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스르륵.
리엔은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렉스 베고니아는 그런 그녀를 부축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하, 하하.”
의미 모를 웃음을 토해 내던 그가 전율이 인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얼굴에 황홀함이 깃든다.
“드디어…… 만났네. 오랜만이야, 리엔.”
리엔은 렉스 베고니아가 뭐라고 하든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사실, 카르시온이 제 심장에 반려의 인을 새긴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반쯤 여유로운 마음이었다.
렉스 베고니아를 마주한다고 한들, 금방 카르시온을 부르면 된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카르시온은 작고 작은 한 번의 부름에도 금방 제게로 달려왔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는 달랐다.
오랫동안 마주하지 않고 있던 그와 실제로, 그것도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만나게 되자 다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거대한 공포만이 그녀를 지배했다.
렉스 베고니아가 그런 리엔을 보며 익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그동안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그대로야. 아니, 그보다 더욱 아름다워.”
렉스 베고니아가 리엔을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뱀이 몸을 타고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
“이제는……. 아까워서 어디 손을 올리지도 못하겠어.”
렉스 베고니아가 몸을 낮추며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다.
“좋은 동아줄을 잡았더라.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최상의 패야.”
그의 눈부신 은발이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화려하게 빛났다.
“아카데미로 도망쳐서 소공자를 꼬실 생각을 하다니. 우리 리엔은 머리도 좋고, 능력도 좋구나?”
그가 손을 뻗어 미동 없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주 영악하고 귀여워.”
어린아이를 달래듯 온화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일순간 분위기가 반전되며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런데 어쩌지, 난 상대가 리시안셔스라도 상관없는데.”
렉스 베고니아가 리엔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향을 맡았다.
“리시안셔스와 싸워 이기지 못할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어. 근데, 널 보지 못하는 4년간 내가 깨달은 게 하나 있거든.”
머리카락을 놓자, 결 좋은 흑발이 모래처럼 스르륵 그의 손을 빠져나간다.
“내게 너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사실을.”
그의 눈에 짙은 광기가 떠올랐다.
“베고니아 공작가가 망하든 말든 난 상관 안 해. 너만 내 곁에 있으면 된다고.”
렉스 베고니아는 무언가 기분 좋은 것을 떠올린 듯 달뜬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네가 카페에 들어가는 걸 봤어. 그런데 그때도 지금도.”
잠시 말을 끊은 그가 리엔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넌 줄곧 혼자더라?”
렉스 베고니아가 한쪽 손을 들어 신호하자 곳곳에서 그의 기사들이 둘의 주변을 둘러쌌다.
“호위는 데려오지 않은 거야? 네가 기껏 꼬신 카르시온 소공작은?”
석상처럼 움직이지 못하던 리엔은 귀에 박힌 카르시온이라는 이름에 손을 움찔했다.
“오……. 리엔. 나를 피하려고 했으면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말았어야지.”
느른히 웃은 렉스 베고니아가 리엔의 턱을 틀어쥐고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게 했다.
강제로 그를 마주하자 리엔의 정지했던 시간이 흘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호흡이 가빠져 왔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리엔.”
과호흡으로 인해 그녀의 초점이 흐릿해진다.
“그 새끼랑 했어?”
“…….”
“아니,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네가 더러워져도, 내 향기로 너를 뒤덮으면 되니까. 그 새끼의 흔적이 남지 않게. 구석구석.”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즐거움이 가득했다.
“외출은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내게 돌아올 시간이야. 자, 이리로 와.”
“아냐, 아냐, 아냐!!!”
리엔을 일으키려 손을 뻗자 그녀가 경기를 일으키며 몸부림쳤다.
그에게 닿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리엔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렉스 베고니아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러나 나동그라진 것은 리엔이었고, 그녀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렉스 베고니아가 그녀에게 손을 올릴 때마다 머리와 배를 보호하려 취했던 자세였다.
거친 바닥에 얼굴이 쓸린 그녀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른 채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쉼 없이 중얼거렸다.
무엇인가는 다름 아닌 카르시온의 이름이었다.
“카온, 카온, 카온, 카온, 카온, 카온, 카온, 카온…….”
반려의 인은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야 발동되는 마법이다.
그냥 읊조린 말에 카르시온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렉스 베고니아는 입가에 가식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내 화를 돋게 하고 싶은 거라면 성공했어, 리엔. 하지만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카온, 카온, 카온…….”
리엔이 카르시온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읊조리자 렉스 베고니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닥쳐. 그런다고 그 새끼는 나타나지 않아.”
아아.
이상하게도 사형 선고처럼 떨어진 그의 말만은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선명히 박혀 들어왔다.
리엔은 괴로워하며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카온!!!”
순식간의 일이었다.
눈을 찌르는 듯한 빛과 함께 거센 바람이 주변을 강타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알 수 없는 기운이 렉스 베고니아에게 쇄도했다.
그는 타고난 감각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와중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을 발도해 그것을 막아 냈다.
