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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19)화 (119/161)

119화

“리엔 양……?”

루가 이상하다는 듯 내 이름을 불러왔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기는커녕 눈조차 마주할 수 없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이 반복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 몸은 야속하게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제발…….

움직이란 말이야. 이 쓸모없는 몸뚱어리, 제발 움직여.

마른침을 삼키던 나는 문득 내 심장에 새겨져 있는 반려의 인을 떠올렸다.

기절한 카르시온이 과연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지만 몸을 가눌 수조차 없는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를 부르는 것 뿐이었다.

나는 마나를 끌어 올리며 덜덜 떨리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그렇게 힘껏 카르시온의 이름을 부르려 할 때였다.

“카르……!”

누군가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고니아 공작가의 로엘 베고니아 님 드십니다.”

이름을 들은 나는 한동안 사고가 정지했다.

……로엘 베고니아?

렉스 베고니아가 아니라고?

고개가 연회장 입구 쪽으로 뻣뻣하게 돌아갔다.

연회장에 들어선 이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렉스 베고니아와 달랐다.

은발인 그와 달리, 로엘 베고니아라는 사내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렉스 베고니아의 수많은 형제자매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그래.

시종은 베고니아 가문에서 찾아왔다고 했지, 찾아온 이가 렉스 베고니아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공작인 그가 찾아왔더라면 베고니아 가문의 사람이 아닌, 베고니아 공작이 왔노라 알렸었겠지.

그제야 숨이 트였다.

잠시간 숨 쉬는 것을 잊었기 때문일까. 머리가 띵했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빠져 몸이 휘청거렸다.

루가 놀라며 그런 나를 부축했다.

“리엔 양,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균형을 잃었네요.”

“그런 것치고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어제 잠을 설쳐서.”

로엘 베고니아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정확히는 연회의 주인공인 루에게.

지팡이를 짚고 걷는 모습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내가 로엘에게 신경이 쏠린 사이, 루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내게 제안했다.

“리엔 양.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이제 막 왔는걸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루가 미간을 좁히며 뭐라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로엘이 정중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루 아나나스 후작님. 로엘 베고니아입니다.”

“전 베고니아 공작님의 삼남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로엘.”

로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저를 알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

“출중한 검술 실력으로 유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실력이 출중하다니 얼굴 들기가 민망합니다. 항상 렉스 형님과 비교 대상이 되곤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로엘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스쳤다.

“그보다 초대장도 없이 늦게 와, 제가 분위기를 망친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바쁘신 와중에 이곳으로 걸음 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를 상대하던 루는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로엘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습니까? 제 옆에 있는 아가씨와 아직 대화를 마무리 짓지 못해서.”

“아. 제가 두 분의 대화를 방해했군요. 얼마든지요.”

루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리엔 양.”

그러자 이름을 불린 내가 아닌 로엘이 몸을 움찔했다. 사뭇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루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돌아가지 않으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잠시 휴게실에서 안정이라도 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무어라 대답할 새 없이 루가 시종을 불러 나를 휴게실로 안내하라 명했다.

그의 단호한 태도가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걱정할 만한 모습을 보였던 건 사실이기에 얌전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둘 사이의 대화를 들었다. 형식적인 인사와 선물이 오간다.

그들과 멀어질수록 목소리가 작아져 들리지 않았다.

렉스 베고니아 대신 그가 온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렉스 베고니아는 분명 내가 아카데미에서 친하게 지냈던 이들이 누군지 꿰고 있을 것이다.

학술제가 열리면 매년 아카데미를 방문했던 그였다.

내가 저를 피해 꼭꼭 숨어 다닐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번에도 그는 허탕을 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 오려고 했겠지.

‘약속할게. 네가 연회장에서 그를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카르시온을 떠올리자 놀라울 정도로 심장 박동이 안정되었다.

나와의 약속을 지켜 준 걸까.

하긴, 내가 이곳에 걱정 없이 올 수 있었던 이유도 카르시온을 믿었기 때문 아니던가.

분명 렉스 베고니아가 오지 못하도록 카르시온이 무언가 일을 꾸민 것이 틀림없었다.

여러 생각을 하며 연회장을 나서려던 찰나, 심각한 표정의 한스와 제인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얼굴에 저 아래로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소 회복되었다.

심각한 표정이라니, 사랑싸움이라도 하는 걸까.

나는 시종을 돌려보내고는 둘에게 다가갔다.

“한스, 제인.”

“어라, 리엔?”

“리엔! 대체 언제 온 거야?”

둘은 금방 표정을 풀고는 나를 반겼다. 나는 입가에 살짝 웃음을 걸쳤다.

“온 지 얼마 안 됐어.”

제인이 홀로 있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 듯 주변을 살폈다.

피오르도 그렇고 이제는 다들 카르시온과 세트 취급이네.

“카온은 못 왔어.”

“또 네 얼굴을 보고 기절했구나? 아니면 코피를 잔뜩 흘렸다든지.”

