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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31)화 (131/161)

131화

나는 미간을 와락 구기며 물었다.

“내가 더 이상 임신으로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심지어 무슨 유산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게 무슨…….

애초에 임신은 해 본 적도 없는 사람한테.

그만큼 카르시온과 많이 즐겼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하지만 우리는 첫날밤 이후 키스 이상 진도를 나간 적 없지 않은가.

그러자 카르시온이 말을 꺼내기도 괴롭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우리…… 아기가…….”

황당함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얘는 대체 혼자 어떤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던 거야?

혹시 밤을 보내면 무조건 아기가 생긴다고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세상에.

피오르의 빨간책 컬렉션에 관심이라고는 한 톨도 없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성 지식조차 모른다고 하기에 나와 밤을 보낼 때 아주…… 굉장했는데.

오히려 빨간 책을 정독한 나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나는 피어오르는 의문들을 넣어놓고 일단 오해부터 풀기로 했다.

카르시온의 어깨를 잡자 그가 움찔하며 나와 눈을 맞췄다.

“카온, 어쩌다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임신한 적 없어.”

순간 카르시온의 눈에 충격이 스친다. 절망에 가까워 보이는 눈빛이었다.

절망? 충격받은 건 이해하는데 왜 저런 눈빛을?

“리엔…….”

카르시온이 툭 치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을 보며 문득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떠올랐다.

에이 설마.

설마.

설마……?

“카온, 내가 유산의 충격으로 임신했던 기억을 지워 버렸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닐 거라 믿어.”

그가 입술을 꾹 닫는다.

허,

나는 헛웃음을 토해 내며 즉시 그에게 내가 임신이 아닌 이유를 설명했다.

“잘 들어. 그날은 충동적인 게 아니라 충분히 생각한 후, 계획적으로 너와 밤을 보낸 거였어.”

그러나 카르시온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답답함이 솟아오른다.

“너와 밤을 보낼 것을 알고 있었으니, 약은 당연히 챙겨 먹었지. 애초에 임신했을 리가 없다고.”

게다가 임신을 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가 월경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주기에 맞춰 딱 대자연의 부름을 받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내가 모르는 임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는 거다.

약을 먹었다는 말에 그제야 카르시온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에 내게 아이를 좋아하냐고 넌지시 물었었잖아.”

“뭐? 겨우 그런 거로 오해했다고? 그냥 물어볼 수도 있는 일상적인 질문이잖아?”

“하지만 입덧도 했고…….”

“내가 입덧을 언제……!”

그에게 마구 따지려던 순간, 내가 모두가 모인 식사 자리에서 구역질했던 게 떠올랐다.

“내가 가지를 먹고 구역질을 했던 걸 말하는 거야?”

“가, 지를 먹었었어?”

카르시온의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도 내가 가지를 싫어하다 못해 혐오한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는 까닭이다.

“……배를 쓰다듬으며 내게 와 줘서 고맙다고 한 건?”

“그, 그걸 카온 네가 어떻게.”

창피함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차마 물주머니가 너무 좋아, 의인화를 해서 했던 말이라고는 창피해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아악.

그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지금 보니 하녀가 오해할 만한 말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 배를 문지르면서 했던 말이 아니던가.

그럼 갑자기 공작가 사람들이 나를 건강한 어른이로 만들려고 했던 게 다……?

미친. 오해가 그때부터였다고?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어쨌든 아니야. 정말로.”

충분히 오해했을 상황이라고 이해가 되면서도, 아직도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오해를 해도 하필!

생각할수록 황당해서 결국, 목소리 톤이 격양되고 말았다.

“임신했으면 당연히 바로 알렸지! 네가 아빤데! 빨리 결혼식 올려야 할 거 아니야. 아니, 그 전에 임신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진작 물어보지 않은 거야?”

그때였다.

카르시온의 눈에서 예고도 없이 눈물이 뚝 떨어진 것은.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는 듯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화내다 말고 멈추지 않는 눈물샘에 당황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카온……?”

카르시온이 우는 것은 많이 봤지만, 이번에는 다른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깊은 감정이 전해져 왔다.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는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새끼 때문에 우리 아기가 잘못된 줄 알고…….”

