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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28)화 (128/161)

128화

렉스 베고니아를 바라보는 카르시온의 눈에는 섬뜩함이 느껴지리만치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눈빛과 달리, 사실 카르시온은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분노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격한 분노에 되레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을 뿐.

그런 카르시온과 눈을 마주한 렉스 베고니아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다.

“흐, 흐하하하!”

아니, 그는 정말로 미쳐있었다.

그 또한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4년간 리엔을 그리며 천천히 미쳐 갔다.

적진의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리시안셔스 공작가에 리엔을 찾으러 간 것도 그만큼 미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제가 베고니아 공작이라는 직함보다 리엔이라는 사람에게 더 목말랐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였나.

베고니아가 자신에게 있어 중요해지지 않은 지는 오래다.

복부에 치명상을 입고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때도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 꽉 차 있었다.

루 아나나스 후작의 작위 계승식 파티에 간 로엘에게 태형을 내린 것도 그래서였다.

그건 대가였다.

감히 저도 보지 못한 리엔의 얼굴을 보고 온 대가.

오랜 시간 그녀를 보지 못해 굶주리고 메말라 갔다.

그녀를 한 번이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리시안셔스에서 자신을 죽이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그녀를 마주한 순간, 렉스 베고니아는 자신이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를 눈에 담았을 때에 그 희열. 황홀함.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러한데, 리엔이 자신의 것이 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열망이 피어오른다.

그녀를 갖고 싶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랬기에 지금은 카르시온 소공자에게 죽임당하거나 붙잡혀서는 안 됐다.

반대로 말하면 저 둘만 아니면 상관없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웃긴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연쇄 손목마였나.

저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의 손목을 그렇게 자르고 다녔다지.

오른손을 노리려나 왼손을 노리려나.

역시, 검을 잡은 오른손이겠지.

아니면 둘 다?

아아. 둘 다라면 조금 아까울 것 같았다.

리엔의 머리카락, 부드럽고 좋았는데 말이야. 분명 다른 곳도 그러하겠지.

허공에서 오랜 시간 동안 카르시온과 렉스 베고니아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카르시온이었다.

“내가 왜 너를 지금껏 죽이지 않고 가만히 뒀는지 알아?”

“글쎄,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나?”

“아니. 리엔에게 너에 대한 처분을 맡기고 싶었기 때문이야.”

렉스 베고니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카르시온의 품에 안겨 있는 리엔에게로 향했다.

“감히 눈을 어디에 돌려.”

그 순간 먹을 칠한 듯 렉스 베고니아의 눈앞이 껌껌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 고조 없는 음성이 들린다.

“다행이야. 눈은 두 개니까 리엔에게 남겨 줄 몫도 있는 거잖아?”

렉스 베고니아는 제 안구에 압력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 카르시온 소공자가 제 눈을 꺼내 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나 정도는 내가 먼저 건드려도 되겠지.”

저릿하게 느껴지는 살기에 공포감이 떠오르는 대신 푸스스 웃음이 흘러나왔다.

리엔, 네가 날 거부하고 선택한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정말 그게 네 선택이야?

카르시온 소공작은 자신과 동족이었다. 관심 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그게 설령 자신의 목숨이라도.

동족인 카르시온 소공자가 선택받았는데 자신이 안 될 이유는 없었다.

다정히 대해 주는 것이 취향이라면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어린 날에는 그녀가 우는 것을 보고 싶어 일부러 손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 정도 욕망은 참아 줄 수 있었다.

4년을 참아 왔는데 뭔들 못하겠는가.

그녀가 원한다면 카르시온 소공자의 흉내라도 내줄 수 있었다.

렉스 베고니아는 양팔을 벌리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냥 죽여.”

사실 그는 카르시온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을 알았다.

저를 왜 죽이겠는가.

즉사시키지 않는다면 즐길 수 있는 게 그리도 많은데 아깝게.

카르시온은 그런 렉스 베고니아에게서 시선을 옮겨 제 품에 안긴 리엔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느낀 걸까. 아니면 타이밍이 맞았던 걸까.

리엔이 작게 바르작거리며 끙끙 앓았다.

마음이 급해진다.

치료 마법은 걸어 놨지만, 의원에게 보여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어서 공작가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판은 네가 아니라 리엔이 해.”

“그녀도 내가 죽기를 바랄 텐데?”

“편한 죽음은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서.”

그럴 줄 알았지.

마법을 해제한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렉스 베고니아의 시야가 서서히 트였다.

그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카르시온의 서늘한 벽안이었다.

카르시온이 눈을 휘며 웃는다.

“이건 맛보기라는 것만 알아 둬.”

콰직.

무언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렉스 베고니아의 비명이 크게 울렸다.

예상했지만,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가 힘겹게 멀쩡한 쪽 눈을 떠 리엔을 찾았을 때, 이미 둘의 신형은 사라진 후였다.

