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나는 집사인 알테미어 자작이 나가고 한참을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평민이라는 걸 말하지 말았었어야 했나?
하지만 굳이 귀족 행세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기도 했고.
“아카데미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지 평민이라고 대놓고 차별하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네…….”
뭐, 그만큼 신분에 목매는 사람이면 나를 섣불리 건드리려 하지는 않겠지.
카르시온이 내게 하는 행동을 본다면 말이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침대로 향했다. 그러고는 대자로 누워 침대의 푹신함을 만끽했다.
공작가라 그런지 침대도 최고급이었다.
“으아아……. 이게 인생이지.”
씻는 거고 뭐고 옷만 갈아입고 바로 이 포근한 침구 속에서 자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공작 부인은 이미 마음속으로 나를 며느리로 들이신 것 같았지.
새아가나 다른 호칭들도 그렇고.
아저씨는 분명 공작 부인이 자신의 권력을 오래 유지하고 싶어, 꼭두각시를 세우려는 거라고 확신하듯 말씀하셨는데…….
공작 부인의 투명한 녹안을 보고 있으면 전혀 지어낸 표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만약 정말 공작 부인이 ‘나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신 거라면 어쩌면 정말 카르시온과 함께 사는 미래를…….
아니지.
나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또 쉬이 꿈에 젖으려 했다.
공작 부인만 마음에 들어 하면 무엇 하나. 공작님과는 아직 얼굴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데.
애초에 내가 고민했던 것도 베고니아 공작가와 리시안셔스 공작가 사이에 분란이 일어날까 걱정돼서가 아니었나.
이렇게 있을 게 아니라 하루빨리 거처를 찾아 말동무 시녀 일을 그만둬야만 했다.
한숨을 푹 쉬며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였다.
기계처럼 일정한 노크 소리가 두어 번 울렸다.
“아까 인사드렸던 집사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나는 조금 피곤해진 얼굴을 숨기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여는 것조차 깔끔한 움직임으로 들어온 그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 방에 딸린 욕실에 걸린 온수 마법이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습니다.”
그는 왠지 모르게 아까보다 기분이 썩 괜찮아 보였다.
……그사이 아까의 사용인에게 손찌검이라도 하고 온 건가?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씻으실 예정이라면 다른 욕실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를 따라가기가 꺼려져, 괜찮다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추운 날 찬물로 씻을 생각을 하니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도착한 곳은 굉장히 깔끔해 보이는 방이었다.
말이 깔끔이지, 큰 방 안에 흔한 장식 하나 없이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 굉장히 묘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손님방인 자신의 방보다 더 휑해 보이는데, 빈방인가 보다.
텅 빈 방 안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자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 도움을 드릴 하녀가 필요하십니까?”
“아뇨, 혼자가 편해요.”
“네. 그럴 줄 알고 준비시키지 않았습니다.”
와 이 사람 진짜…….
내 눈이 세모꼴로 뜨여지거나 말거나 그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갈아입으실 옷과 세탁이 필요한 옷은 하녀가 교체해 가져갈 겁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기를.”
딸깍.
그가 방을 나가고 나서야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아쉬움을 토해냈다.
“아, 실수인 척 머리라도 한 번 만져 볼걸.”
가발인지 진짜인지 확인해 보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실례되는 짓은 하지 않았겠지만, 저 사람은 나를 깔보고 있지 않은가.
굳이 그를 존중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알테미어 자작의 더러운 성격을 잘근잘근 씹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몸을 씻는데, 비누에서 익숙한 카르시온의 향기가 나서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너무 잘 어울리는 향기라서, 나도 모르게 당연히 타고난 체향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물론 그와 완전히 같은 향기는 아니었다.
카르시온의 향기는 뭔가 좀 더 농밀한, 맡고 있으면 어딘가 홀릴 것만 같은 향기라고 해야 하나.
아마도 그의 체향과 어우러져 그런 향기를 뿜는 듯했다.
카르시온을 떠올리니 자작 때문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정상을 찾아갔다.
오히려 심장이 기분 좋게 콩콩거리는 듯했다.
비누 덕분에 그럭저럭 좋게 목욕을 마친 나는 옷을 입으려 욕실 문을 살짝 열고는 앞에 놓인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옷을 확인한 나는…….
“미친, 이게 뭐야.”
경악하며 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아니, 저건 옷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옷]「명사」몸을 싸서 가리거나 보호하기 위하여 피륙 따위로 만들어 입는 물건.
이라는 기능을 상실했으니까.
하지만 옷을 집어 던진 지 오래되지 않아, 나는 다시 그것을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입고 있던 옷은 하녀가 수거해 갔고, 내게 남은 건 이 옷의 기능을 상실한 것밖에 없다는 것을.
수건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부러 노렸는지 아니면 깜빡한 건지 수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일단 침착하게 있는 거나마 껴입고는 재빨리 욕실에서 나와 침대의 이불로 몸을 감쌌다.
