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카르시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날 발견한 그가 미소 짓는다.
“리엔.”
분명 밝은 웃음이었는데.
그와 눈을 마주한 나는 울컥하며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왜 여기서 청승맞게 쭈그려 앉아 있어? 나 보러 온 거면 문을 두드리든 이름을 부르든 해서 나오게 했어야지.”
“불렀어. 아까 저녁 먹을 때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녁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하자 카르시온이 직접 찾아와 문을 두드렸던 건 사실이다.
물론 나는 거절했었고.
그럼 그때부터 한밤중인 지금까지 줄곧 여기에 앉아 있었다는 거 아닌가.
게다가 내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침까지 이러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답답함에 입술을 씹고 입을 열었다.
“너는 왜 이렇게 항상 미련해?”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걱정해 주는 거야?”
나는 반쯤 씩씩거리며 답했다.
“그래, 미련한 네가 걱정돼. 걱정돼서 화가 나.”
“하지만 리엔, 내가 네 기분을 상하게 했잖아. 그 대가에 비해 이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이유는 알았고?”
“……음.”
그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돌렸다.
“바보.”
카르시온은 정말 바보다.
그리고 나는 그보다 더한 바보고.
대자연의 부름 때문에 호르몬이 날뛰어서 그런지 감정이 제멋대로 튀었다.
그래, 내가 지금 우는 건 다 호르몬 때문이다.
눈물을 보이자 카르시온이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리엔. 내가 다 잘못했어. 제발 울지마. 응?”
나는 주륵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앙칼지게 따졌다.
“내가 어떻게 화를 안 내고 배겨? 한 번도 나한테 사랑한다고 한 적 없잖아.”
“……어?”
흐려진 시야 사이로 당황한 카르시온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소리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너 나 안 사랑해? 왜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는 거야? 게다가 프러포즈도 공작님한테 먼저 받게 한 거로도 모자라서 고백이나 청혼도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고!”
“리, 리엔. 그건…….”
“왜 맨날 나만 언제 고백해야 하는지 고민 하고 있는 건데! 너는 나 안 사랑해? 내가 좋다며? 좋은데 사귀고 싶지는 않은 거야? 결혼하기는 싫어?”
나는 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서럽게 내뱉은 말도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울음이 그칠 때쯤이면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마저 카르시온은 기꺼이 받아 줄 거라는 걸 알기에, 마음을 놓고 울 수 있었다.
그를 믿고 있었으니까.
의지하고 있었으니까.
카르시온이 그런 나를 차분히 토닥였다.
“미안해. 내가 너를 불안하게 했구나.”
한참을 토닥이던 그가 상황에 맞지 않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리엔. 그거 알아?”
“……뭔데.”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었다고 했잖아.”
정확히 기억했다. 2학년 마물 사냥을 간 날이었지.
“첫눈에 반했다는 게 믿기 어려운 일인 거 알아. 진짜 반한 게 맞나 하는 의심도 생길 수밖에 없지. 하지만 큰 장점도 있다?”
카르시온이 열심히 눈물을 훔치고 있던 내 손을 떼어 냈다.
“난 처음 널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 없어.”
거짓이 섞여 있을 거라 감히 의심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너를 사랑하겠지. 아니, 죽어서도 사랑할 거야. 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던 카르시온이 눈을 휘어 접었다.
“이게 내 대답이야.”
그가 가볍게 내 이마에 입술을 맞춘다.
“사랑해.”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그를 꽉 껴안았다.
“바보야. 너무 늦었잖아.”
“지금껏 네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던 건…….”
카르시온의 목소리가 목메어 갈라져 나왔다.
“불안해서였어. 내가 너에게 가진 사랑의 크기를 알게 되면 네가 무서워할까 봐.”
긴장했는지 날 안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말대로 우린 아직 아무런 사이가 아니잖아. 그동안 너는 나를 밀어내기 바빴으니까…….”
그의 불안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고백하지 않았던 것도, 제대로 프러포즈 한 번 하지 못했던 것도. 실은 무서워서였어.”
무서웠다고.
세상 두려울 것 없어 보였던 그가, 고작 나 때문에.
“고백하는 순간, 지금까지 너와 쌓아 왔던 일들은 모두 꿈이었다는 듯 사라져 버릴까 봐. 네가 떠나갈까 봐…….”
카르시온이 힘겹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그랬어.”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내려친 듯한 충격이 강타했다.
언제나 속도 없이 내게 들이대는 줄만 알았는데.
카르시온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 잘못이었다.
그런데 사과는 이번에도 네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변명해서 미안. 어떤 이유든 널 불안하게 했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데.”
“아니야. 카온 넌 사과할 거 없어. 내가 미안해…….”
내가 널 불안하게 해서. 믿음을 주지 못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언제나 내 감정만 우선해 생각했던 것 같다.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너도 감정이 있는데.
내가 너를 밀어낼 때마다 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네가 날 좋아하는 것이니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아팠을 텐데.
중간에 상처를 받고 나를 포기했을 수도 있는 일인데.
“지금껏 버텨 줘서 고마워.”
