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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09)화 (109/161)

109화

카르시온의 숨결이 선명히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잔뜩 긴장한 채 몸에 힘을 주고 있으려니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그 웃음소리마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이불을 꽉 쥐고 있던 손에 온기가 전해진다.

그가 내 손등에 부드럽게 깍지를 껴, 제게로 당겼다.

쥐고 있던 이불을 놓쳐서 아래로 흘러내릴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이불은 단단히 고정된 채였다.

슬며시 눈을 떠 확인해 보니 그는 나와 깍지를 끼지 않은 손으로 이불을 잡아 주고 있었다.

또다시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스레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내 머리 위로 그의 다정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리엔 네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네게 저질렀던 끔찍한 실수는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작게 덧붙인 그는 느른히 웃으며 내 손목에 입술을 댔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나는 홀린 듯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카르시온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급히 손을 뺐다.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하겠다며!”

“……싫었어?”

그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고막을 달콤하게 휘감았다.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내 손목을 본 다른 사람들이 뭐라 오해하겠는가. 분명 애꿎은 상상을 할 터였다.

내 표정에 담긴 생각을 읽어 낸 듯 카르시온이 다시금 내 손을 잡았다.

그가 내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배시시 웃는다.

“미안, 네가 이걸 싫어할 줄은 몰랐지 뭐야.”

“그걸 일일이 말해 줘야 해?”

“하지만.”

내 말에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뜸을 들이던 그가 수줍게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그날은…….”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깨닫고 말았다.

카르시온은 앙큼 고양이도,

귀여운 대형견도 아닌,

꼬리를 꼭꼭 감추고 있던 요망한 여우였다는 것을.

* * *

이튿날.

홀로 아침을 맞이한 공작은 단 한숨도 자지 못해 퀭한 눈가를 꾹꾹 눌렀다.

분명 공작가에 실비아가 존재하고 있는데 따로 자는 상황이라니.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그는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은 늦어서 차마 리엔을 찾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와 나눠야 할 말이 많았다.

공작은 바로 옆에 있는 설렁줄을 당기기도 귀찮다는 듯 마법으로 누군가를 호출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나와 같은 단정한 차림의 알테미어 집사가 들어왔다.

그는 일 처리가 깔끔하고 총 집사장으로서 사용인들 단속을 완벽히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에는 변덕이 들어 자신이 직접 작위까지 내려주었었지.

“좋은 아침입니다, 각하.”

공작은 알테미어가 내뱉은 말에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좋은 아침? 개소리였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이토록 거지 같은 아침은 손에 꼽았다.

공작의 기세가 흉흉해진다.

“그 발언, 지나친 일반화라는 거 알고 있나?”

……?

알테미어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다소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아둔하여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 너의 좋은 아침이 나까지 그럴 거라 생각하냐는 말이다. 어이가 없군.”

아차.

제 실수였다. 어제 그 계집에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기분이 너무 들떠 있었나 보다.

공작님과 공작 부인이 어젯밤 각방을 쓰셨다는 걸 염두하고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어야 했는데.

알테미어는 급히 허리를 숙였다.

“감히 제 경험을 미루어 일반화를 꾀하려 해 죄송합니다.”

그에게 공격 마법이라도 날릴 듯 사나운 기세를 풍기던 공작은 이내 이마를 짚으며 명했다.

“됐고, 지금 당장 어제 그 아이를 불러와라.”

그 계집에게 단단히 경고하시려는 거군.

알테미어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답했다.

“명을 받듭니다.”

공작의 명으로 리엔이 머무는 방으로 걸음을 옮기던 알테미어는 잠시 멈칫했다.

그 계집의 방이 아닌, 도련님 방으로 가야 하나?

도련님 방에서 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 도련님의 방으로 가야 하는 것인가.

짧은 고민 끝에 카르시온의 방 앞에 도착한 그는 방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집사입니다.”

