 의미가 아니라, 정말 ‘가족’의 의미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쩐지 더욱 공손해진 어조로 말이 나왔다.
“제가 오기를 기다리셨다고 했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닐지…….”
그러자 공작 부인이 입을 틀어막으며 감격한 얼굴을 했다.
“세상에, 누구는 개미허리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던데. 우리 새아가는 정말 다정하구나.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렴.”
맙소사. 또 새아가라고 하셨다.
처음 들었던 게 잘못 들은 게 아닌가 보다.
“공작 부인. 그 새아가라는 호칭은…….”
내 지적에 공작 부인이 긴 속눈썹을 팔랑였다.
“마음에 안 드니?”
“마음에 안 들기보다는 남들이 듣기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 같아서요.”
“아하.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구나. 확실히 새아가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
그녀의 빠른 수긍에 나는 살짝 안심했다. 말이 아예 통하지 않는 분은 아닌 듯했다.
공작 부인이 내게 다정히 물었다.
“그럼 며늘아기나 며느리는 어떠니, 리엔?”
아니 저기요, 공작 부인.
셋 다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