그리고 침대 맡에 있는 설렁줄을 잡아 흔들었다.
하인보다는 되도록 하녀가 와 줬으면 하는데.
그러나 그 생각은 기우였다.
설렁줄을 아무리 흔들어도 사용인이 방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흔들었으면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알테미어 자작이 꾸민 일인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마구 샘솟았다.
아니, 나는 그가 내게 엿을 먹이려고 한 것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내 방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가야 하나?”
그러다가 중간에 공작님이라도 마주치면……?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상황이었다.
그 소문의 공작님과 이런 망측한 차림으로 처음 대면하다니.
심지어 그분은 카르시온의 아버지이지 않나.
그냥 여기서 자 버릴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내가 이런 차림이라는 것은 아침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을 일이었다.
평생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알테미어 자작, 내게 엿을 줬다 이거지.
이를 갈며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불을 단단히 여미며 들어온 사람을 확인했다.
“리엔?”
나와 눈이 마주친 카르시온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나는 들어온 사람이 카르시온이라는 것에 극히 안도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온……!”
천만다행이었다.
그가 이 방에는 무슨 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카르시온은 이 삭막한 공작가에서 내가 유일하게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 옷을 가져다 달라고 하거나 나를 방으로 텔레포트 시켜 달라고 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나를 본 카르시온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가 이내 의문을 느낀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내 방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내 방?
카르시온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굉장히 기대감이 서린 얼굴로 물어왔다.
“혹시 나 보러 온 거야?”
“……여기가 네 방이었어?”
누구의 방이라고 하기에 너무 텅텅 비어 있어서 빈방인 줄 알았다.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양새라니.
적어도 소파 같은 거라도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자신을 찾아온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다소 실망한 듯 그의 입매가 살짝 내려갔다.
“그럼 리엔은 여길 어떻게 찾아왔어? 그리고 혹시 추운 거야? 이불 둘둘 말고 있네.”
“아, 이거.”
나는 자초지종 설명할 때임을 직감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집사님이 뭔가 오해를 하셨었나 봐.”
“오해?”
그가 느릿하게 눈을 껌뻑였다.
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보니 놀리고 싶은 충동이 순식간에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주먹을 꽉 쥐며 간신히 참아 내었다.
여기서 카르시온을 놀린답시고 이불을 확 걷었다간 그가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거나 심장 마비가 올 게 분명했다.
카르시온과 처음 밤을 보낸 날 그가 비교적 멀쩡할 수 있었던 이유를 들었기 때문이다.
제 몸에 현존하는 제어 마법은 다 걸었었다고 했나.
하긴, 아무리 내가 작정하고 꾸몄다지만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그였다.
아무런 조치 없이 멀쩡하게 나와 진득하게 스킨십을 한다면 그건 카르시온이라 할 수 없겠지.
내가 오랫동안 무슨 오해인지 답해주지 않자 그가 걱정 어린 표정을 하며 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의 직진에 놀라 급히 외쳤다.
“멈춰! 너 그러다 죽어!”
“……응?”
많은 생략이 들어갔기 때문일까.
내가 말한 대로 움직임은 멈췄으나 그의 얼굴에 어리둥절함이 그대로 떠올랐다.
짧은 사이 머릿속에서 그에게 말을 할까 말까 충돌했다.
그래도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말 정도야 괜찮겠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집사님이 우리 사이를 오해했나 봐. 갈아입을 옷을 이상한 걸 가져다주셔서. 미안한데 내 짐가방에서 옷 아무거나 가져다주…….”
성큼.
내 말이 끝마치기 전, 그가 발을 움직여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살짝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봤다.
얼굴이 터질 듯 붉은 것을 보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굴 줄은 몰랐던 탓일까.
나는 괜히 이불을 단단히 여미며 경고하듯 말했다.
“카온, 내 말을 못 들었어?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니까?”
그러나 카르시온은 도통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그의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워졌다.
푸른빛으로 타오르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꿀꺽하며 침이 자연스레 삼켜졌다.
붉은색보다 파란색이 더 뜨겁다고 했나. 나는 지금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제어 마법은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걸 수 있어, 리엔.”
그의 말이 끝마침과 동시에 주변에 십 수 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 장면에 나는 그만 얼이 빠져 버렸다.
열 개가 넘어가는 마법을 동시에 캐스팅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저렇게 많은 제어 마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던 탓이다.
마법의 효과 덕분일까,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던 그의 얼굴이 조금 안정을 찾았다.
그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리엔에게서 내 냄새가 나.”
카르시온이 기분 좋은 듯 눈을 내리감으며 갸르릉거렸다.
“너와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에도 네게 이런 향기가 났는데.”
그건 그와 밤새 붙어 있었기 때문에 향이 옮은 것이었다.
지금이랑은 경우가 다르다는 말이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조만간 떠나야 하는 입장인 이상,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도저히 저 유혹적인 얼굴을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카르시온이 천천히 내게 손을 뻗는 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