알테미어가 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그는 방 안쪽에 리엔이 없다는 것을 빠르게 스캔하고는 아무 일도 없던 척 눈을 원위치했다.

시선을 돌리기가 무섭게 카르시온이 대뜸 그의 멱살을 잡아챈다.

“도, 도련님?”

“집사. 아주 재미있는 짓을 했더라?”

“무, 무슨 말씀이신지…….”

“덕분에 리엔의 귀여운 얼굴을 봤으니 이번에는 넘어가 줄게.”

카르시온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싱긋 웃음을 그려 내었다.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한다면 너와 평생을 함께한 손목과 헤어져야 할 지도 몰라.”

그러고는 용건은 끝났다는 듯 알테미어를 팍 밀쳐낸다.

“알아들었으면 꺼져.”

카르시온에 의해 넘어진 그는 꺼지라는 말에 부리나케 일어나 자리를 벗어났다.

넘어질 때 허리가 삐었는지 걸을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는 듯 꼿꼿하기만 했다.

알테미어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내리누르며 리엔의 방으로 열심히 발을 놀렸다.

저 성질 더러운 놈.

보아하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데.

그는 정녕 인성도, 욕구도 없는 것인가?

어떻게 좋아하는 여인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인지.

어느새 리엔의 방에 도착한 그는 이번에도 문을 두드려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리엔의 고조 없는 허락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리엔이 싸늘한 눈빛으로 알테미어를 응시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눈빛을 받아쳤다.

잠깐 시선을 내린 알테미어는 리엔이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다니…….

설마 그 연쇄 손목마가?

그럼 저 계집의 귀여운 얼굴을 봤다고 한 게, 고통에 몸부림치는 얼굴이었다고?

허, 사이코패스도 이런 사이코패스가 없었다.

짝사랑하고 있는 여자에게도 가차 없다는 점에서 놀라긴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또 아니었다.

도련님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제 앞에서 아주 기세등등하더니 꼴좋지.

알테미어는 리엔의 손목에 감긴 붕대가 누구 때문인지 잘 알면서도 태연히 물었다.

“손목은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그의 뻔뻔한 작태에 화가 난 리엔이 미간을 구겼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알아서 묻겠습니까?”

리엔은 알테미어에 대한 분노 수치가 한계점에 달하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손목에 붕대를 칭칭감고 있는 신세인데!

“시비 걸러 오신 건가요?”

“아뇨.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데려오라 명하셔서 왔습니다.”

알테미어의 말에 금방이라도 화를 낼듯했던 리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올 것이 왔구나.’하고.

* * *

나는 도축장에 끌려오는 짐승이 된 심정으로 공작님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각하. 아가씨를 데려왔습니다.”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지자 알테미어 집사는 나를 안쪽으로 밀어 놓고는 잽싸게 문을 닫았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쿵.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상황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나는 침착하게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냉혈한이라 불리는 공작 앞에서는 최대한 공손한 편이 좋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공작 부인의 말동무 시녀로 오게 된…….”

“새삼스레 처음 보는 것처럼 예를 갖춰 인사할 필요는 없다, 리엔.”

처음 보는 것처럼 인사할 필요는 없다고? 그게 무슨…….

나는 의문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에 놀라 눈을 비비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것도 모자라서 몇 번이나 눈을 끔뻑여도 봤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달라지는 법은 없었다.

“……아저씨?”

“그래, 나다.”

충격으로 인해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아저씨가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공작이셨다고?

정말로?

잠시, 잠시만.

리시안셔스 공작이라는 건 카르시온의 아버지라는 거 아냐?

그럼 내가 지금껏 도와 드린 연애 사업은 카르시온 부모님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너무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새하얗게 변했다.

하마터면 카르시온과 남매가 될 뻔했다는 것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아저씨에게 조언이랍시고 말했던 게 어떤 것들이던가.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딱 붙는 와이셔츠에, 앞치마 입고 아침 차려 주기와 엉엉 울기.

