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리엔!!!”
공작 부인의 비명 같은 외침이 집무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와 공작님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버버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공작님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꼴이라니.
누가 봐도 오해할 법한 상황이지 않은가.
순식간에 내게 다가온 공작 부인이 나를 허둥지둥 일으켜 세웠다.
“세상에, 리엔 괜찮니? 이게 무슨……!”
공작 부인은 내가 아기 새라도 된 듯 꼭 끌어안으며 공작님을 살벌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해명했다.
“진정하세요, 공작 부인. 공작님은 아무 잘못 없으세요.”
그러자 공작 부인이 안쓰러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아아, 리엔. 내 앞에서까지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단다. 저치가 너에게 무슨 협박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겁먹지 말렴.”
협박당한 적 없는데요.
나는 황당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금 그녀를 진정시켰다.
“겁먹지 않았어요. 오히려 공작님은 절 걱정해 주셨는걸요, 그렇죠?”
내가 눈짓하자 공작님이 급히 고개를 주억였다. 하지만 공작 부인의 눈매는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리엔, 그럼 내가 본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니.”
“그건 펜을 주워드리려다가…….”
“지금 네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건?”
“먼지가 눈에 들어가서…….”
“양쪽 눈에 눈물이 차오른 걸 봐서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구나.”
뜨끔했다. 그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설령 그게 진짜라고 해도 직접 주우면 될 일을 굳이 너에게 시켰다는 게 나는 너무 화가 나.”
공작 부인이 팔짱을 끼며 공작님을 쏘아보았다.
“하, 당신은 그 마법 실력을 뒀다 뭐 하는 거예요? 하다못해 다른 사용인에게 시킬 수도 있는 일 아닌가요?”
“실비아. 나, 나는…….”
공작님은 아직도 당황했는지 시원스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나서야겠군.
“공작님은 말리셨어요. 제가 굳이 몸을 굽혀 주운 거죠.”
“굳이?”
“네. 굳이.”
가만히 내 진실 어린 눈을 응시하던 그녀는,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 남편이 앞에 있어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저씨 대체 아내분 신뢰도 상태가 왜 이래요.
대체 평소에 사용인을 얼마나 갈군 거야.
“당신은 저랑 나중에 긴밀히 대화하기로 해요.”
공작 부인은 공작님에게 엄포를 놓고는 내게 접촉한 채로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히며 장소가 뒤바뀌었다.
나는 텔레포트가 되던 찰나에 공작님의 세상을 잃은 듯한 얼굴을 목격했다.
앗, 아아…….
우리 아저씨 불쌍해서 어떡해.
둘만 남고 나서야 공작 부인이 눈에 준 힘을 풀며 눈썹을 그러모았다.
“리엔. 너에게 그런 고초를 겪게 해서 미안해.”
글쎄, 고초 같은 거 겪은 적 없다니까요.
머리가 띵해졌다.
공작가에 온 지 하루 만에 이게 무슨 일이야.
금슬 좋기로 소문난 리시안셔스 공작 부부를 이렇게 빠르게 싸우게 하는 것도 어쩌면 재능 아닐까.
가정 파탄의 재능.
내가 공작가에 온 게 맞는 일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 공작 부인은 뭔가를 쉼 없이 중얼거렸다.
“카온은 뭘 하고 있길래 네 옆도 지키지 않은 거지? 제 아내 될 사람이 시아버지에게 모진 대우를 받고 있는데!”
……교제한 적도 없는데 언제 나 몰래 진도가 그렇게 나갔담.
계속 지켜만 보다가는 공작 부부 사이는 물론이고 모자 관계까지 파탄 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항상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카르시온이 왜 내 곁에 없는지 말해도 될까?
공작 부인이 지금껏 내게 해 왔던 행동들을 보면 기분 나빠하시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제가 카온에게 24시간 접근 금지령을 내렸거든요.”
“……접근 금지령?”
“어제 저와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는데, 심술이 나서 그랬어요.”
공작 부인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혀 들어갔다.
“어떤?”
그때, 내 손목에 감긴 붕대를 발견한 공작 부인의 얼굴에 경악이 스친다.
“서, 설마 카온이, 그 연쇄 손목마가……?”
“오해하지 마세요. 이건 다친 게 아니라…….”
이걸 카르시온의 어머니에게 보여 줘야 하는 상황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 처박히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붕대를 풀어 손목을 보여 드렸다.
잠시 후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공작 부인은 입을 틀어막은 채 아까와는 상반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환희와 감격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아, 제발요.
공작 부인은 이제야 모든 걸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온은 네가 연인이라는 걸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거구나. 그리고 리엔 너는 그게 못내 창피했던 거고.”
“연인이 아니라 친구예요…….”
공작 부인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고는 다시 붕대를 감아 주며 설명했다.
“걱정하지 말렴. 여기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그런 거에 익숙해서 신경조차 쓰지 않을 테니까.”
익숙?
카르시온이 다른 여자를 들였을 리는 없으니 그렇다면…….
아아,
두 분 정말 금슬이 좋으셨구나.
