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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26)화 (126/161)

126화

이름 없이 전염병이라고만 불리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몬스테라라는 이름이 붙었었지.

하.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낸시가 왜 아버지를 의원에게 보이지 못했는지 이해가 갔다.

“낸시. 나를 믿고 그 사실을 털어놓은 건 고마워.”

그러나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몬스테라는 전염병이었다.

이건 비단 낸시와 낸시 가족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어쩌면 낸시네 아버지 한 명으로 인해 제국 전체에 전염병이 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전염병을 숨기려 하다니.

내 차가운 눈을 마주한 낸시가 흐느끼듯 말했다.

“아니야, 리엔. 나도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렸더라면 진즉 신고했을 거야.”

“그럼 왜……!”

“믿어 줘. 아버지가 걸린 병은 전염병이 아니야. 증상은 ‘몬스테라’와 굉장히 흡사하지만, 누구에게도 전염은 되지 않았어.”

순간 벼락이 내려친 듯한 감각이 온몸에 휘몰아쳤다.

돌아가신 엄마 아빠의 모습이 머리에 스쳤다.

“우리 가족은 대가족이야. 집도 좁아서 항상 부대껴 살지. 아버지가 병에 걸리신 후 방을 따로 마련해 드리기는 했지만, 간병은 동생들과 내가 돌아가면서 했어.”

날 바라보는 낸시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하지만 우리 가족 중 누구도 병에 옮지 않았지.”

아바스칸투스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잠복기는 길어 봤자 일주일이라 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병이 몬스테라가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내 돌아가신 부모님이 걸렸던 병도 몬스테라와 증상은 같았으나 전염되지 않았으니까.

부모님이 걸렸던 병은 역시 다른 병이었던 걸까?

확인이 필요했다. 나는 더듬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내가……. 너희 아버지를 한번 만나 뵐 수 있을까?”

“사실 네게 편지를 보낸 것도 너는 뭔가 알지 않을까 해서,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썼던 거야.”

“……편지에는 안부 인사밖에 쓰지 않았잖아.”

그녀의 얼굴에 씁쓸함이 올라왔다.

“이럴 때만 연락하는 게 미안해서 결국 못 썼어. 너를 이용하는 것 같더라고.”

“낸시. 이건 이용하는 게 아니야. 친구로서 부탁하는 거지.”

그래, 낸시는 이런 아이였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는.

전염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숨길만한 멍청이도 아니었지.

그때 무엇인가 떠올린 듯 낸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게다가……. 지금은 뭘 해도 고칠 수 없다는 걸 알아. 아버지는 치료하기에 너무 늦었어.”

“그래도 한 번 뵙게 해 줘.”

만들어 둔 약이 있다.

만약 돌아가신 내 부모님이 걸리셨던 병과 같은 거라면 효과가 있을 터였다.

치료제는 아니지만, 병의 진행속도는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다.

문득, 시야에 벽에 걸린 원목 시계가 들어온다. 벌써 약속한 시간이 다 된 상태였다.

하필.

나는 그녀의 등을 위로하듯 토닥였다.

“내가 일이 있어.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병원에 다시 찾아올게. 치료소는 몇 시까지야?”

그녀는 괜찮다고 말하려는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결국,

“……24시 운영하는 곳이니 언제든 와도 괜찮아.”

아버지를 뵙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언제든 와도 괜찮다는 말을 한 것과 달리, 낸시는 이미 포기한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늦지 않게 올게.”

* * *

“하아.”

피오르는 한숨을 푹푹 쉬며 오늘 만나기로 한 소개팅 상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안 나가겠다고 했는데, 제 형이 얼마나 성화던지.

이번에 나가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하게 될 거라고 노래를 불렀다.

하도 그러기에 나중에는 조금 궁금해져서 초상화만 살짝 보여 달랬더니 직접 가서 확인하란다.

그렇게 형과 며칠을 싸우다가 홧김에 더러워서 나가고 만다고 하고 나와 버렸다.

아카데미 시절 화려한 전적이 있는 만큼 어지간한 외모에도 혹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피오르였다.

게다가 이미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기도 하고.

그런데.

리엔, 네가 여기서 왜 나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놀란 건 자신뿐이 아닌지 리엔은 몇 번이고 자리를 확인하다가 설마하는 얼굴로 물었다.

“너 설마, 소개팅?”

“맞……는데.”

피오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긍정하자 리엔은 그 자리에서 빵 터져 버렸다.

“푸하하! 신분, 외모, 성격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다는 사람이 너였어?”

리엔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피오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야. 다른 건 몰라도 성격까지 빠지지 않는다니. 다들 네 연기에 잘 속고 있나 봐.”

리엔의 웃음에 피오르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적당히 웃어!”

“어쩐 일이야, 그렇게 만나는 여자 없다고 피력하더니, 이제 여자 만날 생각이 들었나 보지?”

“……너야말로 여긴 어떻게 나온 거야? 형이 부탁하기라도 했어?”

“형? 루 님을 말하는 거야? 아니, 그분은 내게 부탁한 적 없어. 나도 네가 나올 줄 전혀 몰랐는걸.”