이제 널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네가 내게 믿음을 보여 준 것처럼, 나도 노력할게.
카르시온와 마주 안은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멋쩍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아쉽네. 분위기 좋은 장소에 가서 평생 잊히지 않는 고백을 했었어야 하는데.”
“충분히 로맨틱했어.”
“……정말?”
“그리고 장소랑 분위기가 뭐가 중요해. 그런 거 하나도 상관없어. 네 얼굴이면 이미 분위기 완성이라고.”
“하하,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내 얼굴이 네 취향이라 다행이야.”
나는 조용히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사실 외모는 은발 벽안인 네 아버지가 더 취향이라고 하면 정말 큰일 나겠지.
그나저나…….
그럼 이제 이모께 나가겠다고 해 버린 소개팅은 어떻게 하지.
갑자기 등에서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는 느낌이었다.
이제 아프게 하는 일 없겠다고 마음먹은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어기게 생겼다.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구나.
그의 반응이 대충 예상이 갔지만, 비밀로 하고 나가는 건 정말 양심에 찔려서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역시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맞겠지.
나는 천천히 손에 힘을 풀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카온, 나 사실 다음 주에 소개팅 나가기로 했어.”
“그렇ㄱ…… 뭐?”
“물론 나가자마자 남자친구 있다고 거절할 거고.”
“리엔!”
카르시온이 충격으로 얼룩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있어 봐. 할 말 다 안 끝났어.”
“……여기서 뭔가 더 있다는 얘기야?”
“화를 내려면 끝까지 듣고 내도 늦지 않는다는 말이야.”
그러자 그가 입을 앙다물고 나를 응시했다.
아까 내 등을 토닥여 주던 듬직한 모습은 어디 가고 눈가에 닭똥 같은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 내며 활짝 웃었다.
“그래서 소개팅남을 쳐내기 위한 변명거리인 남자 친구가 필요한데 어때, 너 나랑 사귈래?”
* * *
카르시온과 연인 사이가 됐다.
당당히 그와 연애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좋고, 전보다 더 꿀 떨어지는 그의 눈빛도.
매일같이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것도.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힘든 것은…….
약속된 소개팅 날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집착과 질투가 심해지고 있다는 거다.
“그 남자가 잘생겼다고 넘어가는 거 아니지? 꼭 애인 있다고 말해야 해!”
“당연하지.”
“당신보다 얼굴 착하고 몸 착한 남자가 집에서 다소곳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지?”
그래도 일말의 남은 양심으로 성격이 착하다는 말은 안 하네.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어.”
하지만 이거로는 모자란다는 듯 카르시온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계속 네게 치근덕거리면 망설임 없이 고x킥을 날리는 거야.”
“그래도 귀족인데…….”
“책임은 내가 질게.”
“그래 그럼. 네 말대로 할게.”
나는 대답해 주는 것도 슬슬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간 이처럼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까마득했다.
소개팅은 아직 일주일이나 더 남았는데 어쩌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니 적당히 하라고 화낼 수도 없고.
카르시온이 걱정이 덜어지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그럼 그럼.”
“점점 대답에 성의가 없어지는 것 같아, 리엔.”
……이럴 때만 눈치 빠르지.
그가 서럽다는 듯 눈썹을 그러모은다.
“애초에 남자 친구가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네가 왜 소개팅을 나가야 하는 거냐고.”
“이미 약속을 잡아버렸는걸. 나간다고 해놓고 가지 않으면 이모 입장이 난처해질 거야.”
카르시온이 뚱한 표정을 하며 입술을 잔뜩 내밀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그의 기분을 풀 수 있을까 고민했다.
“흐음…….”
역시 빠르게 기분을 풀어 주려면 그 방법이겠지.
“카온.”
“……응.”
나는 잔뜩 내밀어진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자 카르시온이 순식간에 내게 멀어지며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찌나 놀랐는지 얼굴은 차마 붉어지지도 못했고, 그의 눈은 곧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느른히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렇게 놀라? 뽀뽀해 달라고 입술 내민 거 아니었어?”
* * *
나는 연구실에서 약초를 관찰하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카르시온 생각에 피식 웃었다.
그날 이후로 카르시온은 틈만 나면 내 앞에서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일부러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또 시무룩해져서 입술이 잔뜩 나왔다.
“이제 슬슬 나온 입술 좀 넣어 주고 올까…….”
읏차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연구실로 향했다.
놀라게 해 줄 요량으로 별다른 노크 없이 들어간 연구실 안은 아쉽게도 텅텅 비어 있었다.
“어디 잠깐 갔나 보네.”
길게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일이면 내게 먼저 알려 줬을 테니까.
카르시온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 설렁설렁 연구실 안을 구경하고 있던 나는 책상에 놓인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낙서가 잔뜩 있는 종이였다.
종이에는 나로 추정되는 귀여운 그림과 그 옆에 하트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리엔 애인’)}]
“푸핫!”
그 낙서를 보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친구라고 강조했던 걸 아직도 담아 두고 있었나 보다.
“어디 사는 리엔 애인은 참 귀엽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