어느새 붕대를 깔끔히 감아 준 공작부인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접근 금지령이라니, 그거 정말 좋은 방법이구나.”
“네? 좋은 방법이요?”
“내가 왜 지금까지 그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 거지?”
어? 어어…….
머리에서 식은땀이 퐁퐁 샘솟는 것만 같았다.
오. 아저씨 죄송해요. 제가 공작 부인께 알려 드리면 안 될 걸 알려 준 것 같아요.
……한 번 더 말하지만 정말 미안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이번 일은 제 잘못이니, 힘이 닿는 대로 도와드릴게요.
속으로 아저씨에게 깊은 사과를 드리고 있을 때였다.
‘리엔.’
머릿속으로 카르시온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다.
원래도 심했었는데 어제 카르시온에게 금지령을 때린 이후 주기가 더 잦아졌다.
카르시온과 함께 있을 때는 전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제인의 말대로 정말 상사병인 건가?
그것을 시작으로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쉼 없이 울려대는 목소리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고는 카르시온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아니, 추정이 아니라 반쯤 확신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본 공작 부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디 아픈 거니?”
“별건 아니고 조금 피곤해서요.”
“낯선 곳에서 잠을 청하느라 뒤척였나 보구나.”
공작 부인이 가볍게 내 눈가에 손을 올리더니 마법을 걸어 주었다.
마법진이 떠오르자 눈이 한결 편해진다. 회복마법인 듯했다.
……정말 자상하시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대로였기에 본질적인 피곤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때, 공작부인이 자신의 분홍색 곱슬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해사하게 웃었다.
“맞다. 말이 나온 김에 리엔, 나와 같이 네 방을 보러 가지 않으련?”
카르시온의 공격력과 버금가는 착한 얼굴이었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 나는 본질적인 피곤함까지 싹 가시는 걸 느끼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아저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 같았다.
저 정도 얼굴이면 오해 조금 할 수 있지. 암.
* * *
나는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며 조심스럽게 공작 부인을 불렀다.
“그…… 공작 부인?”
“불렀니, 리엔.”
그녀가 다정한 음성과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여기는 잠깐 들른 방인 거죠?”
예? 제발 그렇다고 해줘요.
하지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나.
“호호, 농담도. 네 방을 보러 가자고 했잖니. 여기가 이제부터 네가 머물 방이란다.”
가차 없이 내려진 선고에, 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공작 부인이 내 방이라고 소개해 준 이곳은, 과하게 돈이 처 발려…… 아니, 너무 신경을 많이 써 주신 티가 났다.
딱 봐도 값나가 보이는 가구와 장식품들에 눈이 휙휙 돌아갔다.
이게 다 뭐람.
카르시온의 방은 간소하다 못해 텅텅 비어 있었는데.
……나랑 방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정중하지만 다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제게 너무 과분해요. 저는 언제 떠날지도 모르고…….”
“과분이라니. 너는 공작가의 일원이나 마찬가지니 이 정도도 해 주지 않으면 면이 서지 않아.”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말에 대꾸할까 하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다른 이유를 꺼냈다.
“카온의 방은 여기보다 훨씬 단출하던데요.”
“아. 카온은 방에서 정말 잠만 자거든. 어렸을 때부터 제 전용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했단다.”
공작 부인은 무언가를 떠올리듯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전에는 소파도 하나 있긴 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침대만 덜렁 남아 있더구나.”
……동아리실 소파의 출처인가.
그녀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그렇지. 리엔 네가 약초를 좋아한다고 해서 네 전용 연구실도 마련해 놓았단다.”
“이게 끝이 아니라고요?”
공작 부인이 기대 가득한 눈을 하며 입매를 끌어올렸다.
나에게 어서 보여 주고 싶은 눈치였다. 그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내게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네 연구실은 특별히 카온의 연구실 맞은편에 마련해 놨단다. 약초를 보다가 떠오르면 언제든 보러 가렴.”
아니, 이건 아니었다.
“공작부인. 호의는 감사하나, 연구실만큼은 부디 물리셨으면 해요. 저는 공작 부인의 시녀로 온 거지, 며느리로서 온 게 아니에요.”
그러자 충격을 받은 듯 공작 부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리엔은 내가 열심히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니?”
가련한 어깨도 파르르 떨리는 게 내가 죽을죄를 지은 것만 같은 기분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나는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제 공작가에 도착하기 전, 카르시온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불리할 때 우는 연기를 하는 습관이 있어.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매번 당하시지만.’
여우…….
카르시온이 공작님만 빼닮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두 분 다 고루고루 닮은 듯했다.
생각해 보면 아저씨는 직진밖에 몰랐었지.
공작 부인이 뭘 좋아할지도 잘 모르고 달라붙기만 했으니.
역시 카르시온이 여우 같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선즙필승의 원리로 따지면 나는 이미 공작 부인께 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공작 부인은 ‘우는 척’을 했다는 것을 내게 들켰다는 것.
우는 척이라면 나도 지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공작님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단숨에 눈물을 끌어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일순간, 공작 부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드는 것을 포착했다.
자아.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