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세 사람은 입술을 세게 짓이겼다.
예상한 결과이긴 했으나, 직접 의원에게 통보받는 것은 또 달랐다.
실비아가 결국 눈물을 보이며 공작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공작은 눈을 꾹 감고는 그런 실비아의 등을 토닥였다.
카르시온의 몸이 잘게 떨린다. 그의 목에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몸 주변으로는 그의 감정 상태를 말해 주듯 마나가 불규칙적으로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렉스 베고니아를 데려와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렉스 베고니아는 어때요? 흔적이라도 나왔나요?”
실비아의 물음에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렉스 베고니아가 실종된 지 일주일째.
그가 홀연히 사라진 것은 정확히 그와 리엔이 마주친 이후였다.
카르시온은 리엔이 치료소에서 휘청이며 나온 날 저녁, 베고니아 공작가를 찾아갔다.
하지만 렉스 베고니아는 이미 모습을 감춘 후였고, 사람을 풀어 그를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카르시온이 후회가 짙은 얼굴로 읊조렸다.
“……추적 마법을 걸어 놨었어야 했는데.”
“곧 잡힐 거다. 제국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없게 만들고 있으니.”
리시안셔스 공작가는 베고니아 공작가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렉스 베고니아에게 현상금을 걸어 수배령을 내렸다.
리시안셔스의 파격적인 행보에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렉스 베고니아의 실종과 더불어 그의 죄목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리시안셔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질 무렵.
렉스 베고니아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다.
사용인들에 대한 잦은 폭행과 욕설이 오갔다는 건 기본.
모두가 쉬쉬하던 것까지 속속히 세간에 밝혀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그가 전 베고니아 공작 부부를 살해한 후 유서를 조작했다는 사실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아이러니한 것은 베고니아 공작가 측에서 앞다투어 나서서 이를 폭로했다는 것이다.
“꼬리 자르기를 빠르게 했더군.”
“살려달라고 발밑에 엎드려 비는 꼴이 참 우습지 않아?”
어차피 곧 파멸에 이를 텐데.
작게 덧붙인 카르시온이 눈을 번뜩였다.
귀족들은 실종된 베고니아 공작과 리시안셔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리시안셔스는 그것에 관해 일절 답하지 않았다.
두 공작가 사이의 싸움이 커져 불똥이 튈까 우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의외로 애꿎은 피해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시작부터 승자와 패자가 너무도 명확하게 차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곪아 가고 있던 베고니아 공작가는, 가문의 수장인 렉스 베고니아가 실종된 이후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고니아의 남은 형제들은 그런 공작가라도 차지하려 했고, 이는 결국 내분을 불러일으켰다.
그 와중에 리시안셔스는 휘청이는 베고니아의 전반적인 상업적 지지 기반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아무리 망해 가고 있었다고는 하나, 베고니아는 라그라스 제국을 대표하는 가문 중 하나였다.
고래가 고래를 집어삼키는 이 일은, 사람들의 모든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을 모두가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황실의 견제가 심해졌다. 듣도 보도 못한 법을 들먹이며 방해를 하고 있어.”
예상하긴 했으나 일이 귀찮게 됐다는 듯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조만간 이 이상 참견하지 말라고 경고를 보내야겠군.”
주객이 전도된 듯한 발언이었으나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덜컥 열리며 리엔이 나온 것은.
세 사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제 방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 사람을 보고 리엔은 눈을 느릿하게 껌뻑였다.
방마다 방음 마법이 걸려 있기에 대화를 듣지는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세 명이 그녀의 방문 앞에서 심각한 얼굴로 모여 있던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그들이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리엔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돼서 오신 거죠?”
“리엔…….”
“저는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았는데. 이제는 괜찮아.”
그들이 흔들리는 눈으로 리엔을 바라봤다.
리엔의 말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툭 치면 바스라질 것만 같던 눈빛은 다소 정상을 찾았으나, 수척해진 뺨과 상한 얼굴은 그대로였던 탓이다.
리엔도 자신의 말에 모순을 느꼈는지 조금 어색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 * *
“낮에 갔던 곳으로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한밤중에 갑자기 호출된 마부는, 다행히 내게 달리 연유를 묻지 않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가 출발하고 난 후에도 나는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게다가 안정을 주던 카르시온이 옆에 없으니 공포감이 다시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가져온 약병들을 꼭 껴안으며 카르시온을 떠올렸다.
그래도 렉스 베고니아를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괜찮아졌다.
그때는 공포에 사로잡혀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왔으니 내가 나갔다 왔다는 것은 보고되겠지.
“많이 화내려나…….”
그래도 그가 화내 준다면 마냥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을 걱정했다는 증거니까.
치료소 근처에 내려 걸어갈 예정이었으니 어디에 들렀는지는 모를 것이다.
