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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23)화 (123/161)

123화

“소름 끼치는 새끼.”

실비아가 뇌까린 말에 집무실에 함께 있던 공작과 카르시온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렉스 베고니아가 리엔에게 보낸 편지가 벌써 수십 통이 넘어갔다.

답 없는 편지를 매일같이 보낼 때부터 미친놈이라는 짐작은 했지만…….

렉스 베고니아의 미친 행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온전치도 못한 몸을 이끌고 리엔을 만나고 싶다며 무작정 공작가를 찾아온 적 있었다.

적진의 한복판도 같은 리시안셔스에 말이다.

단단히 돌은 놈이었다.

해서, 편지는 전부 불쏘시개로 써 버리고 그가 찾아왔다는 것은 리엔이 알지 못하게 조용히 비밀에 부쳤다.

그런데 어제저녁, 또 공작가에 작은 침입자가 나타났다.

그것도 정확히 리엔의 방 쪽으로.

공작이 미간을 좁히며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사용인들을 물갈이할 때도 온 것 같군. 리시안셔스의 정보를 베고니아에 파는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이 있을 줄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어떻게 리엔의 방을 정확히 찾아갔는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은 침입자는 렉스 베고니아가 아닌, 그가 보낸 전령 새였다.

그 새는 리엔에게 편지를 전달하기 전 카르시온이 발견해 처리했다.

실비아는 한숨을 내쉬며 아들에게 물었다.

“편지에는 뭐라고 쓰여 있었지?”

“항상 그렇듯 ‘보고 싶다’라는 문구로 도배되어 있었어요.”

“이런 미친…….”

미친으로 시작한 실비아의 입에서 갖가지 상스러운 욕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공작은 그런 실비아를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리엔이 지금껏 미친놈을 상대로 버텨 온 게 대견할 정도야.”

현 베고니아 공작가는 겉으로만 멀쩡할 뿐 리시안셔스가 사람들의 뒷공작으로 인해 타격을 받고 잔뜩 휘청이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 많이 건드릴 것도 없었다.

베고니아 공작가는 이미 자식들의 오랜 권력 다툼으로 곳곳에 균열이 가 있었다.

거기에 갑작스러운 공작 부부의 죽음과 렉스 베고니아가 무력으로 일궈낸 완전하지 않은 권력까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던 것을 톡톡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문제는 공작가가 망해 가고 있음에도 렉스 베고니아가 리엔에게 구애하고 있다는 것.

실비아의 표정이 뭐 씹은 듯 일그러졌다.

“좀 더 압박을 가해야 하나…….”

“지금 상태만 계속 유지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리엔이 때릴 정도는 남겨 둬야 복수할 맛이 나죠.”

“나도 지금을 유지하자는 카르시온의 말에 동의한다. 권력을 쥐기 위해 패륜도 스스럼없이 저지른 작자이니 정말 위급할 때는 리엔을 포기하겠지.”

하지만 두 부자의 말에도 실비아의 표정은 도통 펴지질 못했다.

“글쎄요. 제가 아카데미 시절에 비슷한 미친놈에게 집착을 당해 봐서 아는데…….”

과거의 이야기에 공작이 몸을 크게 움찔했다.

그런 공작을 여유롭게 훑던 그녀는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부류는 쉽게 포기하지 않거든요.”

* * *

다이닝 룸에 들어선 리엔은 느릿하게 눈을 껌뻑였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윗사람보다 늦게 착석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리엔은 일찍 다이닝 룸에 오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공작 부인은 물론이고 바쁜 공작님까지 이른 시간에 나와 있었다.

두 공작 부부가 리엔을 반겼다.

“어서 오렴.”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 없다고 해도 네가 말을 듣지 않으니 우리가 일찍 나오는 수밖에.”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리엔은 두 공작 부부의 따뜻한 말에 작게 웃으며 자리로 향했다.

그러자 카르시온은 당연하다는 듯 의자를 빼, 리엔이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누가 봐도 사랑받는 며느리 그 자체였다.

리엔 또한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얼굴에 그 행복을 잔뜩 드러냈을 터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다이닝 룸을 들어올 때부터 코를 은근히 찌르는 냄새에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언가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다른 음식들에 의해 가려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리엔의 미묘한 표정을 기민하게 눈치챈 카르시온이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리엔? 표정이 좋지 않아.”

그에 실비아 또한 말을 거들었다.

“혹,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아뇨. 조금 피곤해서요.”

“저런, 연구도 좋지만 쉬면서 해야지. 그러다 건강 해칠라.”

“잘 쉬고는 있는데요. 요즘 부쩍 잠이 많아져서…….”

리엔의 변명 아닌 변명에 리시안셔스 가의 사람들이 주르륵 해결책을 꺼내 놓았다.

“그럼 쉬는 시간을 더 늘려야겠구나.”

“당분간 연구실 출입을 막아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래, 리엔. 며칠 연구는 접어 두고 나랑 데이트 가는 건 어때?”

그에 리엔은 하하 웃으며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이 정말 연구실 출입을 막으면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굉장히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옛날, 아칸더스와 함께 만들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그 약.

부모님이 걸리셨던 병의 치료제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까닭이다.

사실 병의 유일한 환자였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치료제 개발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로 남아 버렸다.

병에 걸린 사람이 없으니, 관련 연구를 하기도 어려웠고…….

