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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30)화 (130/161)

130화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낸시네 아버지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한 후, 나는 이를 악물고 낸시의 앞에서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저 조용히 방에서 나와 낸시에게 말해 주려 했다.

이별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하지만 아이의 눈을 보자 나는 더 이상 담담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당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살리고 싶었는데.

죽도록 살리고 싶었는데.

결국, 나는 치료제를 만들지 못했고 부모님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눈물로 범벅되어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아이의 절망 어린 얼굴이 엿보였다.

너도 간절하겠지.

죽도록 헤어지고 싶지 않겠지.

그런데 말이야, 세상은 마음만으로 안 되는 게 참 많더라.

참을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옛날과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었다.

뛰어난 약초가라고?

내가?

……아니, 나는 나약하고 무능한 사람이었다.

렉스 베고니아의 앞에 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점도,

치료제 하나 만들지 못해 무력하게 사람이 죽어 가는 걸 지켜봐야만 하는 점도.

하나같이 과거와 달라진 구석이 없었다.

내가 목메어 울자 오히려 낸시가 나를 달래 주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네가 미안할 건 없다고. 이미 치료하기엔 늦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울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낸시와 동생일 텐데.

“미안해. 미안해…….”

움직이지 않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이것 이상 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나는 간신히 호흡하며 그녀와 눈을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눈물은 그쳤지만, 떨려 나오는 목소리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내가 가져온 약은…… 네 아버지에게 효과가 없을 거야. 당장 돈이 필요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당분간은 아버지와 함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임종을 함께하는 편이, 후회가 덜 남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뒤를 돌아 낸시의 집을 나섰다.

낸시는 그런 나를 쫓아와 아득바득 치료소까지 데려다주었다.

배웅은 해 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그녀는 내가 의원에게 진료를 받았으면 해서 데려다주는 거라 했다.

대체 눈물 한 번 흘렸다고 의원을 찾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예나 지금이나 리사동 애들은 나를 너무 아꼈다.

치료소에 도착한 나는 진료를 받는 척하며 그대로 건물을 나왔다.

더 이상 울지 않고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과거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소녀의 절망 어린 표정 또한.

나는 치료소를 벗어난 후에야 올라오는 구역감을 토해내었다.

속을 게워냈지만, 빈속이라 위액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힘을 다했는지 다리에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게 됐다.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지금의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

내 감정을 숨길 필요 없는 사람.

“……카온.”

카르시온은 내 야트막한 외침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품은 어떠한 것보다 든든했고, 따스했다.

그래서 눈물을 참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끌어안고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 * *

공작님도, 공작 부인도,

카르시온도 모두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눈물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내 시간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당시로 되돌아갔다.

울다 지쳐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다시 울었다.

공작가 사람들이 내게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이려 했지만, 몸은 음식물을 거부했다.

카르시온은 내가 악몽을 꿀 때마다 다정한 목소리로 깨워 주었다.

그가 내 침대 위에 같이 누워 있는 것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의원에게 몸을 보이고 나자 정신이 좀 돌아왔던 것 같다.

아니, 사실 의원이 내 방에 들어올 때 문틈 사이로 보였던 공작가 사람들의 걱정 어린 표정이 날 깨웠다.

아. 나는 사랑받고 있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우울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울고 있던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아서, 공작가 사람들은 내가 방에 틀어박혀 운 이유가 렉스 베고니아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렉스 베고니아 때문도 맞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무력해지는 내 자신이 싫었기 때문에.

그래, 렉스 베고니아는 이제 모든 권력을 잃고 도망자의 신세였다.

“……내가 그의 앞에서 움츠리고 있을 이유는 없지.”

치료제?

아직도 만들지 못한다면 만들 때까지 연구하면 된다.

부모님이 걸리셨던 병과 몬스테라가 같은 병인지는 이제 내게 중요치 않았다.

두 번 다시 부모님과 같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임상 실험을 할 환자가 없으니 치료제를 만드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설령 만들었다 하더라도 증명할 방도도 없을 거고.”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치료제를 만들어 낼 것이다.

반드시.

의원이 나가고, 나는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현기증이 일었지만, 침대 기둥을 잡고 있어 넘어지지는 않았다.

걸음을 옮겨 책상 서랍을 열자 내가 외출 시에 항상 허벅지에 차고 다녔던 가죽 케이스가 눈에 띄었다.

독침이 든 케이스였다.

나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던졌다.

“저런 건 정말 위급할 때 쓸 수 없어.”

렉스 베고니아.

너는 네 신분이 널 지켜 주고 있었다는 걸 알까.

“다음에 만난다면 나도 벌벌 떨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못하면 카온을 부르면 되지.”

나는 완벽한 해결법이라며 푸스스 웃고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손을 뻗어 스스로 갇혀 있었던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나를 보며 당황하는 공작가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꾹 내리눌렀다.

