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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20)화 (120/161)

120화

들으나 마나 한 조언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이곳에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데.

“아니요. 저는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형님이 리엔 양에게 얼마나 미쳐 있는지 아신다면 그런 말 못 하실 겁니다.”

내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당사자인 제가 그걸 모를 것 같나요?”

“리엔 양은 모릅니다. 렉스 형님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어요. 조만간 무슨 짓을 쓰든 당신을 찾아갈 겁니다.”

한계라…….

한계에 다다른 김에 포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리엔 양이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4년간 형님의 집착은 점점 극으로 치달았습니다.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가십니까?”

“저를 공작 부인의 자리에 올리는 것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제 부모를 죽일 만큼.”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다는 듯 그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또한 로엘 님의 한쪽 다리를 그렇게 만든 건 렉스 베고니아에게 특별한 일이 아닐 만큼 단단히 미쳤다는 건 알고 있죠.”

그는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제 다리는 리엔 양과 관련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 제가 검술에 두각을 드러낼 때 경고의 의미로 갖게 된 장애일 뿐.”

화려하게 장식된 로엘의 지팡이에 시선이 갔다.

그도 렉스 베고니아에게 당한 피해자였다.

나와 같은.

뭐라 입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다.

섣부른 위로와 동정이 상처가 될 거라는 것을 알기에.

“검술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제 양손도 불구가 되었겠죠.”

렉스 베고니아는 내게 손을 올릴 때 항상 힘을 조절했다.

옷 위로 드러나는 곳에 손을 대지 않았고, 멍 이상의 상흔은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실수로 상흔을 낸 날에는 몹시 안타까워하며 몇 주간은 손을 올리지 않았다.

그게 상품 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보는 듯한 태도라 역겨웠지만.

어쨌든 그가 나를 나름 아끼고는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선이 없는 듯했다.

하긴, 제 부모 또한 망설임 없이 없애버리는데 형제라고 다를까.

나는 약간 경계를 풀며 로엘의 눈을 응시했다.

렉스 베고니아와 같은 잿빛 눈동자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로엘의 눈동자는 좀 더 맑은 느낌이었다.

“저를 위해 조언해 주신 건 고마워요. 하지만 로엘 님.”

나는 들고 있던 독침을 슬쩍 테라스 밖으로 던져 버리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당신이 제게 사과를 하는 거죠? 함부로 무릎을 꿇지 마세요. 사과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에요.”

“……어찌 보면 저도 방관자지 않습니까.”

내 손을 잡고 일어난 그가 지팡이로 몸을 지탱했다.

나는 그가 균형을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질문했다.

“제게 도망치라 경고한 것도 죄책감 때문인가요?”

“……사실 리엔 양에게 했던 말은 제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로엘 님은 왜 도망치지 않았죠?”

“그럼 리엔 양은 왜 아카데미 졸업 후, 형님이 당신을 찾을 걸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었다.

“이곳에 소중한 사람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로엘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이 사람도 나처럼 정이 많은 사람이구나.

가슴 한편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보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렉스 베고니아가 왜 이곳에 오지 못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건…….”

그는 망설이듯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어젯밤 괴한의 습격을 받아 쓰러지셨습니다. 생명에 지장은 없었습니다만 당분간 거동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다치셨죠.”

카르시온이구나.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아쉽네요. 그대로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제 형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넘겼다.

“저는 분명 도망치라 경고했습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형님께서는 한계에 다다르셨습니다. 도망치지 않는다면 어떤 형태로든 형님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리엔 양. 그간 행보로 보건대 리시안셔스 공작가가 리엔 양을 지키고 있다는 건 압니다.”

……그간의 행보? 리시안셔스가 나와 관련해 무얼 했다고.

설마, 벌써 나 몰래 뭔가 하고 있었던 건가?

그의 말에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 진지한 어조로 명심하라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겁니다. 형님은 베고니아의 모든 걸 거는 한이 있더라도 리엔 양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모든 걸 걸고 하는 싸움이라…….

“아아. 저도 그 부분에서 걱정했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나는 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건 리시안셔스 공작가도 마찬가지라서요. 꽤 사랑받고 있거든요, 저.”

* * *

테라스에서 나온 리엔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바람 잘 일 없는 내 인생.”

복잡한 생각을 떨쳐 내려 들어간 테라스에서 고민을 하나 더 얹어 나올 줄은 몰랐다.

한계에 다다랐다라…….

전 베고니아 공작 부인이 그와 내가 만나지 못하도록 지시할 때부터였으니 오래되긴 했다.

“4년 그 이상인가.”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 게 말이다.

오늘은 카르시온 덕분에 무사히 넘겼으나 로엘의 말대로 그를 마주하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오한이 들며 몸이 떨렸다.

“……루의 말대로 오늘은 일찍 들어갈까.”

기절한 카르시온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지금 연회장을 나가는 것은 실례인가 아닌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리엔의 앞에 섰다.

“왜 그리 못생긴 얼굴을 하고 있어?”

피오르였다.

나는 일자로 다물렸던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툭 쳤다.

“말 참 예쁘게 한다. 잘 봐, 내 얼굴에서 못생김이 어디 있어?”

“뭐, 뭐야.”

얼굴을 불쑥 들이밀자 그가 답지 않게 몸을 뒤로 쭉 뺐다.

“부끄러워하긴.”