“아니야. 다행히 얼굴을 보고 쓰러지지는 않더라고.”

“응? 그럼 왜 안 왔어? 피오르 네 형의 계승식 연회에 귀찮아서 왔다고 하면 얼추 이해되는데……. 널 따라오지 않은 건 믿을 수 없는데.”

“날 보고 얼굴 붉히는 게 귀여워 보여서 충동적으로 키스했거든.”

“……뭐!?”

한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을 쏟아 냈다.

“둘이 언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설마, 아무 사이도 아닌데 키스를 갈긴다고? 안 돼! 이 아비는 허락 못 한다!”

“난 너 같은 아버지를 둔 기억이 없는데.”

그 와중에 제인은 깔깔 웃으며 내게 엄지를 치켜 올려 주었다.

“화끈하네! 카르시온 님이 못 오실 만했어.”

아. 그러고 보니 제인에게만 편지로 이제 떠나지 않을 거라고 알려줬었나.

이미 카르시온과 끝까지 간 것을 모르는 한스라면 키스라는 소리에 놀랄 만도 했다.

나는 제인이 시간 날 때 알려 주겠지라는 편한 생각을 하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보다 아까 너희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았던 거야?”

싸웠다기에는 분위기가 썩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제인의 부티크도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다고 했고. 한스네 상단도 문제가 없는 거로 알고 있었다.

질문에 답해 준 것은 제인이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만났네. 리엔, 내가 소문에 빠른 건 알고 있지?”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정보를 물어오는지는 몰라도 제인은 인맥이 넓은 피오르보다도 더 소문에 빨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녀가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된다는 듯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아바스칸투스에서 발병한 전염병이 라그라스에서도 나타난 모양이야. 아직은 소문이 돌지 않아 조용하지만, 며칠 내 제국이 시끄러워질 것 같아.”

이루 말할 수 없이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아바스칸투스에서 그렇게 강경 대응을 했는데 몇 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라그라스까지 범람하다니.

“이렇게 쉬쉬할 게 아니라 널리 알려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거 아니야?”

“확실한 정보가 아니라서 그래. 예민한 사항인 만큼 거짓 소문이나 기사는 자칫 혼란을 빚을 수 있으니까.”

“환자가 어느 지역에서 나온 건지는 알고 있어?”

제인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그곳 주변에는 가지 말라고 말하려고 이 확실치도 않은 이야기를 꺼낸 거야.”

그녀가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아레나 아카데미. 그곳 주변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

* * *

나는 테라스에서 멍하니 와인을 홀짝였다.

무수한 생각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전염병이 라그라스 전역에 퍼지면 어쩌지라는 생각과 왜 하필 그 시작지가 아레나 아카데미인 건지.

나는 이 사태에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약을 만들어야 하는지.

하지만 전염병인 만큼 섣불리 나설 수는 없었다.

나도 내 목숨은 소중했으니까.

아직 확실하지 않은 소문이라고 했으니, 부디 거짓된 소식이기만을 바라야겠지.

그때였다. 테라스에 쳐진 커튼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엘 베고니아입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리엔 양.”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가 렉스 베고니아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같은 베고니아라는 성을 달고 있어서 그럴까.

조금 거북한 느낌이었다.

아니, 실은 굉장히 거북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드레스를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허벅지 중간 즈음에 찬 가죽 케이스를 열었다.

그곳에는 독침이 자리하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해놓는 게 좋겠지.

음. 근데 이거 생각보다 효율성이 떨어지네.

나름 유사시에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치마를 걷어 올린 후에야 쓸 수 있다니.

카르시온이 본다면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거나 내가 침을 꺼내는 장면을 본 사람들의 눈알을 전부 뽑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카르시온도 귀여워 보일 것 같은 건 중증일까.

나는 드레스를 내려 정돈한 후 독침을 손가락 사이에 숨기고 그를 불렀다.

몇 년 사이 나는 이 독침에 완벽히 내성을 기른 상태였다.

손가락을 잘못 움직여 실수로라도 찔릴까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로엘이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은 채였다. 나는 시선을 올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렉스 베고니아와 똑같은 색의 잿빛 눈동자가 나를 담는다.

“용건이 뭐죠?”

나도 모르게 말이 날카롭게 튀어 나갔다.

로엘은 그런 나를 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용건이 뭔지 말씀하시라고요.”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조용히 지팡이를 내려놓고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눈이 차갑게 식어 내려갔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또한 내 차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형님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무엇으로도 지난 과거를 보상해 드릴 수 없다는 것은 압니다.”

“당신이 뭘 알아.”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네가 뭔데 나를 이해하듯 말해.

감히.

“차라리 비웃어. 내가 렉스 베고니아에게 휘둘리는 걸 보고 웃음이나 흘리라고. 그깟 알량한 동정심으로 이해한 척하지 말고.”

“리엔 양. 제가 왜 다리를 저는지 알고 계십니까?”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한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로엘이 줄곧 바닥에 닿아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당장 이 나라에서 도망치세요. 형님은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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