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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21)화 (121/161)

121화

나는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카르시온이 나에게 사랑한다 말한 적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나 행동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나를 사랑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번을 사랑한다 말한 적 없어?

다시금 분노가 치솟는다.

내가 그에게 고백하려 했던 걸 생각하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억울한 마음까지 샘솟았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를 다닐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나만 고백 타이밍을 재고 있지?

애초에 카르시온이 먼저 고백했더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이지 않은가.

어쩌면 느려 터진 진도도 우리가 이미 사귀고 있었더라면 더 진척되었을지도 모르고.

물론 고백은 안달 난 사람이 먼저 하는 거라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화가 나는 점은, 내가 2번이나 진지하게 고백을 생각하는 동안 카르시온은 뭘 했냐 이거다.

그렇게 나 없이 못 살 것처럼 굴었으면서.

“……진지한 대화가 필요하겠네.”

나는 그린 듯한 웃음을 지으며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르시온.”

팟-!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 그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참 편리한 마법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뭐 이런 사생활도 없는 마법이 다 있냐며 화가 났었는데.

반대로 나도 얼마든지 그를 부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마법진에서 성큼 걸어 나온 카르시온이 한쪽 무릎을 꿇고는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에 나는 그에게 따져 물으려던 것도 잊고 습관적으로 카르시온의 얼굴을 살폈다.

볼에 살짝 홍조가 돌았지만, 혈색이라고 우기면 못 우길 것도 없는 정도였다.

이 정도면 합격이다.

그간 틈만 나면 손을 잡으며 그가 내 스킨십에 익숙해지게 노력한 결과였다.

꼼꼼히 확인을 마치고 나서야 그와 눈을 맞췄다.

카르시온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반려의 인’을 사용해 저를 부른 게 감격스러운가 본데…….

저번에 화가 잔뜩 나서 그를 부른 후 처음으로 사용하는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성을 붙여 부르지 않기도 했고, 얼른 달려와서 보니 나는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를 부를 때 ‘카온’이 아닌, 카르시온이라고 불렀다는 것.

“무슨 일로 불렀어?”

“딱히 일이 있는 건 아니야.”

할 말은 있지만.

그러자 카르시온이 기대감이 잔뜩 서린 얼굴로 물어 왔다.

“그럼 내가 보고 싶어서?”

“응.”

굳이 따지면 보고 싶었던 것도 맞으니까.

덤덤하게 뱉은 말에 그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리엔, 그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면……!”

“싫어?”

평소였으면 제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렸을 텐데.

나와 손을 잡고 있는 바람에 그는 고개를 푹 숙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카르시온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너무 좋아……. 앞으로도 이렇게 자주 불러 줬으면 좋겠어.”

그 솔직한 모습에 푸스스 웃음이 나오고 만다.

그래, 이런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 없지.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카르시온의 머리에 내 이마를 콩 찧고는 나긋이 물었다.

“넌 내가 얼마나 좋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제발 말로 표현해 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서 손등을 보여주었다.

내 엄지에는 리시안셔스 가문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 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뭔지 설명해 봐, 카온.”

“네가 리시안셔스의 사람이라는 증거지.”

“그렇지. 그럼 내 이름에 리시안셔스라는 성이 들어갈 날도 머지않았다는 거네?”

카르시온이 만연에 웃음꽃을 가득 피웠다.

“상상만 해도 행복해.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거 뭔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많은 게 생략되었잖아.”

“응?”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순한 눈을 깜빡인다.

“잘 생각해 봐. 뭐가 이상한지 진짜 모르겠어?”

내 말에 그가 끄응 소리를 내며 열심히 눈을 굴렸다.

……이게 이렇게 오래 생각할 일이라고?

서로 마음을 확인한 후, 교제를 시작하는 게 보통의 연애 아닌가?

그리고 연애를 하다가 이 사람이다, 하는 확신이 서면 청혼 후 결혼으로 부부 사이가 되는 것이고.

하지만 나는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이미 공작가의 식구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카르시온과의 결혼은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상태인데…….

막상 나는 지금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하물며 나는 카르시온과 정략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계약 결혼도 아닌, 서로 마음이 통한 사이인데.

아 물론 아무 사이도 아닌 것 치고는 며칠 전에도 키스를 했고,

서로의 심장에 반려의 인을 새겼으며,

진도를 끝까지 나간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는 그와 공식적으로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다.

굳이 현재의 관계를 정리해 말해 보자면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친구?

젠장,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친구라고?

제자리걸음이나 다름없었었잖아.

슬쩍 카르시온을 보니 그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듯했다.

눈치 빠른 여우인 줄 알았더니 꼭 이럴 때만…….

한숨이 나왔다.

그가 쉽게 답을 도출해 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

나는 그의 손등에 쪽하고 입술을 댔다가 떨어뜨렸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카르시온이 멍하니 나를 응시한다.

“카온, 잘 들어. 나는 친구끼리 이런 거 안 해.”

“……당연히 안 되지! 쿤이나 피오르, 한스 따위랑 손잡기만 해 봐. 그날이 걔들 얼굴을 보는 마지막 날이 될 테니까.”