피오르는 복잡한 얼굴로 리엔을 응시했다.

리엔을 소개팅 상대로써 대해야 하는지, 아니면 친구니까 하하호호 대화만 하고 보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피오르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리엔이 편한 웃음을 걸치며 말을 이었다.

“상대가 너라서 다행이다. 나 사실 홧김에 나온 거거든.”

피오르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홧김에?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는 자신도 홧김에 나오게 됐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리엔이 여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모가 하도 성화셔서 한 번 나오게 됐는데 중간에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핑계 대려고 했지.”

“카르시온은?”

“따돌리고 왔어.”

피오르는 아득해진 눈으로 리엔을 바라봤다.

“소개팅 상대가 나라는 걸 카르시온이 알면…….”

“곧 가겠네. 안녕 그동안 즐거웠어, 피오르.”

“…….”

“농담이야. 잘 따돌리고 왔으니 걱정하지 마.”

“네가 카르시온한테 말하면 끝인 거 아냐?”

“나 못 믿어?”

“응.”

한 치의 고민 없이 나온 대답에 리엔이 혀를 찼다.

“친구를 그렇게 못 믿어서 쓰나.”

그러고는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낸시의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줄곧 마음이 급했던 탓이다.

한시라도 빨리 약을 챙겨 그녀의 아버지의 상태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인 걸 알았으니 굳이 빙빙 돌려가며 시간 끌 필요 없겠네. 나 먼저 일어날게.”

“……벌써 간다고? 너 맨날 이렇게 번개처럼 사라질래?”

피오르는 저도 모르게 리엔을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미안 진짜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 대신 편지할게.”

“반성문은 5장 미만으로는 안받는다.”

“엑. 너무 과한데.”

작게 툴툴 거리던 리엔은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아, 맞다. 가기 전에 알려 줄 소식이 하나 있어.”

“뭔데.”

그녀는 손으로 브이자를 그려내며 자랑하듯 말했다.

“나 카온이랑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다.”

일순간 피오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는 금세 한 쪽 입꼬리를 씩 올려 보였다.

“……그러냐? 나는 너희가 대체 언제 사귀나 했다.”

“축하해 줘서 고마워.”

“축하해 준 적 없는데? 더러운 커플 놈들 꺼져라.”

“네네. 더러운 커플 놈은 꺼지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린 리엔이었다.

“……가란다고 진짜 가냐.”

그 말에 그녀가 돌연 발을 멈추고는 피오르를 돌아봤다.

리엔은 피오르의 투명한 녹안을 응시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는 네가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 이제는 장난으로 말고 정말 진지하게 만나 봐.”

“오늘 소개팅을 망친 게 누군데?”

“아아. 안 들려 뭐라고? 빨리 꺼지라고?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간다. 수고해.”

피오르는 그런 리엔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리엔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그는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테이블에 머리를 쿵 박았다.

“멍청한 새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었다.

* * *

쾅-!

루는 바삐 움직이던 깃펜을 내려놓고는 차분히 내려놓았다.

“피오르, 아무리 급해도 노크는 하고 들어와야지.”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그제야 루의 시선이 피오르에게로 향했다. 그는 어울리지도 않게 한 손에 술병을 든 채였다.

“……차였냐?”

“고백한 적도 없는데 차이긴 뭘 차여.”

“왜 기회를 줘도 못 잡아. 거절당하더라도 고백은 해야 후회가 안 남지.”

“못 잡은 게 아니라 안 잡은 거지. 한꺼번에 친구 두 명 잃을 일 있어?”

“우정보다 사랑이 더 중요한 사람도 있으니까.”

“적어도 난 아니야.”

“그거 안됐네.”

“그리고…….”

쉬이 말을 잇지 못하는 피오르를 보며 루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리고?”

“둘이 사귄대.”

루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안쓰러움이 담긴 눈빛에 피오르는 변명처럼 말했다.

“난 친구로도 만족해.”

그렇게 말하는 피오르의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만족한다니. 누가 아나나스 가문 아니랄까 봐.

“……그러냐.”

피오르가 성큼 루에게 다가가 책상에 쿵, 하고 술병을 내려놓았다.

“멋대로 벌인 일도 있으니 술친구 정도는 해 줄 거지?”

“물론.”

* * *

피오르와 헤어진 리엔은 마차가 있는 곳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소개팅 상대가 피오르라서 별 탈 없이, 그리고 보다 빠르게 헤어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매번 만나자마자 헤어지는 것 같네.”

괜히 미안해지게.

리엔이 다음에는 공작가에 초대해서 자리라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지나가던 사람과 살짝 부딪혔다.

“앗, 죄송합니다.”

앞을 보지 않고 걸었기에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 리엔은 사과를 건네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스치듯 부딪혔기에 간단한 사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딪힌 행인이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날 두고 또 어딜 가려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리엔의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악몽을 꿀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목소리.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너무나도 끔찍한 음성.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은 것을 배려하듯 렉스 베고니아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찾았다, 내 사랑.”

노래하듯 즐거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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