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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25)화 (125/161)

125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카르시온은 리엔을 위해서라면 고민 않고 목숨을 버릴 자신도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것 같네.’

급기야 억울한 마음과 함께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나는 왜 입덧을 하지 않는 거지? 내가 더 리엔을 사랑하는데!’

카르시온이 속으로 한창 분을 내고 있을 때였다.

리엔이 예상치 못한 정적에 당황한 사이, 빠르게 정신을 차린 실비아가 불현듯 리엔의 양손을 꼭 잡고 말했다.

“카온이 널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 두렴, 리엔.”

“……예?”

갑자기요?

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실비아는 슬쩍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니?”

배가 나오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는 게 좋을 텐데.

실비아가 뒷말을 꾹 삼키고는 웃어 보였다.

결혼이라는 말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리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혼은…….”

리엔이 뜸을 들이자 주의 깊게 지켜보던 공작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온갖 망상이 일었다.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던 것 같아요. 저는 카르시온과 결혼 못 하겠어요.’

‘제 아이를 이런 사이코들이 가득한 공작가에서 키울 수는 없어요!’

‘예? 결혼이요? 카온은 연애하기 좋은 상대지, 결혼하기 좋은 상대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다행히도 리엔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네들의 망상과는 달랐다.

“저도 최대한 빨리 진행하고 싶어요.”

“그렇구나.”

그 한마디에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것을 모르는 리엔이 말을 이었다.

“마음은 그런데 사실 넘어야 할 산이 있어서……. 그것부터 어떻게 처리를 하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그 산이 뭐지? 뭐든 부숴 주마.”

공작의 말에 리엔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모 부부는 제가 카온과 연인이라는 것도 모르시거든요.”

아아앗…….

실비아가 공작의 옆구리를 몰래 꼬집었다.

공작은 억울했다. 그 산이 사돈댁일 줄은 어떻게 알았겠는가.

신분의 벽이라거나 빌어먹을 베고니아 자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리엔은 눈치를 보며 변명하듯 입을 뗐다.

“그……. 저를 많이 아끼시는 분들이라 카온의 소문을 듣고 반대를 많이 하실 것 같아서요.”

실비아는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눈치 볼 필요 없단다, 리엔. 집안의 반대 정도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고요?”

대체 어느 가문에서 리시안셔스 공작가와의 혼담을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제국의 황녀조차도 쉬이 거절하지 못했을 터였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공작님도 그렇고 공작 부인도 그렇고 제게 너무 저자세이신 것 같아요.”

신분도 권력도 재산도 힘도. 무엇하나 꿇릴 게 없는 분들인데.

생각하다 보니 리시안셔스에 비해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여 괜히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오히려 결혼 허락을 받아야 할 쪽은 저인데…….”

실비아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오, 그런 말 말거라. 우리는 네가 카온의 아내가 되어 준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며느리보단 딸이 되었으면 더 좋았을 수도.”

실비아가 다시금 공작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만 리엔이었다.

두 분의 귀여운 모습에, 그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꺄르르 웃는 그녀의 목소리가 다이닝 룸을 울렸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평생 저 웃음을 지켜 줘야겠다고.

* * *

오늘은 대망의 소개팅 날이었다.

사실 카르시온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번 소개팅이 조금 기대되었다.

상대방과 잘해 보겠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이모가 그렇게 극찬했던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신분, 얼굴, 성격, 젊은 나이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는 사람.

콩깍지가 낀 나조차도 차마 카르시온이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물론 성격 부분을 내게로 한정한다면 완벽하긴 했지만.

나는 내 앞에서 입술을 잔뜩 내밀고 있는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는 아직도 내게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 있었다.

“위험할 때는 무조건 나를 부르는 거야 알았지? 아니, 그냥 간단히 시킬 것만 있어도 불러.”

“응.”

“너를 3초 이상 쳐다보는 사람이 있어도 부르고.”

“그건 좀.”

“역시 불안해서 안 되겠어. 따라갈게.”

“3초는 우연일 수 있으니까 5초로 합의 보자.”

“……알겠어.”

나는 그의 볼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그럼 다녀올게.”

그러자 불시에 뽀뽀 공격을 받은 카르시온이 헤롱거렸다.

“카온, 나 다녀온다니까?”

“으, 응 잘 다녀와.”

잘 다녀오라니.

뽀뽀 받았다는 거에 집중한 나머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카르시온이 텔레포트로 데려다준다고 우기는 것을 말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가 나를 데려다주는 것은 내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편이 편하고 좋지.

문제가 있다면 그건 소개팅남의 목숨이랄까…….

그래서 나는 카르시온에게 쫓아오지 말라고 엄포를 놨다.

그렇게 며칠을 실랑이하다가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카르시온이었다.

나는 마차에 딸린 창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작가 저택을 나설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헤롱거리는 상태였다.

저러다 넘어지는 거 아닌가 몰라.

