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냥 리엔으로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요?”
공작 부인은 내 말에 다소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아직 결혼하지는 않았으니까 부담되겠구나.”
그녀가 내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어서 짐을 놓고 여독을 풀도록 하렴.”
“감……사합니다.”
나는 다소 떨떠름하게 답했다.
‘아직’이라니.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내가 카르시온과 결혼할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지 않나.
“아, 그리고 아직 방이 덜 정리가 돼서 오늘 하루는 다른 방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니?”
“네. 어떤 방이든 잠만 청하게 해 주신다면 감사해요.”
당장 렉스 베고니아를 피해야 하는데,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으니.
“양해해 줘서 고맙구나.”
공작 부인이 손을 들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얼마 후 집사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과 몇몇 사용인이 나타났다.
뭔지는 몰라도 마법으로 신호를 보낸 듯했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집사. 리엔을 손님방으로 안내해 줘.”
“예.”
꾸벅 고개를 숙인 집사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총집사장, 단 알테미어라고 합니다.”
……알테미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성 같은데.
어디서 들어 본 성일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공작 부인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온. 너는 따라가지 말고 여기 있으렴. 할 일이 따로 있단다.”
당연하다는 듯 나와 같이 가려던 카르시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할 일이요?”
“그래.”
“싫은데요.”
와. 저렇게 바로 거절한다고?
내가 카르시온의 싸가지에 놀라 입을 벌리고 있을 때였다.
공작 부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고는 나를 바라봤다.
“리엔.”
“네에……. 공작 부인.”
“우리 리엔은 사지 멀쩡하고 능력이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축내는 덜떨어진 인간과 맡은바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성실한 사람 중 누가 더 좋니?”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후자요.”
내 대답에 공작 부인이 흡족한 표정을 하는 동시에 턱을 추켜올렸다.
“그렇다는데, 아들아. 아까 한 말을 다시 한번 말해 보렴.”
그에 카르시온은 분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많이는 못 내요. 제 시간은 리엔 거라서.”
가만히 있던 내 얼굴에 물음표가 잔뜩 떠올랐다.
네 시간을 왜 나한테 떠넘겨. 네 건 네가 가지고 있으라고.
어이없었던 것도 잠시,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기로 하고 옆에 서 있던 집사님께 말했다.
“안내해 주세요.”
* * *
묵묵히 복도를 걷던 집사가 내게 대뜸 말을 걸어 왔다.
“공작 부인과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많이 아끼시더군요.”
“말 편히 하세요, 집사님.”
“공작 부인의 시녀 되실 분인데, 그럴 수 없죠.”
“공작 부인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전 평민이에요.”
“……평민? 평민이 어떻게 마님의 시녀가.”
그의 눈매가 좁혀 들어갔다. 눈빛과 말투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아아, 마님께서 또 가여운 아이를 들이셨군.”
……또?
내가 알기로 공작 부인은 말동무 시녀를 들인 게 딱 한 번이었다.
제인을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머릿속에 무언가 스쳤다.
아.
알테미어 자작.
그 대머리에 성격 나쁘다는……?
나는 그의 머리를 슬쩍 훔쳐봤다. 어떻게 봐도 풍성하다.
가발인 건가? 아니면 내가 사람을 착각한 건가?
“여기입니다. 임시로 머물 곳이니 깨끗하게 사용 바랍니다.”
“네에에…….”
끝까지 그의 머리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머뭇머뭇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갑자기 오만상을 찌푸리며 창가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흰 장갑을 낀 채 검지로 창가 안쪽을 슥 닦아 냈다.
흰 장갑에 먼지가 살짝 묻어 나왔다.
그는 차분하지만 어쩐지 격양되어 보이는 말투로 옆에 있던 하인에게 명했다.
“이 방 청소를 담당했던 사용인을 불러와라.”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지 하인은 금방 달려 나가 사용인 한 명을 데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쿵.
오자마자 그의 앞에서 서슴없이 무릎을 꿇는 사용인을 보고 나는 눈을 키웠다.
미친. 이게 무슨 상황이야.
알테미어 자작이 더러워진 제 장갑을 사용인의 눈앞에 갖다 댔다.
“손님방은 언제나 최상의 청결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모르나?”
“여, 열심히 청소했는데. 그, 그게…….”
순간 강한 파열음이 방 안을 울렸다. 어찌나 세게 손을 휘둘렀는지, 사용인이 몸이 나뒹굴었다.
“내가 지금 변명을 하라고 했나?”
나는 기함하며 흥분한 알테미어 자작의 앞을 막았다.
“집사님. 저는 괜찮으니 진정하세요.”
그의 시선이 내게 떨어졌다. 언뜻 귀찮음이 섞인 눈빛이었다.
“아뇨, 리시안셔스 공작가에서는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가씨.”
알테미어 자작의 기세가 사나워진다.
“사용인에게 어떤 처벌을 내리건 이건 총집사장인 제 권한입니다.”