“큭……!”
하지만 반동까지는 어쩔 수 없었던 건지 그가 뒤로 밀려났다.
렉스 베고니아가 비로소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쓰러져 있는 리엔과 그런 리엔을 안고 있는 카르시온이었다.
렉스 베고니아는 곧바로 카르시온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아……?’
그제야 서둘러 자신을 도와줄 기사들을 찾았지만, 기사들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인 듯했다.
리시안셔스가 강력한 마법사 가문이라는 것은 대척 가문의 공작인 렉스 베고니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마법 천재라고 불렸던 공작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카르시온의 마법적 능력 또한 범상치 않다는 것도.
하지만 저 또한 검의 천재라고 불리었다.
때문에, 가문과 가문 사이의 격돌은 밀렸으나 일대일의 상황에서는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일반인도 아닌, 단련한 기사들을 잠시도 아니고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마법으로 잡아 둘 수 있다니.
심지어 어떠한 캐스팅조차 없이.
‘……재밌네.’
렉스 베고니아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는 단번에 카르시온은 자신이 어떻게 해도 정면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파악했다.
‘아아, 빙빙 돌아가는 건 취향이 아닌데 말이지.’
그의 시선은 리엔과 카르시온에게 고정된 채였다.
* * *
리엔의 엄포대로 공작가로 돌아간 카르시온은 침대에 누워 뒤늦게 흐르는 코피를 닦아 냈다.
“하, 행복해.”
리엔의 적극적인 스킨십은 견디기 어려웠지만 언제나 그만한 행복을 동반했다.
“……입술 뽀뽀라니.”
그것도 연속 세 번이나.
“흐아아, 벌써 입술이면 다음에는 뭐지?”
무언가를 상상한 카르시온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베개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한참을 베개와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카온!!!’
머릿속에 다급히 울려오는 리엔의 목소리에, 카르시온은 앞뒤 생각할 거 없이 텔레포트 했다.
도착하자마자 목격한 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리엔이 바닥에 웅크려 쓰러져 있는 모습.
그리고 그런 리엔 앞에 멀거니 서 있는 렉스 베고니아.
이 상황에 분노가 일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렉스 베고니아 따위가 아니었다.
카르시온은 빠르게 한쪽 무릎을 꿇어 리엔을 안았다.
그녀가 초점 잃은 눈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리엔. 숨을 조금만 천천히…….”
“카온, 카온, 카온, 카온…….”
리엔은 어떠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초점 잃은 눈으로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듯.
“그래. 내가 왔어, 리엔. 이제 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카온, 카온, 카온…….”
리엔의 호흡이 너무 빠르고 가빴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좋지 않았다.
리엔에도, 배 속의 아기에게도.
카르시온은 단호해진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리엔.”
변화는 없었다.
그는 조금 더 힘을 실어 말했다.
“리엔. 목소리를 잘 들어 봐.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눈을 제대로 뜨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
그러자 마법처럼 리엔의 초점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카르시온은 그런 그녀의 귀에 자신의 목소리를 계속 들려주었다.
마침내 그녀의 동공이 그에게로 향한다.
“카……온.”
리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그녀가 가쁘게 숨을 쉬며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워, 원래 이, 이 정도는 아, 아니었는데. 오, 오랜만에 보니까 너, 너무…….”
카르시온은 조용히 제 손으로 리엔의 눈을 덮어 주었다.
“리엔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어. 그러니까 더 이상 힘들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녀가 카르시온에게 매달렸다. 호흡은 여전히 가쁜 상태였다.
“나 무서워, 카온. 무서워. 무서워. 너무 무서워…….”
과호흡일 때는 종이봉투에 입과 코를 대고 자신의 호흡을 다시 들이마시게 하는 게 좋았다.
저농도의 산소를 호흡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종이봉투를 구할 곳은 없었다.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지금은 몸에 어떠한 제어 마법도 걸지 않은 상태였으나,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이윽고 카르시온의 입술이 리엔의 입술에 내려앉는다.
그는 자신의 숨을 불어넣으며 그녀의 숨을 빼앗았다. 둘의 숨결이 하나가 되어 섞인다.
카르시온은 눈을 뜬 상태로 그녀의 상태에 집중했다.
천천히, 천천히…….
리엔의 호흡이 안정되어 갔다. 하지만 반대로 몸은 더욱 떨려오기 시작했다.
카르시온이 입술을 떼자, 그녀가 눈물을 비처럼 쏟으며 카르시온에게 애원했다.
“너무 끔찍해. 차라리 날 기절시켜 줘, 제발.”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분노를 삼키는 것 같기도,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이건 지독한 악몽일 뿐이야.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사라져 있을 거야.”
카르시온이 리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그녀의 몸에 힘이 빠졌다.
슬립 마법으로 눈을 감은 그녀의 상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정상을 찾았다.
카르시온은 리엔을 단단히 고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엔을 재우고 난 후에야, 그의 시선이 렉스 베고니아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