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할 말이 있다는 말에 공작 부인과 카르시온의 시선이 오롯이 내게 닿았다.
진지하게 할 말이 있었는데.
두 쌍의 순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말을 하려던 것도 잊고 그만 푸스스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할 말이 있다던 내가 웃고만 있자 두 모자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랑스러움도 유전될 수 있나?
그렇다면 카르시온은 공작 부인을 빼닮은 게 틀림없었다.
이 평화로움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리고 저 사랑스러운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이러려고 부른 게 아니었는데. 두 사람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내 솔직한 발언에 두 사람이 확 얼굴을 붉혔다.
“어머, 얘도 참…….”
“……내가 오늘 생일이었나.”
나는 그 반응을 즐겁게 감상하며 본론을 꺼냈다.
“아르메리아 백작가의 장남인 에르한이 최근에 사업을 거하게 말아먹었다는 건 들으셨죠?”
고위 귀족일수록 정보가 빠르니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손을 벌리고 있다는 것도요.”
에르한이 내 사촌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공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기대감이 서린 눈빛이었다.
“그 얘기를 꺼낸다는 건 혹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아뇨, 이 일에 손을 떼 주셨으면 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내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나 몰래 도움을 줬을 사람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을 들은 두 모자가 흠칫 떨었다.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리시안셔스에서 도움을 주지 않아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요.”
공작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며 뒷말을 흐렸다.
“하지만 사돈댁이…….”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사돈이라는 말 때문일까, 기분이 묘하게 달떴다.
순간 장난기가 올라왔다. 공작 부인을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다.
“어머님, 저는 아르메리아 백작가를 부양할 능력이 충분히 있어요.”
“……어머님?”
어머님이라는 호칭에 그녀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랗게 뜨였다.
놀란 건 카르시온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입을 벌리고는 나를 쳐다봤다.
“진통제, 마나 이완제, 땀 억제제, 그 외 한스네 상단에서 판매하고 있는 약 다수.”
나는 다소 거만해 보이도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전부 제가 만든 거예요. 돈, 충분히 있어요.”
그러고는 공작 부인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는 숨기지 않고 바로 달려와 부탁드릴게요. 그때 도움을 청하면 절 외면하지 않아 주실 거죠?”
그녀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냈다.
“감사해요.”
저 말은 상황을 모면하려 지어낸 거짓이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홀로 감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내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면 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예정이었다.
물론 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말은 달라진다.
직접 하는 복수가 더 짜릿한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에르한은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머저리였다.
혼자 상대해 보다가 안 되면…….
우리 멋진 어머님 소환하지 뭐.
어머님보다는 조금 덜 멋있지만 귀여움만은 최강인 공작님도 있었고, 그런 두 분을 빼닮은 카르시온도 있었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얼음이 되어 버린 이를 깨웠다.
“카온, 너도.”
“……어?”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한 그가 눈을 껌뻑였다.
“고맙다고.”
뭐 하나 콕 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한창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을 때였다.
다도실 안으로 다소 앳되어 보이는 하녀가 들어오며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공작 부인이 다시 물을 끓여 오라 명령한 것이었다.
금방 물러갈 줄 알았던 하녀는 어쩐 일인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가 긴장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정말로 약속 지켜 주실 건가요?”
아.
저 말을 듣자, 하녀가 왜 나를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상황이 재미있게 흘러가네…….
나는 하녀에게만 들리도록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그럼, 누누이 말했잖아. 언니 돈 많다고. 자 어서 말해 봐. 누가 너에게 어떤 짓을 사주했지?”
하녀가 공작 부인과 카르시온의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으며 고했다.
“알테미어 집사님께서 아가씨께 실수인 척 뜨거운 물을 부으라고 하셨어요.”
내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집사님, 선 한 번 제대로 넘으셨네요.
하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공작 부인과 카르시온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나는 알테미어 집사와 완전히 틀어진 이후, 완전히 내 편에 선 사용인들에게 부탁했다.
만약 알테미어 집사가 내게 무언가를 하라 사주한다면, 즉시 나에게 말해 달라고.
그가 얼마를 주며 사주하든 그 열 배로 보상해 주겠다고.
만약 내게 사실을 고했다는 이유로 알테미어 집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십 년 치 월급을 일괄 지급해 주겠다고도.
이건 일종의 안전장치와도 같은 것이었다.
“용기 내 줬네, 고마워. 보답은 확실히 해 줄게.”
허술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안전장치였는데.
알테미어 집사를 보며 눈치 없다, 멍청하다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이런 거에 걸릴 줄은 몰랐다.
저런 눈치로 어떻게 총집사장까지 갔는지 의문이었다.
공작님께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더니…….
그 능력이 겉보기에만 그럴듯해 보이는 기계같은 움직임이나 밑 사람을 갈구는 능력이었나 보다.
아니면 공작님이 심심해서 대충 아무나를 올려놨다든지.
공작 부인이 흉흉한 기세로 하녀에게 물었다.
“집사가 리엔에게 뜨거운 물을 부으라 명령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이때다 싶어 씁쓸한 표정을 지어 내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러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확인 사살을 해 주었다.
“집사님은 저런 끔찍한 짓을 할 정도로 제가 싫으신가 봐요…….”