그 밖에도 소매를 걷어 잔근육 자랑하기나 기장이 살짝 짧은 바지를 입어 아슬아슬하게 발목 드러내기 등등.

연애 사업을 도와준답시고 제 취향을 열거하지 않았던가.

카르시온의 아버지에게!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던 공작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카르시온이 짝사랑하고 있다는 아이가 넌 줄 몰랐다.”

그 부분에서는 의심한 적 없었다.

알고 있었다면 아저씨가 나를 딸로 들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을 테니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아저씨에게 카르시온 같은 아들이 나올 수 있는 거지?

외모는 전부터 묘하게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성격이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무뚝뚝한 아저씨와 달리 카르시온은 나름 밝고 귀여운…….

순간 머릿속에 리시안셔스 공작의 무수한 소문이 스쳤다.

아아.

정말 똑 닮았구나.

지금껏 몰랐던 게 용할 정도였다.

괜히 뒤를 캐는 것 같아 최대한 아저씨의 정체에 대해 알아내지 않으려 했더니…….

길게 상념 하던 중 공작님의 진지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나는 아직도 벙벙한 정신을 다잡으며 답했다.

“……말씀하세요.”

“카르시온을 좋아하고 있나?”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놀란 얼굴을 하자 그가 다시금 물어왔다.

“내 아들 카르시온의 일방적인 짝사랑인가, 아니면 마음이 통한 것인가를 묻는 거다.”

솔직하게 내 감정을 말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아저씨는 나를 딸로도 들이려 했던 사람이었다.

나를 싫어한다면 절대 제안할 수 없는 일 아니던가.

카르시온부터 시작해 공작 부인.

그리고 공작님까지.

……공작가 구성원 모두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니.

꿈에 그리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그 찢어 죽일 렉스 베고니아 때문에.

나는 거짓을 입에 담아야만 했다.

두 공작가 사이에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아뇨. 저는 카르시온을 좋아하지 않아요.”

아.

고작 한 마디였을 뿐인데, 괜히 울컥하며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카르시온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내 모든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감정이 거센 파도처럼 몰아친다.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대체 왜 말하지 못하는 거야?

몇 마디면 되잖아.

렉스 베고니아가 나를 원하고 있다고. 내게 손을 올리는 그가 무섭다고. 도와 달라고.

문득 아칸더스가 내게 보낸 편지가 떠올랐다.

‘나는 네가 이기적으로 살았으면 한다.’

이기적으로…….

미안해요, 아칸더스.

하지만 성격이 이렇게 타고난 걸 어떡해.

사실 저도 답답해요. 이런 내가 답답하고 미련해 보여서 미치겠어.

그때, 내 대답을 들은 공작님이 심각한 얼굴로 뭐라 중얼거렸다.

“……다행히 내 희생이 헛되지는 않았군.”

아저씨가 뭐라고 했는지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서서히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여기서 울면 안 되는데.

아저씨가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때마침 아저씨의 책상에서 펜이 하나 도르륵 굴러떨어졌다.

나는 잘됐다 싶은 마음에 펜을 주우려 허리를 굽혔다. 차오른 눈물을 몰래 훔칠 셈이었다.

그러자 다소 당황한 공작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리엔. 네가 몸을 굽혀 주울 필요 없다. 마법을 쓰거나 하인에게 시키면 될 일이야.”

“겨우 펜 하나 줍는 건데 뭘요. 잠시만 기다려 봐요.”

그런데 펜이 하필 책상 틈 사이로 들어가 잘 잡히지 않았다.

나는 결국 무릎을 꿇고 최대한 몸을 낮추어 팔을 쭉 뻗었다.

그때였다.

쾅.

“당신이 리엔을 독차지하려고 따로 불렀다는 게 사실이에요?!”

나는 놀라 뒤를 돌아봤고, 그 결과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공작 부인과 눈을 마주쳤다.

공작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몸을 반쯤 엎드린 채로 말이다.

그것도 미처 닦지 못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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