어찌어찌 치료제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리엔은 그때 기록해 놓았던 것을 토대로 여러 가지를 만들어 보고 있었다.

이성은 이번 전염병이 부모님의 병과 관련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본능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며 주장하고 있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여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리엔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말씀대로 쉬엄쉬엄하도록 할게요.”

그리고는 자신은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웃음을 피워내며 식사를 종용했다.

그러자 마지못해 식사를 시작하는 공작가 사람들이었다.

리엔이 처음 입으로 가져간 음식은 소고기 야채 볶음이었다.

고기를 야무지게 찍어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입 안 가득 퍼지는 가지의 향과 물컹한 식감에 그만,

우욱-!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고기인 줄 알고 먹은 게 알고 보니 가지였던 거다.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를 뽑으라고 하면 리엔은 일말의 고민 없이 에르한, 렉스 베고니아,

마지막으로는 가지를 꼽을 자신이 있었다.

참고로 1위가 가지고, 2위가 렉스 베고니아였다.

리엔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자신의 구역질로 인해 정적이 내려앉았다는 것을 깨달은 리엔이 급이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

하지만 입에 남아 있는 가지 때문에 다시금 구역질이 치솟아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욱! 우욱-!”

리엔은 먹던 음식물을 뱉는 것은 큰 실례라는 것을 알기에 억지로 가지를 삼켜 보려 했다.

하지만 뿌리 깊은 가지 혐오는 참으려야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다이닝 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리시안셔스가의 사람들은 뛰쳐나간 리엔의 빈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덜덜 떨리는 눈으로 서로 눈빛 교환을 하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공작이었다.

“설마…….”

사실 실비아가 카르시온을 임신했을 때, 입덧으로 가장 고생한 사람은 공작이었다.

실비아의 입덧을 공작이 대신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공작은 실비아와 카르시온 보다 조금 더 빨리 확신할 수 있었다.

리엔의 임신을.

그때였다.

다이닝 룸 구석에 서 있던 하녀 한 명이 혼란에 빠진 공작가 사람들 앞에 섰다.

“실은……. 저번에 리엔 아가씨가 행복한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으시면서 ‘이 예쁜 것. 내게 와 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하신 적 있으세요.”

“세상에……!”

“그리고 ‘배가 나오면 역시 드레스를 입었을 때 태가 많이 나겠지?’라며 고민하시기도 했고요.”

저 말이 사실이라면 리엔의 임신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공작이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하녀에게 물었다.

“그 중요한 사실을 왜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

“아, 아가씨의 임신이니 당연히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서……! 죄송합니다.”

실비아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가 카르시온에게로 향했다.

“……카온, 일을 치르기 전, 리엔에게 약은 확실히 챙겨 줬었겠지? 물론 너도 챙겨 먹었고.”

충격에 빠져 있던 카르시온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게……. 너무 갑작스럽게 진도를 나가게 돼서.”

“그걸 변명이라고!”

실비아가 벌떡 일어나 카르시온의 멱살을 잡아챘다.

“네 평생의 동반자야. 네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어떻게 그리 무책임할 수 있어! 아이 낳는 게 가벼운 일인 줄 알아? 리엔의 인생은 물론이고 네 인생까지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란 말이야!”

실비아가 지나치게 흥분한 듯한 모습에 공작이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리고 나섰다.

“여, 여보. 조금만 진정…….”

“이거 놔요!”

그녀의 매서운 눈빛이 카르시온을 향했다.

“네가 리엔을 아끼는 것 같아서 딸로 들이는 것 대신 며느리로 들이는데 찬성한 것이건만, 이렇게 배신을 해?”

카르시온은 실비아가 저를 욕하거나 말거나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하, 그러고 보니 리엔이 제게 아이를 좋아하냐고 물었던 적이…….”

“뭐? 그래서 뭐라고 했어! 당연히 좋다고 했겠지?!”

“…….”

“아아…….”

입을 꾹 닫는 아들의 모습에 실비아가 뒷목을 잡고 휘청였다.

이번만큼은 공작도 참을 수 없었는지 큰 호통을 쳤다.

“이 멍청한 놈!”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평소라면 무슨 일을 쳤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카르시온이 혼이 나간 얼굴로 자책하자 다이닝 룸에는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그럼 아까 리엔이 요즘 부쩍 잠이 많아졌다고 한 것도…….”

“리엔이 카르시온과의 관계에 조바심을 낸 것도 전부…….”

실비아는 마지막으로 확인 사살을 하듯 카르시온에게 물었다.

“의심되는 시기는?”

“2개월 전…….”

맙소사.

2개월 전이라면 아직 배가 나오지 않은 것도, 입덧을 시작한 것도 딱 맞아떨어지는 시기였다.

공작은 실비아의 등을 토닥이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못난 아들을 둬서 리엔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그래도 아이가 생긴 건 축복할 일이지.”

“그래요……. 저도 리엔을 볼 낯이 없어서 그렇지 손주가 생긴 건 정말 기쁘게 생각해요.”

“다행인 건, 리엔도 아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

실비아가 공작에게 몸을 기댔다.

“천만다행인 일이죠. 리엔은 저희에게 언제쯤 이 사실을 알려 줄까요?”

“때가 되면 이야기해 주겠지. 그때까지 우리는 모르는 척해 주자고.”

그 무렵, 카르시온은.

“리엔과 내 아이…….”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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