대신, 나는 그들을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카르시온이 내 손을 잡아 왔다.

“뭐든 들어줄게.”

……들어 보지도 않고, 정말이지.

이 와중에 장난으로 그럼 키스해 달라고 하고 싶은 걸 보면 확실히 정신이 깨어난 듯했다.

하지만 시부모님 앞에서 그런 장난을 치기는 조금 그렇겠지.

“저, 리시안셔스 공작령으로 내려가서 약초 연구를 하고 싶어요.”

리시안셔스 영지는 마법사들의 도시 또는 고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제국의 그 어떤 땅보다 마나가 풍부했기에 마물이 들끓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반대로 장점도 있었다.

마법사들의 능률이 높다는 것과 마나를 양분으로 자라는 약초들이 가득하다는 것.

때문에 리시안셔스 영지는 제국에서 약초 조달이 가장 빠르고 손쉬운 곳이었다.

치료제를 만들기에 이보다 적합한 곳이 있을까.

허락은 빠르게 떨어졌다.

공작 부인이 공작님과 눈을 한번 맞췄다가 입을 열었다.

“대신 카온과 같이 가렴.”

예상했던 조건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온과의 결혼은 나중으로 미루고 싶어요. 하고싶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단지 그 시기를 늦추고 싶을 뿐.”

그러자 공작가 사람들의 안색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그래. 이제 서둘러 결혼을 할 필요는 없어졌으니. 천천히 생각하자꾸나.”

그 말에 작은 의문이 느껴졌다.

내가 카르시온과 서둘러 결혼을 진행할 이유가 달리 있었나?

그저 지금은 다른 거에 신경 쓰지 않고, 치료제 연구에 집중하고 싶었을 뿐인데.

“또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니?”

“마지막으로, 베고니아 공작가에 대한 보복을 멈춰 주셨으면 해요.”

어차피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인 렉스 베고니아는 이제 더 이상 베고니아에 복귀하지 못한다.

베고니아 공작가가 망한다면 리시안셔스의 상황만 복잡해질 게 뻔했다.

괜히 공작님이 베고니아 공작가와 라이벌 구도를 만들며 힘의 균형을 이뤄 보이도록 한 게 아니지 않은가.

베고니아 공작가가 사라진다면 리시안셔스에 대한 황실의 견제도 심해질 터.

예전처럼 공작가가 평온히 흘러가기를 원했다.

물론 베고니아는 다시 가문을 일으키는 데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었다.

공작님은 그런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고니아 공작으로는 누굴 앉히고 싶나.”

……그걸 왜 저한테 묻죠.

내가 베고니아 공작가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베고니아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려 무시해 온 탓이다.

그런 베고니아 공작가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

“로엘 베고니아. 그 사람을 공작의 자리에 앉혀 주세요.”

* * *

이튿날, 나는 카르시온과 바로 공작령으로 향했다.

공작성에 도착하자 카르시온은 잠깐 영지 구경을 시켜 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나왔다.

리시안셔스 공작령은 생각보다 더욱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법사들의 도시답게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이 가득했다.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볼거리가 많았다.

활발히 거래되는 약초 냄새 또한 내 기분을 은근히 달뜨게 했다.

약초 연구가 급한 상황이긴 했지만, 사용인들이 짐정리를 해 주려면 시간이 걸릴 테고…….

하루 정도는 마음 편히 놀아도 괜찮겠지.

나는 카르시온에게 팔짱을 끼며 느른히 웃었다.

“이왕 나온 김에 오늘 하루는 데이트할까?”

카르시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응.”

우리는 종일 온갖 곳을 쏘아 다녔다.

소문으로만 들어 봤던 마탑에도 가보고, 마법 공연을 보거나 광장에서 음유 시인의 노래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공작령의 명물이라는 리시안셔스 꽃밭에 온 상태였다.

나는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배시시 웃었다.

카르시온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우리, 나중에 아이를 가지면 여기 공작령에서 기르자.”

내 말에 놀란 듯 카르시온이 눈을 키우며 눈시울을 붉혔다.

“리엔…….”

붉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며 손으로 그의 눈물을 훔쳐냈다.

아니, 아이 얘기에 울건 또 뭐람.

생각해 보니 전에 아이가 싫다고 했지. 그렇게 싫은 건가? 눈물을 보일 만큼?

“우리 둘의 아이가 싫은 거야? 하지만 카온, 잘 생각해 봐. 너를 닮은…….”

아니지.

카르시온을 닮았다고 하면 그는 오히려 싫어할지도 몰랐다.

나는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나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는 거야. 미니 리엔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그러자 카르시온이 머뭇거리며 슬픔 가득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네가 임신으로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에?”

이제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누가 임신을 했었는데?

설마,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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