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다행히 아까 공작님의 집무실에서 반쯤 운 덕분에 눈물을 다시 끌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금 감정 조절을 하니, 금세 목소리에도 물기가 서린다.
“……공작 부인.”
나는 입술을 살짝 씹고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평민인 주제에 공작 부인의 환심을 사서 귀족인 척 행세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요.”
“누가 그런 말을!”
음. 아직 그런 말을 듣지는 않았는데요. 아마 집사님이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저 때문에 부인께서 공작님과 사이가 멀어지시는 것도 너무 심적으로 힘들고…….”
그러자 앞쪽에서 심히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너 때문이라니 그렇지 않아.”
“하지만 아까 제가 공작님의 펜을 주워 드렸다는 이유로 공작님께 화를 내셨잖아요…….”
공작 부인은 반박할 말이 없는지 끄응 소리를 내며 침음을 삼켰다.
“내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구나. 세상에, 이 작은 머리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일이 잘 풀려가고 있음을 느끼며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공작 부인, 부디 믿어 주세요. 그건 정말 펜을 주워 드리려던 것뿐이었어요.”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아닌 거겠지.”
나이스.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정말 믿어 주시는 건가요?”
“그럼.”
나는 배시시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다. 뒤이어 들려온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 문제를 제외하고도 아직 그이와 담판 짓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단다. 그걸 해결하기 전까지는 각방이야.”
이것만큼은 양보해 줄 수 없다는 듯 단호한 음성에, 나는 입을 일자로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 죄송해요.
전 여기까지인가 봐요…….
* * *
공작저 내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공작 내외의 흔치 않은 부부싸움 때문이었다.
자잘하게 다투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각방까지 가는 일은 정말 드물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사용인들은 공작이 며칠 전 호통을 친 것으로 얼추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 들어온 공작 부인의 말동무 시녀.
사용인들은 리엔이 말이 시녀이지, 저들이 깍듯이 모셔야 하는 사람임을 알았다.
공작 부인께서 그녀가 공작 저로 오기 전 얼마나 고대하셨는지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카르시온 도련님이 좋아하는 아가씨라지 않은가.
그러나 공작의 반대로 인해 사용인들은 리엔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열심히 바닥을 쓸던 하인이 저와 같이 청소 중인 하녀에게 말을 걸었다.
“난 그 아가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러자 하녀는 빗질을 멈추고는 말을 받았다.
“알테미어 집사님은 벌써 공작님 편에 서기로 마음을 정한 것 같던데…….”
“집사장님이야 원래 평민을 개 보듯 대하시잖아. 공작님께서 반대하셔서 내심 좋아했을걸?”
“하긴…….”
“웃겨, 공작님이 작위를 내리기 전까지는 자기도 평민이었던 주제에.”
하녀는 동료의 말에 크게 기함하며 검지를 입에 댔다.
“쉿, 쉿.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집사님이 직접 듣는 것만 아니면 괜찮아. 다들 그분께 당한 게 워낙 많았어야지.”
여상한 표정을 하던 하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너는 공작 부인 쪽이야? 아니면 공작님 쪽?”
“나는…….”
평소라면 고민도 하지 않고 공작 부인의 편을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공작님이 공작 부인 앞에서 그토록 정색하며 화내는 건 단연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그 일로 인해 공작 부부가 각방까지 쓰는 상황이지 않은가.
하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빗질을 이어 나갔다.
“잘 모르겠어.”
하인은 그녀가 왜 저런 대답을 했는지 알겠다는 듯 말했다.
“듣자 하니 공작님이 그 아가씨를 따로 불러내서 무릎 꿇리고 모진 말을 뱉어 냈다지?”
“아가씨 손목에 감긴 붕대도 공작님께서 그러신 거라며?”
둘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공작님도 너무하시지.
하인은 잠시 끊긴 말을 다시금 이었다.
“근데 그 아가씨, 솔직히 호감이긴 하지 않아?”
그녀는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 것에 반해, 하인의 말에 선뜻 동의했다.
“맞아. 외모도 외모지만, 말 한마디로 그 도련님을 휘어잡으시는 것도 그렇고…….”
“공작 부인 앞에서 가식을 떨거나 대우받으려고 하지도 않으시더라.”
“게다가 각종 약을 만들어서 여기저기 나눠 주고 계시잖아. 미워하기가 더 힘들지.”
리엔이 공작가에 오고 난 후 취한 행보는 다소 특이했다.
공작 부인의 뒤를 따라다니며 환심을 사거나, 도련님과 지내며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줄 알았는데…….
아가씨는 공작 부인과는 정해진 티타임 시간에만 만났고, 도련님은 밀어내기 바빴다.
그것도 가차 없이 말이다.
연구실에서 내쫓겼는지, 도련님이 시무룩한 얼굴로 문 앞에 쭈그려 앉아있는 것을 목격한 사용인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는 연구실에서 나올 때마다 빈손이 아니었다. 꼭 누군가에게 줄 약을 든 채였다.
요리사들에게는 화상에 좋은 연고를 준다거나.
훈련 중 다칠 일이 많은 기사에게는 포션을.