그의 입가에 광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하, 하하.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라.”

* * *

공작가로 이동한 카르시온은 리엔을 침대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원을 불러오려는데…….

그는 제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리엔이 곧 꺼질 듯 위태로운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카온.”

“리엔.”

“날 혼자 두지 마.”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금세 눈가에 물기가 차오른다.

카르시온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다정한 음성으로 달래듯 말했다.

“잠시면 돼. 의원을 불러올게.”

“혼자 두지 마. 응?”

“…….”

“제발…….”

그 한마디에 카르시온은 더 이상 의원을 불러오겠노라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내일을 기약하며 리엔이 다시 잠에 빠져들 때까지 그녀를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카르시온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던 리엔은 한밤중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리엔을 껴안은 채 침대에서 같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신기할 정도로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낮에 정신도 못차리고 덜덜 떨었던 게 조금 창피해질 정도로.

“아…….”

그러고 보니 렉스 베고니아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낸시의 아버지에게 약을 전해 줘야 하는데.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한시가 급한 일이다 보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24시간 운영이라고 했지.’

리엔은 카르시온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같이 가 달라 부탁할까 했으나 그 생각은 금방 꺼졌다.

자신을 달래느라 많이 피곤했을 터였다.

게다가 자신이 남을 돕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카르시온이었다.

종일 울고 난 후 낸시네 아버지의 상태를 보러 간다고 하면 분명 반대하겠지.

리엔은 몰래 다녀오기로 하고 연구실에서 약을 챙겼다. 그러고는 마부를 깨워 공작가를 나섰다.

한편, 카르시온은 리엔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가 미간을 좁힌다.

“초조해하고 있었지.”

화장실을 가거나 요깃거리를 찾으러 나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설마 하며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했나.

리엔이 급하게 공작가를 벗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 한밤중에 어딜…….”

카르시온은 그녀의 뒤를 쫓는 게 옳은 일인가 생각했지만, 고민은 짧았다.

리엔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아까 낮에 리엔에게 신경이 쏠린 나머지 렉스 베고니아에게 추적 마법을 거는 것을 잊었다.

한쪽 눈을 못 쓰게 된 게 불과 반나절 전인 만큼 그가 공작가 앞을 지키고 있다가 리엔의 앞에 나타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하지만 한밤중에 나가는 것만 해도 충분히 걱정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리엔의 뒤를 쫓은 카르시온은 그녀가 들어가는 건물을 확인하고는 눈을 떨었다.

치료소.

어디 아픈 곳이 있는 거라면 공작가의 의원에게 보여도 충분했을 텐데.

“……어째서?”

그러다 문득 리엔이 아직 저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낮에 일로 배가 아프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분명 아래쪽에 출혈은 없었는데.

아니,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낮에 리엔의 볼에 난 상처를 보고 치료 마법을 걸어 주며 클린 마법까지 시전했다.

그때 같이 사라졌을 수도 있는 일.

큰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카르시온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치료소 밖에서 리엔을 기다리며 제발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두운 밤중에 시작된 리엔과 카르시온의 외출에, 해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리엔이 다리를 휘청이며 치료소를 빠져나왔다.

그에 카르시온은 저도 모르게 뛰쳐나갈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냈다.

그녀의 표정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뭔가에 크게 충격받은 사람 같았다.

몇 발자국을 휘청이며 걷던 리엔이 돌연 허리를 굽히며 헛구역질을 했다.

한참을 빈속을 게워내던 그녀가 결국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그러고는 눈물을 비처럼 쏟으며 마나를 담아 야트막하게 읊조렸다.

“……카온.”

저를 부르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던 카르시온이었다. 그가 단숨에 그녀에게로 이동했다.

리엔은 새벽에 갑자기 그를 호출했음에도,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쏟으며 조용히 카르시온에게 안겨들었다.

그녀를 마주 안아 주면서도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제발, 제발.

자신이 생각하는 일이 일어난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녀에게 묻고 싶었으나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너무 잔인한 행위이지 않은가.

그 사실을 입에 담게 하는 것이.

* * *

그날 이후 리엔은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밥도 일절 손대지 않고 종일 울다가 지치면 기절하듯 잠들기를 반복했다.

공작가 사람들은 리엔에게 밥이라도 억지로 먹여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몇 숟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음식물을 게워내었다.

일주일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해 수척해진 리엔에게 공작가 사람들은 조심스레 의원의 진찰을 받을 것을 제안했다.

그동안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리엔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까 함부로 의원을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리엔까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공작가 사람들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리엔은 그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세밀한 검사를 진행한 후,

의원이 리엔의 방문을 나서자마자 공작가 사람들이 취조하듯 결과를 물었다.

“수척해지시기는 했지만, 앞으로 잘만 챙겨 드신다면 건강상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의원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뚝 떨궜다.

“예상대로, 태기가 전혀 없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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