마차를 타고 얼마나 지났을까.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마차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개팅 시간이 꽤 남았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주변에 시간을 보낼 곳이 있나 생각했다.

문득 저번에 받은 낸시의 편지가 생각난다.

“이 주변 치료소에서 일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잠깐 들러 볼까.”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아, 그전에.

나는 마차를 내리며 일부러 발을 잘못 디딘 척 휘청였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신형을 드러내며 나를 받아 내는 누군가.

“리엔!”

카르시온의 놀란 얼굴이 시야에 담긴다.

이럴 줄 알았지, 이 자식.

나는 몸을 바로 하고는 나를 받치고 있는 그의 손을 태연히 떼어 내며 싱긋 웃었다.

“우리 오랜만이네, 카온?”

내 행동과 웃음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카르시온이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그가 내게서 떨어진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흐응, 이상하다. 카온이 왜 내 앞에 있지? 분명 쫓아오지 않기로 나랑 약속하지 않았었나?”

“리엔, 그, 저, 그게……. 내가 일부러 쫓아오려고 한 게 아니라 몸이 자동으로 움직여서.”

“약속을 어겼으니 벌 받을 준비는 됐겠지?”

“……네가 주면 벌이면 뭐든 달게 받을게.”

“나 하루 동안 단식할 거야.”

그러자 뭐든 덤덤히 받아들일 것만 같던 카르시온의 경악성이 날아들었다.

“리엔! 아니 어떻게 그런 잔인한 벌을! 차라리 날 때려. 제발 굶는 것만은……!”

왜 저렇게 난리야. 누가 보면 애라도 밴 줄 알겠네.

너무 애원하듯 말하니 괘씸했던 마음이 싹 사라진다.

하긴, 나 같아도 카르시온이 소개팅을 나간다고 했으면 불안해서 몰래 쫓아왔을 것 같았다.

……소개팅 상대를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단식은 취소하고 때리는 거로 봐줄게.”

카르시온의 얼굴에 반짝 화색이 돌았다.

“고마워……!”

“약한 부위인데 괜찮겠어?”

“눈을 찌르더라도 참을 수 있어.”

야 그건 너무 심한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를 때릴 준비를 했다. 그러고는 목표를 정하고 자비 없이 돌진했다.

아, 참고로 내가 그를 때릴 부위는 입술이었고…….

그를 혼내 줄 도구 또한 입술이었다.

쪽.

한 번으로는 부족하니 몇 번 더 때려야지.

쪽, 쪽.

만족할 만큼 그를 때린 나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호언장담한 것과 달리, 카르시온은 데미지가 너무 컸는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는 그런 카르시온을 두고 손을 살랑이며 걸음을 뗐다.

“또 쫓아오면 정말 단식할 거라는 거 알아 둬, 카온.”

* * *

낸시가 일하고 있다는 치료소에 들른 나는 금방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잔머리 하나 보이지 않게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게다가 내가 기억하기로 그녀는 에너지 넘치고 밝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눈이 죽어 있다고 해야 하나.

조금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낸시.”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차트를 뒤적이던 낸시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커지며 단숨에 입가에 웃음이 올라왔다.

“리엔? 와,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설마 아파서 온 건 아니지?”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네 생각이 나서 들렀어. 바쁜데 괜히 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낸시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 저었다.

“방해는 무슨! 타이밍 맞춰서 잘 왔어. 지금은 조금 한산할 때거든.”

“한산할 때 왔다니 다행이네.”

“리엔 네가 날 보러 와 주다니……! 다음에 리사동 애들과 만나면 자랑해야겠다.”

“하하, 졸업도 했는데 리사동 타령이야?”

나는 옅게 미소를 짓고 있다가 조금 걱정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보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아.”

얼굴이 상해 보인다는 말에 낸시가 볼을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티가 많이 나는구나. 요즘 치료소에 종일 살다시피 했더니 그런가 봐.”

“……살다시피 했다고? 그러다 건강 해치겠다.”

“돈 때문에. 그나마 인력이 부족해서 계속 근무할 수 있는 게 다행이야.”

의문이 들었다.

여유롭지는 않지만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할 만큼 궁핍하지는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버지가 지금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셔서 내가 가장이 됐거든.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해.”

“아…….”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어디가 편찮으신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라면 좋을 텐데.

그러자 낸시의 얼굴이 울음을 참듯 일그러졌다.

“실은 의원에게 보이지도 못했어.”

“……돈이 없어서?”

하지만 낸시 본인이 치료소에서 보조로 일하는 만큼, 의원에게 부탁 정도는 할 수는 있을 텐데.

낸시의 눈이 잘게 떨렸다.

“돈 때문만은 아니야.”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뭔가 결심한 듯 숨을 들이마신 후 어렵게 입을 뗐다.

“너니까 믿고 말할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 아버지가 ‘몬스테라’에 걸린 것 같아.”

몬스테라.

아바스칸투스에서 한창 난리가 났던 그 전염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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