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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14)화 (114/161)

114화

“아버지.”

공작의 무감정한 눈이 카르시온에게로 향했다.

실비아나 리엔이 앞에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표정이었다.

하지만 카르시온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해?”

“리엔은 좀 괜찮은가.”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물론 리엔은 침대에 잘 눕혀 주고 왔어.”

“다행이군. 설마 허튼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내가 짐승이야?”

공작의 얼굴에 무언의 긍정이 떠올랐다.

“……망할 아버지.”

작게 뇌까린 그는 방금까지 제 품에서 펑펑 울던 리엔을 회상했다.

그녀는 한참을 울다가 체력을 모두 소모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두 부자는 그럴 때만은 한없이 서툴러서, 리엔을 어떻게 달래 줘야 할지 몰랐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리엔이 다 울 때까지 품을 빌려주는 것뿐.

그런 서투른 위로가 효과 있었던 걸까.

리엔은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리며 그동안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전부라고 하기에는 걸리는 점이 있었지만.

카르시온의 눈매가 좁혀진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공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였으면 가문끼리의 싸움이 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내 생각도 그래. 스렉인가 렉스인가 뭔가가 리엔을 좋아한답시고 아주 개지x을 떨었나 봐.”

리엔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

렉스 베고니아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이모의 가문인 아르메리아 백작가와 베고니아 공작가 사이에 연관된 것이 많아서, 그동안 그를 단호하게 끊어 내지 못했다는 것.

또한 베고니아와 리시안셔스.

두 공작가 사이에 분란을 만들기 싫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려고 했다는 것.

하지만 카르시온은 리엔의 말에서 모순을 느꼈다.

리엔은 백작가의 사람들을 좋아했다.

들어 보니 백작 부부를 거의 부모님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백작가의 적자인 에르한은 모르겠으나, 사촌 동생인 루카와는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

빌어먹을 볼 뽀뽀까지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말이다.

때문에,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렉스 베고니아를 쳐내지 못한 부분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리엔이 백작가의 사람들을 두고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을 했다는 게 말이 안 돼.”

애초에 베고니아 공작가에서 백작가에 보복을 할까 두려워 그를 쳐내지 못하고 있었던 거라면, 도망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게 맞지 않나.

카르시온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아니면……

사랑하는 백작가 사람들을 두고 홀로 도망칠 만큼 렉스 베고니아가 끔찍하다든지.

“아, 그러고 보니 리엔이 전에 누군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 소름 끼칠 것 같다고 한 적 있어.”

“감시?”

“이것도 그 새끼와 관련된 걸까?”

……저건 비단 리엔뿐만 아니라 누구나 저렇게 생각할 터인데.

공작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말이 어떻게 나오게 됐지?”

“옛날에 내가 리엔의 뒤를 쫓으려다가 걸려서.”

카르시온의 말을 들은 공작은 얼굴을 확 구겼다.

“내 아들이지만 역겹군.”

“엄마 닮은 건데.”

“……머리카락 색 빼고는 하나도 안 닮았다.”

“흐응.”

카르시온은 느른히 눈을 접어 올렸다.

“오랜만에 시체 치울 일이 생긴 것 같지, 아버지?”

공작은 엊그제 자신이 죽인 마법사 몇을 생각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오랜만이군.”

카르시온이 산책이라도 제안하듯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일단 리엔이 직접 처리하고 싶어 할 수도 있으니, 차근차근 숨통부터 조여 놓자고.”

“당분간 일이 늘겠군.”

“엄살은. 어머니랑 각방인 김에 잘 시간 줄여서 일하면 되잖아?”

“그게 무슨 소리지? 리엔의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 됐다. 당장 내일부터는 각방이고 뭐고 없어.”

“공처가.”

“…….”

공작은 먼 훗날을 기약하며 카르시온의 말을 넘겼다.

장담하건대, 카르시온은 자신보다 더한 공처가가 되리라.

* * *

나는 리시안셔스 공작가를, 카르시온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

이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의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두 부자에게 렉스 베고니아, 에르한 사이에 있었던 일의 전부를 말하지 못한 것은…….

내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탓이었다.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사람들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게 충분히 믿음을 보여주었고,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의 일을 끄집어내는 것은 내게 있어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오랜 시간 숨겨 온 사실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처절하고 끔찍했던 기억.

렉스 베고니아.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이렇게 괴로운데, 그때의 일을 어떻게 준비 없이 술술 읊을 수 있을까.

녹음 펜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트라우마에 손에 덜덜 떨려 오는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쉬이.

하지만 이들을 믿고 의지하기로 했으니, 마음을 잡는 건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어차피 자신은 ‘반려의 인’이라는마법에 의해 도망가지 못하는 신세였다.

전과 달리 시간은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그저…….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행복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가슴께를 슬쩍 슬어봤다.

“이렇게 보면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지…….”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집중했다. 하지만 말끔하기만 한 살갗에, 이내 찾기를 포기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마법진이 피부 위에 남지 않는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다 문득 한스로부터 온 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편지를 열어 읽어 나갔다.