그가 단번에 미간을 구기며 당장 눈앞에 쿤이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너랑 나도 친구거든?

어디서부터 잘못된 점을 고쳐 줘야 할지 모르겠다.

동시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밀려들어 왔다.

급격히 피곤함이 쌓인다.

“……나가 줘.”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는 나를 보고 카르시온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초조하게 물었다.

“리엔, 어디 아픈 거야?”

“아니, 그냥 졸린 것뿐이니까 자리를 좀 비켜줄래?”

“하지만……!”

“카온. 내가 나가달라고 했지.”

번뜩이는 눈을 본 카르시온이 그제야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푹 쉬어…….”

딸깍.

그는 화려한 마법으로 등장한 것과 달리, 뒷걸음질 치며 문으로 초라하게 퇴장했다.

혼자 남게 된 나는 침대에 몸을 싣는 대신, 이모의 편지에 빠르게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

카르시온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저지른, 지극히 충동적인 작성이었다.

<이모가 그렇게 극찬을 하시니 이번에는 저도 관심이 생기네요. 날짜 잡아 주세요, 만나 볼게요.>

나는 작성을 끝낸 후 하녀에게 부탁해 바로 편지를 부쳤다.

편지가 내 손을 떠나고 나서야 조금씩 현실 감각이 깨어난다.

방금 내가 이모에게 보낸 편지는 소개팅에 나가겠다는 편지였다.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면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때는 아카데미 시절, 한창 카르시온이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 때였다.

평소와 같이 이모와 편지를 주고받던 나는 편지가 다른 날에 비해 장문인 것을 깨닫고 급히 편지를 읽어 나갔다.

백작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걱정된 탓이었다.

“그런데 편지에는 온통 내 걱정만이 쓰여 있었지…….”

몸은 괜찮은가부터 시작해서 카르시온이 강제로 제 마음을 강요하지는 않는지.

상대의 신분이 높다고 해서 기죽지 말고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하라든지.

카르시온의 무수한 소문을 듣고 내가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제국 내 일등 신랑감으로 소문이 난 렉스 베고니아와 달리, 카르시온은 지극히 좋지 않은 소문만 무성한 상태였으니까.

카르시온은 내게 정말 친절하고, 마냥 소문과 같지만은 않다고 이모께 몇 번이나 설명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때부터 이모의 편지에는 카르시온이 단골로 등장했는데…….

해서 이모가 뜯어말릴 것을 알기에, 아카데미 졸업 후 리시안셔스의 시녀로 취직했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렸다.

“백작가에 들르지 못한 건 급하게 취직했기 때문이라고 핑계 삼기도 좋았고.”

그런데 내가 리시안셔스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이모는 나를 드래곤 레어에 들어간 아이 취급을 했다.

곧 잡아먹힐 것처럼 불안해했다는 뜻이다.

막상 공작가를 집어삼키고 있는 건 난데 말이지…….

이모는 이러다 정말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좋은 남자를 소개받아 올 테니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지금까지 이모가 소개팅 상대라며 찔러 준 남성들은 하나같이 이목구비가 화려하고 이어받을 작위가 있는 꽤 건실한 귀족이었다.

“……이모가 꽤 고생하셨겠는데?”

평민인 나에게 귀족과의 소개를 잡아 준 것도 참 놀라운 일인데 외모까지 준수하다니.

렉스 베고니아와 카르시온 때문인지 이모는 내가 남자를 볼 때 완전히 얼굴과 신분만 본다고 생각한 듯했다.

조금 억울했다.

“얼굴을 보는 건 맞지만, 신분을 따지는 건 아닌데.”

나는 항상 이모의 소개를 거절해 왔다.

그러나 이모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 편지에도 만나 보지 않겠냐며 나를 은근히 찔러왔다.

“이모, 마음은 고마운데 이거 리시안셔스가 사람들한테 걸리는 날에는 큰일 나요…….”

남성의 초상화를 동봉했던 다른 날과 달리 오늘은 설명만으로 편지가 채워져 있었다.

요약하면 신분, 얼굴, 성격, 나이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는 사람이라는데…….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가 있나?

나는 이모의 편지를 책상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자리에 나가겠다고 한 이상, 내가 이모를 걱정할 군번은 아닌 것 같지만.”

그냥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흥…….

어차피 난 카르시온과 아무 사이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람.

* * *

“배고프다.”

괜히 심술이 나서 카르시온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저녁을 걸렀다.

공작님과 공작 부인이 화해하신 이후로 저녁 식사는 항상 다 같이 하곤 했기 때문이다.

뭐…… 카르시온과는 그전에도 항상 같이 저녁을 함께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주방에 가서 요깃거리라도 챙겨 올 셈이었다.

하녀를 부르기에는 너무 한밤중이라서 미안했다.

뒤늦게 먹을 것을 찾는 게 조금 창피하기도 했고.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연 나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분홍색 형체에 멈칫했다.

문 옆에서 쭈그려 앉아 있는 이는 바로…….

“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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