언제나 다크서클을 달고 살며 연구에 찌든 마법사들에게는 에너지 드링크를.
관절통에 시달리는 하녀와 하인들에게는 붙이면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 진통을 완화해 주는 패치를 나눠주었다.
처음에는 화한 냄새가 나서 거부감이 들었다는데…….
한 번 사용해 본 사람들은 그 효능에 대해 극찬을 하곤 했다.
하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집사님 때문에 눈치 보여서 말은 못 해도, 이미 공작 부인 쪽으로 넘어간 사용인들이 대부분이라더라.”
“다 손수 만든 약이라던데? 그중에는 직접 개발한 것도 있대.”
“와, 그럼 집사님께 탈모 치료제 만들어서 드리면 완전 호감 사는 거 아니야?”
“에이, 유전적인 탈모를 어떻게 치료해.”
“그 아가씨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한편,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서 두 사용인의 대화를 들으며 나갈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알테미어는 몸을 굳혔다.
그의 눈에 희망이 떠오른다.
“탈모 치료제……?”
* * *
나는 공작 부인께 물려 달라고 청했던 연구실을 덜컥 받아 버렸다.
한번 구경이나 해 보지 않겠냐고 물으시길래…….
구경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쫄래쫄래 따라갔다가 받아 버리고 말았다.
연구실 벽면을 가득 채운 각종 약초. 그리고 연금술을 위한 신식 마도구들을 보자 거부는 무슨, 입에서 자동으로 감사 인사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약초 내음 가득한 연구실에서 기지개를 쭉 켰다.
“오늘은 뭘 만들어 볼까.”
내가 공작가에서 할 일이라고는 하루 한 번 공작 부인과 티타임을 갖는 것이 전부였다.
해서, 시간이 남아돌게 된 나는 보존 마법과 함께 수북이 쌓여 있는 약초들을 보며 공작가를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려웠던 부분은 사용인들에게 신뢰를 쌓는 거였지.
처음 약을 내밀었을 때 반신반의 하던 사용인들은 이제 내가 가져온 것이면 일단 기뻐하고 봤다.
“열심히 만들어 준 보람이 있단 말이지…….”
쿡쿡 웃으며 그들의 반응을 떠올릴 때였다.
노크 소리가 울리며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테미어 집사입니다, 아가씨.”
나는 단숨에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문가로 걸어갔다.
문을 열어 마주한 그는 답지 않게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뭔가에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집사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일로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탈모 치료제를 만들어 주십시오.”
나는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탈모 치료제요?”
역시 풍성해 보이는 모발은 가발이었나……!
“그것만 만들어 주신다면 저 또한 아가씨의 편에 서겠습니다.”
“네?”
내 편에 선다니 저게 무슨 소리지.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누구랑 싸우고 있었나.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집사는 자신의 말을 풀어 설명했다.
“아가씨께서 공작가에 무사히 정착하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겠다 이겁니다.”
오…….
그것참 쓸모없네요.
이미 통과 받은 몸이라서, 오히려 공작가로 시집와 달라고 설득해야 할 건 그쪽일 텐데.
그는 간절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집사의 머리를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악의 하나 없는 순진한 얼굴로.
“하지만 집사님은 머리카락이 풍성하시잖아요?”
“이건…….”
그는 몇 번이나 머뭇거리며 입을 달싹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자신의 머리에 손을 댔다.
“사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환상입니다.”
집사의 말이 끝나자 풍성했던 그의 머리카락이 이내 꿈처럼 민둥산으로 변모했다.
어어엇…….
나는 조금 숙연해졌다.
그의 머리에는 정말 단 한 가닥의 머리카락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은커녕 그 흔적조차 없었으니 말은 다 하지 않았는가.
어쩐지.
가발이었다면 예전에 식당에서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했을 때, 자신의 것이 아닌지 의심 정도는 했을 터였다.
하지만 애초에 빠질 머리카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럼 자신 것이 아님을 확신하고 주방장을 소환할 만했지.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자 내 침묵을 오해한 집사가 초조한 얼굴로 물어왔다.
“탈모 치료제가 불가능하다면 완화라도 어떻게……!”
나는 그런 집사를 보며 태연히 입을 열었다.
“헤어스타일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유명한 헤어 디자이너에게 스타일링 받으셨나요?”
집사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지금 뭐라고 했……!”
“아, 맞다. 안 그래도 사용인들에게 좋은 말 많이 전해 들었어요. 집사님께서는 정말 ‘모’난 게 하나도 없으시다고…….”
노골적으로 그의 머리에 시선을 옮긴 나는, 돌연 고개를 휙 돌리며 맨눈으로 태양을 바라보기라도 한 듯 눈을 잔뜩 찡그렸다.
“아앗, 내 눈!”
그러고는 가슴께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후……. 역시 공작님께 직접 능력을 인정받으신 분답네요. 집사님이 너무 반짝반짝 눈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악마와 같은 웃음을 지어내었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집사.
공작 부인의 시녀에게 차마 대놓고 손을 올리지는 못할 텐데.
게다가 치료제를 만드는 건 내 손에 달렸으니까 더욱.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하지 그러셨어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줄 알고.
멍청하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