숨겨야 할 일은 아니었지만, 내 목적지가 치료소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디가 아픈 거냐며 난리가 날 것 같았다.
아무리 약을 건네주러 온 것이라 말해도 듣지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서둘러 치료로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내게 물었다.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나요?”
“아픈 건 아니고…… 낸시를 만나러 왔어요.”
그러자 직원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왜 퇴근을 안 하나 했더니 친구분을 기다리고 있었군요. 낸시는 휴게실에 있을 거예요.”
기다리고 있었구나.
미안한 마음이 몰려들어 왔다.
다 포기한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잡으려고 하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내가 가져온 약은 치료제가 아니다. 병의 진행 속도만 조금 늦출 수 있을 뿐.
어쩌면 전혀 다른 병을 앓고 계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니 의자에 기대 꾸벅 졸고 있는 낸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올라오려는 연민을 꾹 내리누르며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 왔어, 낸시.”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가 비몽사몽한 얼굴로 배시시 웃는다.
“왔어?”
“미안, 내가 늦었지.”
“아니야. 나는 네가 약속을 지켜 준 것만 해도 고마운걸.”
거짓이 담겨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조용히 낸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조금 감동한 눈으로 내 손을 잡고 일어난다.
“따라와. 아버지는 집에 계셔.”
“집이 여기서 멀어?”
“걸어서 오 분 거리도 안 돼.”
그 정도면 마차를 타고 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낸시를 따라가던 나는 출입구와 반대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쪽은 나가는 곳이 아니잖아.”
“아, 우리 집은 뒷문으로 나가는 게 훨씬 빠르거든.”
* * *
“누나!”
“언니!”
잠에 들고도 남았을 시간이 건만.
우리가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동생들이 와다다 달려왔다.
얼추 세어 봐도 대여섯 명은 넘는 많은 인원이었다.
“세상에, 너희 아직도 안 자고 뭐 했어!”
“누나 기다렸지!”
“늦는 날에는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했잖아.”
그 말에 소년이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볼을 부풀렸다.
“누나가 뼈 빠지게 일하는데 어떻게 먼저 자?”
“언니 언니, 옆은 친구야?”
“와아아아아,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 같아! 언니 너무 예뻐요!”
낸시는 짐짓 엄한 눈을 하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만, 그만! 우리 리엔 닳으니까 그만 보고 다들 들어가서 자!”
“리엔? 헉, 설마 언니가 맨날 노래를 부르던 그…… 읍! 읍읍!”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동생의 입을 무자비하게 틀어막은 낸시가 호호 웃어 보였다.
“하, 하하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다들 좋은 말로 할 때 조용히 입 닥, 아니, 조용히 하고 들어가.”
그렇게 한바탕 정리하고 난 후, 낸시가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좁지?”
“아니, 북적북적하고 좋은데 뭘.”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말한 거였는데…….
나는 대꾸하려다가 그냥 말을 아끼기로 하고 얌전히 그녀를 따라갔다.
“여기가 아버지가 쓰는 방이셔.”
어느 방문 앞에 나를 데려온 낸시는 막상 도착하자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보기에 조금 혐오……스러울 수 있어. 나와 내 동생들이야 아버지이고, 병이 진행되는 걸 서서히 봐서 괜찮지만…….”
“알겠어.”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기에, 최대한 덤덤해 보이도록 대답한 후 문고리를 잡았다.
약간의 힘을 주자 문은 손쉽게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퍼지는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라고는 믿기지 않는 고약한 냄새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병상에 누워있는 낸시의 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낸시네 아버지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걸렸던 병과 같은 병에 걸리셨다는 것을.
또한 도저히 손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약병을 들고 있던 손이 발발 떨렸다.
두개골 모양을 따라 괴기스럽게 파인 얼굴.
이미 반절 이상이 썩어들어가 움직임 하나 없는 팔과 다리까지.
과거 부모님의 모습과 낸시네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며 구역감이 치밀어 올랐다.
죽음이 도래하고 있었다.
* * *
방문을 열고 나오자 한 소녀가 시야에 보였다.
아까 낸시에게 입을 틀어 막혔던 아이였다.
“언니한테 들었어요. 리엔 언니는 뛰어난 약초사라고.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했어.”
아이가 내 소매를 조심스레 잡으며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언니는 우리 아빠 낫게 해 줄 수 있죠? 그렇죠?”
아이의 목소리로부터 타고 들어와 시작된 절망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지독한 무력함이 느껴졌다.
아이에게서 부모님이 병에 걸리셨을 때의 내 옛날 모습이 스쳤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작은 아이에게 차마 솔직히 말할 용기 또한 나지 않았다.
저 병은 고칠 수 없다고. 이미 손 쓰기에는 늦었다고.
너희 아빠는 곧 돌아가실 거라고.
어떻게 그걸 내 입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 순진한 아이에게.
어떻게.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오열하며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난 저 병을 치료하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