“제가 괜찮다고 했어요. 이 방에서 잠을 청할 사람인 제가 괜찮다면 실수가 아니죠.”
“하하, 아가씨.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건 제…….”
“실수하지 않은 사용인에게 처벌을 내리는 건 집사님의 월권 아닌가요?”
월권이라는 말에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는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알테미어 자작은 몇 분 동안이나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아가씨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알테미어 자작이 반쯤 쓰러져 있던 사용인에게 턱짓했다.
사용인은 아픈 것도 잊은 듯 벌떡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그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면서도 자작은 내게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편히 쉬시길.”
문을 닫고 나가는 그의 눈빛은 끝까지 굉장히 불쾌했다.
* * *
한편, 둘만 남게 된 카르시온과 실비아는…….
“어머니. 오늘 낮에 졸업한 아들을 부려 먹으려 하시다니,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할 일이란 게 리엔과 관련된 일인데도?”
“당장 하고 싶어서 근질거리네요. 그래서 그게 뭐죠?”
실비아는 픽 웃었다.
카르시온이 리엔 한정으로 굉장히 다루기 쉬워졌다. 제 남편을 아주 똑 닮아서는…….
“리엔의 방에 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3층이라 계단 오르내리기 힘들잖니.”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두 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를 듣고 있던 사용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누가 집안에 유지 비용만 천문학적인 이동 마법진을 설치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고작 계단 오르내리는 게 힘들다는 이유로.
“그럼 할 일이란 게 이동 마법진을 그리는 건가요?”
“그래. 마법진 그리는 것에 쥐약인 나보다는 네가 훨씬 빠르고 정확성이 높을 테니까.”
“어려운 것은 아니니, 빨리 끝내고 리엔 보러 가야겠네요.”
그런 카르시온을 보며 실비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해 봤자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아주 중증이었다.
게다가 카르시온의 말에는 크나큰 어폐가 있었다.
그녀 또한 천재라 불린 마법사였기에 이동 마법진을 직접 설치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엄두는커녕 생각조차 못 했겠지.
그런데 그걸 어려운 것이 아니라 칭하다니.
‘내 아들이지만, 정말 괴물을 낳았군. 카르시온의 목줄을 잡아 줄 리엔이 나타나서 다행이야.’
실비아가 다시금 리엔의 소중함에 대해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그나저나,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 가셨죠?”
“네가 웬일로 그이를 찾아?”
“아까 리엔이 물어봐서요.”
그럼 그렇지.
제 아들이 아버지의 소재 따위를 궁금해할 리가 없었다.
작게 한숨을 쉰 실비아가 팔짱을 끼며 설명했다.
“리엔을 데리러 간다고 나섰는데……. 지금까지 안 오는 걸 보니 너희와 엇갈린 듯해.”
그에 카르시온이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왜?”
어떻게 봐도 체내 마나가 훨씬 방대한 자신이 리엔을 데려오는 게 나을 터였다.
“너에게 리엔을 어떻게 맡기냐면서 나갔단다.”
“……네?”
카르시온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머니 말고는 세상 무엇에도 관심 하나 없는 아버지가 무슨 바람이 들어 리엔을 챙기려 한단 말인가.
심지어 자신에게 어떻게 맡기냐니.
아버지가 리엔과 친분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리엔의 방에 마법을 설치하는 게 급하니 먼저 갈게요.”
라고 말하고는 텔레포트로 실비아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카르시온이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실비아도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제 남편의 마나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마법진이 생성되며 공작이 나타났다.
실비아는 늘 그랬듯 팔을 벌렸고, 공작은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품에 안겨 들었다.
“오셨어요, 여보?”
“……실비아.”
남편의 목소리는 우울해 보였다.
게다가 뚱한 얼굴도 무언가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카르시온에게 선수를 뺏겨서 억울한가 보다.
하여간, 귀여운 거로 치면 제 남편이 제국 1위였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으로 말이다.
실비아가 공작의 등을 토닥였다.
“너무 우울해하지 마요. 결국에 리엔이 저희에게 왔으면 된 거죠.”
“……뭐?”
공작은 귀를 의심했다.
저에게 편지로 도움은 괜찮다며 못을 박았던 리엔이었다.
편지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친구의 집에 당분간 머물기로 한 것 같은데…….
해서, 자신은 마지막으로 리엔을 딸로 들이는 데에 설득해 보려 아카데미 졸업식에 갔던 거였다.
하지만 설득은커녕 만나는 것조차 하지 못해 우울해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리엔이…….
“제 발로 걸어서 공작가에 왔다고?”
아니, 그전에 리엔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건가?
공작의 속을 모르는 실비아가 쿡쿡 웃었다.
“아니요. 걸어서 이렇게 빠르게 올 만한 거리는 아닌 거 알잖아요.”
“그럼 리엔이 어떻게…….”
“어떻게는요. 우리 며느리는 아들이 데리고 왔죠.”
“……그렇군.”
공작은 가끔은 아들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잠시만.
딸이 아니라,
“……며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