<아르메리아 백작가의 장남 에르한 영식에게서 연락이 왔어. 돈이 급하게 필요한 것 같던데…….

돈을 빌려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너와 가족이라는 걸 지나치게 강조하고 네 이름을 파는 게 조금 이상해서.

너한테 먼저 연락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근데 이 영식은 네가 어지간한 귀족들보다 돈이 많다는 걸 모르는 것 같던데?

뭐, 너는 네가 개발자라는 게 알려지는 걸 싫어했으니까 사촌에게 말 안 한 것도 이해는 해.

어떻게 할까? 도와 드려?>

……아. 시작됐구나.

렉스 베고니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게 틀림없었다.

내가 아레나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백작가로 돌아오지 않으니 보란 듯 에르한을 건드린 거다.

내가 리시안셔스 공작가에 시녀로 들어오게 됐다는 것은, 친한 친구들에게만 알렸다.

하지만 이 사실을 렉스 베고니아가 아는 건 시간문제일 테지.

에르한은 내가 한스와 친분이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아냈는지.

어이없었다.

에르한, 이제는 내 친구한테까지 손을 벌리려고 하는구나.

하지만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또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에르한을 건드려 주면 나야 고맙지. 그게 금전적인 부분에서라면 더욱.”

나는 깃펜을 잡아 망설임 없이 편지를 적어 나갔다.

<한스,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 * *

나는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반복하는 찻잔을 고개를 휙휙 돌려가며 쫓았다.

한 번은 카르시온에 손에 들렸다가 또 한 번은 공작 부인 손에 들리기를 반복했다.

저 모든 행위가 물리적인 행동이 아닌 마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공작 부인이 그린 듯한 웃음을 지으며 카르시온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포기하지, 아들?”

“어머니야말로 슬슬 마력 딸리실 텐데 그만하시죠.”

“호호, 마력이 딸리기는. 이대로 몇 시간은 너끈하단다.”

그에 카르시온이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그러모았다.

“저런. 고작 몇 시간이라니 어머니도 많이 죽으셨군요.”

“지금 뭐라고 했는지 다시 한번 말해 보련?”

이러다 진짜 싸움 나겠네.

나는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러자 두 모자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이렇게 하죠. 공평하게 제가 차를 타는 거로.”

“안 돼. 감히 네 손에 물을 묻히라고?”

“안 된다. 이건 양보할 수 없는 일이야.”

왜죠. 따지고 보면 차를 타는 건 시녀인 제 일인데요.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랑받는 건 좋지만 이건 조금 과하다.

그렇다. 지금 두 모자는 서로 내게 차를 타 주겠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공작 부인이 마법으로 다시금 찻잔을 앗아 오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리엔의 시간을 산 사람은 나란다, 아들.”

“리엔의 귀한 시간을 돈으로 샀다니 표현이 조금 그렇네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우리의 오붓한 티타임 시간에 불청객인 너를 쫓아내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히 생각하렴.”

“쫓아내는 것과 차를 타 주는 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만!”

나는 눈앞에서 휙휙 이동하는 찻잔을 잡아챘다.

“오늘은 공작 부인께서, 내일은 카르시온이 차를 타 주는 거로 합의 보면 안 될까요.”

내 의견에, 드디어 두 모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구나.”

“저도 이번에는 양보하죠.”

극적 타협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사이 물이 식었구나.”

공작 부인은 하녀에게 물을 다시 끓여 오라는 명을 내렸다.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으로 금방 끓일 수 있지 않나요?”

“어머, 그런 사소한 것까지 전부 마법을 쓸 필요는 없잖니. 그리고 가끔은 아날로그 방식을 쓰는 것도 운치 있고 좋단다.”

……고작 찻잔 쟁탈전에 그렇게 펑펑 마법을 쓰셔 놓고.

사실 말동무 시녀라고 해도 나처럼 티타임 시간에만 함께하는 경우는 없었다.

공작 부인의 옆을 지키고 서서 지루하시지 않도록 말을 꺼내고, 틈틈이 잔시중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정작 말만 시녀일 뿐, 귀한 손님 대접을 받고 있었으니…….

이 생활이 싫은 건 아니었다.

덕분에 하루 대부분을 약초와 함께 보낼 수 있었으니까.

리시안셔스에 남아 카르시온과 잘해 보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거리낄 것 없었다.

나는 공작 부부의 사랑받는 며느리가 될 것이고, 카르시온의 아내가 될 터였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할 일은…….

카르시온과 진도를 빼는 것뿐.

끝까지 나간 지는 오래였지만, 내가 말하는 진도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카르시온과 제어 마법 없이 접촉하는 게 포인트.

조금씩 스킨십을 늘려 가다가 나중에는 마법 없이 그와 입술을 맞추는 게 목표였다.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할 텐데, 언제까지고 제어 마법에 의존해 스킨십 할 수는 없으니까.

한번 마음먹은 이상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참을 필요도 없고.

나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내며 입을 열었다.

“공작 부인, 카온. 긴히 할 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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