“네 모공 때문에 환 공포증이 도졌을 뿐이야.”

“하하, 그래서 정강이 보호대는 차고 왔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비조일까.

형의 계승식 연회에 늦어서 많이 서운했나. 어쩌지, 이만 가려고 했는데.

“피오르. 나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볼게.”

아니나 다를까 피오르가 불만스레 대꾸했다.

“늦게 온 주제에 벌써? 게다가 생각할 게 있다면서 다들 따돌리고 테라스로 들어갔으면서.”

“미안.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에 피오르의 미간이 단번에 구겨졌다.

“뭐? 야, 아프면 말을 했어야지. 아니, 그전에 연회는 왜 왔어? 침대에 박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어쩐지 안색이 죽은 생선 같더라!”

짜식, 잔뜩 툴툴거리더니 아프다니까 열심히 걱정해 주네.

리엔은 피식 웃으며 여상스레 입을 열었다.

“어후, 귀청 떨어지겠다. 환자 취급받을 만큼 아픈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씹었다.

“정확히 어디가 아픈 건데? 의원을 데려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

“됐어.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됐긴 뭐가 돼. 잔말 말고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리엔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놓아 주지 않는 피오르를 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래?”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검사를 받아보면 알겠지.”

처음 자신을 걱정해 주는 피오르에게 감동했던 리엔은 그가 조금 귀찮아졌다.

“됐다니까.”

“됐긴 뭐가 돼.”

“아오, 한 달에 한 번 오는 대자연의 부름 때문이니까 그냥 신경 끄라고 둔한 놈아!”

“뭐, 뭐?”

순식간에 피오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게 진작 놔줬으면 얼마나 좋아.

리엔은 짧게 혀를 차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비틀어 빼냈다. 그러고는 피오르를 향해 한 손을 팔랑였다.

“그럼 알아들은 거로 알고 나는 이만 갈게. 루 님에게는 다시 한번 축하드린다고 전해 줘.”

피오르는 리엔이 한스와 제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연회장을 유유히 빠져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런 피오르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루였다. 그가 피오르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이제 일어날 때도 됐지 않니, 사랑스러운 동생아.”

피오르가 붉어진 얼굴로 그의 손을 쳐냈다.

“잠든 적 없어.”

“그래, 잠든 적은 없지.”

순순히 수긍하던 루는 새삼 신기하다는 얼굴로 읊조렸다.

“바람둥이인 네가 여자애 앞에서 당황하기도 하는구나.”

“……대화 들었어?”

“애석하게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전부 들었다는 거잖아.”

피오르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젠장, 컨디션이 안 좋은 게 그것 때문일 줄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루는 어깨를 으쓱이며 덤덤히 말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생리 현상은 자연스러운 거야.”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

한참 끙끙거리는 피오르를 가만히 지켜보던 루가 나지막이 물었다.

“좋아하지?”

“……누굴.”

“리엔 양.”

피오르는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 이맛살을 구겼다.

“카르시온이 좋아하는 애야.”

“나는 카르시온 소공자가 아닌 네 감정을 물었는데.”

“내 감정이 어떻든 상관없어.”

그는 최면을 걸듯 자신의 감정은 상관없다는 말을 몇 번이고 읊조렸다.

“아쉽군. 나는 리엔 양이 너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딜 봐서?”

“아까도 보니 죽이 잘 맞던데.”

“친한 친구니까 당연하지.”

루는 그런 피오르를 빤히 바라봤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짧은 한마디였다.

“……여자 소개시켜 줄까?”

“치워.”

* * *

나는 요즘 카르시온과 매일같이 스킨십을 늘려 가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노력의 결실일까, 손을 잡는 것 정도는 그럭저럭 익숙해진 듯했다.

하지만 이거로는 모자랐다.

“빨리 이런 거 저런 거 해 보고 싶은데 말이지.”

아카데미에 있을 때 피오르의 빨간 책을 보고 배운 게 많다.

활자로만 읽고 배우면 뭐 하겠는가.

자고로 실전에 사용해 봐야 열심히 밤새워 읽은 보람이 있는 법.

아, 참고로 피오르는 내게 그 책을 공유한 적 없었다.

카르시온이 홀아비 냄새가 난다며 그의 컬렉션을 내다 버릴 때 몰래 슬쩍한 것이었다.

……가만, 스킨십 하니까 생각난 건데 나는 카르시온이랑 지금 무슨 사이지?

나는 엄지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리시안셔스 가문의 인장이 박힌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시아버지인 공작님께는 프러포즈 받은 적 있는데, 카르시온과는 이렇다 할 고백이 오간 적 없었다.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간다고……?

나는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카르시온이 내 것이라 못 박고 싶었다.

이 사람이 내 애인이다, 당당히 말하고 다니고 싶었고.

안 되겠다.

“이번에야말로 고백으로 혼쭐 내줘야지.”

반지까지 예쁘게 맞춰서.

나는 당연히 그가 받아 줄 거라는 전재를 깔고 반지의 디자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설마 거절하겠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미친.

“생각해 보니 카르시온은 나한테 사랑한다 말한 적 없잖아.”

단 한 번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나는 그와 첫날밤을 보낸 날 똑똑히 사랑한다 고백했었지.

물론 카르시온은 내게 몇 번이고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었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엄연히 달랐다.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었다.

카르시온.

너 나 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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