처음 공작가에 왔을 때 집사가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냥 두었다.
어차피 이곳을 금방 떠날 거라는 생각과 평민이라는 내 신분을 고려한 결과였다.
그냥 조용히 말싸움 수준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지 않기로 했고, 집사의 이번 행동은 명백히 선을 넘었다.
하녀가 정말 내게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면 크게 화상을 입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집사님. 당신은 그 알량한 지위를 이용해, 사용인을 시켜 날 해하려 했죠.
그럼 저는 이 집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소환하고 제 턴을 종료할게요.
부디 제 공격에서 살아남으시길.
가련하게 고개를 숙이고 얼마나 지났을까, 조용한 주변에 의문을 느꼈다.
왜 둘 다 아무런 반응이 없지?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공작 부인의 고조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온, 당장 레온을 불러와라.”
어찌나 감정 없는 음색이었는지 듣는 내가 다 소름 끼칠 정도였다.
공작님의 풀 네임이 레오니안 리시안셔스였으니, 레온이라는 이름은 공작님의 애칭일 것이다.
나는 조용히 입매를 끌어 올렸다.
집사, 넌 x됐어.
* * *
평소에는 사용인들이 잘 왕래하지 않는 중앙 홀.
그곳에는 지금, 리시안셔스 공작가에 속한 사용인 전체가 모여 있었다.
공작님의 소집 명령이 떨어진 지 한 시간 째.
사용인들은 그동안 영문도 모른 채 급하게 소집되어 식은땀을 흘리며 달달 떨고 있었다.
흉흉한 기세의 공작님과 그것보다 더 험악한 기세의 공작 부인.
화룡점정으로 그린 듯한 웃음을 짓고 있는 도련님까지.
누가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그야말로 죽음의 조합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 사용인들을 소집한 후, 공작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계속 좌중을 응시했다는 것.
“얼마 전에 공작가에 들어온 아이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겠지.”
무려 한 시간 동안 침묵하던 공작이 꺼낸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아니, 지금 이 살벌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가장 가능성 있던 주제였을지도 몰랐다.
공작 부부가 ‘리엔’이라는 아가씨 때문에 크게 싸운 후 각방을 쓰고 있다는 건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뭔가 착각하는 자들이 많은 것 같아 오늘은 공작가에서 그 아이의 위치를 알려 주고자 한다.”
공작의 낮은 저음이 중앙 홀을 울렸다.
크지 않은 음성이었지만, 또렷하여 듣지 못한 자는 없었다.
“그 전에 먼저 묻지. 평민이 너희 위에 군림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공작의 말을 들은 사용인들은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완전히 쳐내려고 하시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여기서 공작의 편을 든다면 공작 부인과 도련님의 미움을 살 터다.
반대로 공작 부인의 편을 든다면 공작님의 미움을 사게 되겠지.
여기서는 중립을 지키는 게 최선이었다.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살벌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알테미어 집사였다.
“그런 되먹지 못한 평민을 누가 섬기고 싶어 하겠습니까.”
공작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에게로 닿았다.
“그렇군.”
알테미어 집사는 공작의 말을 끝으로 중앙 홀에서 모습을 감췄다.
아무런 예고도,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불만 있는 자, 또 있나.”
사용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집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곳에 모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공작저 지하에 있다는 고문실에 갔을 수도 있고, 마물이 가득한 산 중앙에 떨어졌을 수도,
어쩌면 이미 명을 달리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공작님은 아가씨를 싫어하시는 게 아니었나?
사랑하는 공작 부인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각방을 감행하면서까지 아가씨를 며느리로 들이는 것을 반대했을 만큼.
그뿐인가? 아가씨를 따로 불러 무릎 꿇리고, 손목을 분질러 놓기도 했잖은가.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공작님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고?
사용인들이 혼란함에 머리를 빠르게 굴리고 있을 때였다.
조용한 홀을 쭉 둘러보던 공작은 이내 흡족한 목소리를 냈다.
“아둔한 자들이 많지 않아 다행이군.”
공작은 사용인들 사이를 걸어가 누군가의 앞에 섰다.
없어진 단 알테미어와 비슷한 세월 동안 리시안셔스의 집사직을 맡아 온 사내였다.
몇 년 전 단이 알테미어라는 성을 얻고 총집사장이 된 후에는 그의 명령을 따르는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오늘부로 총집사장은 너다.”
공작의 발언에 장내가 술렁였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또한 너에게 알테미어라는 성과 자작이라는 지위를 내리지.”
“저, 전 알테미어 자작님은…….”
“그게 누구지?”
오늘부로 알테미어라는 성을 갖게 된 사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전 알테미어 자작만큼 사용인들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지는 않지만, 눈치 있는 자였다.
전 알테미어 총집사장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새로운 총집사장과 알테미어 자작을 세우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분 남짓.
줄곧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던 공작이 이번에는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좌중에 선언했다.
“리엔은 리시안셔스의 성을 이을 아이로서, 장차 공작 부인이 될 신분이니 귀히 대하도록 하라.”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섬겨야 할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특별히 이 부분에 대해 불만이 있는 자의 의견은 언제든 들어주도록 하지.”
사용인들의 귀에는 공작의 말이, 전 알테미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라는 뜻으로 들려왔다.
“그럼 이만 소집을 해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