카르시온이 불현듯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항상 세게 안으면 부서지기라도 할까, 힘을 주지 못하는 그였는데.

이번에는 나를 안은 그의 팔에서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잘게 떨리는 팔 또한.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의 너른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된 나는 당황하던 것도 잠시, 손을 움직여 그의 등을 토닥였다.

……힘든 시간을 보냈구나.

하긴, 정말 저 말도 안 되는 것을 믿고 있던 거라면 마음고생을 했을 만했다.

쉬이 말을 꺼낼만한 이야기도 아니었겠지.

그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리엔,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

“응.”

“그러면 렉스 베고니아를 만난 날 밤에 왜 치료소에 간 거야?”

……유산 오해는 그때부터였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진작 낸시의 아버지에게 급하게 약을 주러 간 것이라 털어놓았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오해였다.

“친구네 아빠가 편찮으셔서 급히 약을 가져다 드린 거였어.”

소용은 없었지만.

“다녀오고 나서 종일 운 건?”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 그랬어.”

나를 안은 그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이젠 괜찮아?”

“응. 네가 있어서 괜찮아. 내 새로운 가족이 되어 줄 테니까.”

너뿐만 아니라 공작님도, 공작 부인도. 내 가족이 될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괜찮아.”

그를 살짝 밀어내 얼굴을 확인했다. 눈물범벅이었다.

나는 소매로 그의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바보야. 울긴 왜 울어? 내가 임신했던 게 아니라서 다행이지. 지금은 우는 게 아니라 기뻐해야 맞는 거야.”

내가 생각해도 억지에 가까운 논리였다. 그러나 카르시온은 얼굴에 바로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응…….”

가만, 카르시온이 이렇게 단단히 믿고 있었다는 건……?

“카온, 혹시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도 오해하고 계셔?”

그가 슬쩍 내 눈을 피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내 인생.

* * *

달칵.

노인은 술병을 들다 말고 노크 없이 들어온 불청객에게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이미 발걸음 소리로 그가 들어올 것을 알고 있던 노인이었다.

“또 술이십니까, 대부님.”

“……쿤 님.”

쿤은 저를 응시하는 칠흑과도 같은 검은 눈동자를 보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쿤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성큼 걸어가 카리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술은 줄이셔야지요. 건강을 생각하셔야 할 나이시지 않습니까.”

쿤은 복잡함이 담긴 얼굴로 카리스를 바라봤다.

카리스가 매일같이 술을 찾게 된 것은 아들의 죽음과 리엔이 제 손녀라는 것을 알게 된 날부터였다.

쿤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괴로워하시면서 왜 리엔에게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까?”

“…….”

“저는 대부님께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카리스가 홀로 잔에 술을 쪼르르 채웠다.

“쿤 님,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그녀, 그러니까 쿤 님의 어머니 말입니다. 저는 사실 그녀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습니다.”

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카리스와 제 어머니는 자신이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둘은 서로의 말에 죽어도 지려 하지 않았다.

한데 저렇게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무엇이 대부님을 저렇게 만든 거지?

그 의문을 해결해 주겠다는 듯 카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 아들이 저를 떠났을 당시에 그녀는 저를 설득했습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찾아와 애원하듯 말했죠.”

그가 과거를 회상하듯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이윽고, 누군가의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온다.

“카리스, 당신 정말 후회할 거야. 다시는 루드를 보지 못할 거라고. 응? 그래도 좋은 거야? 네 아들이잖아.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아들이잖아!”

“당장 사람을 풀어 루드를 찾아.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 혹시 알아? 카리스가 아들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루드가 다시 돌아올지.”

“네 복수심 때문에 가족을 버릴 셈이야? 잘 생각해. 넌 지금 뭐가 중요한지 보지 못하고 있어.”

거기에 대고 자신은 뭐라 말했었지?

그래, 갈무리되지 않은 날것의 기운을 뿜으며 위협했었다.

그녀는 쿤 님을 태에 배고 있는 상태였는데 말이지.

“다시는 저를 찾아오지 마십시오. 곧 황비가 될 몸이라고 해서 제가 언제까지 참을 줄 압니까. 당신의 방문, 이제는 지긋지긋합니다.”

그녀는 제게로 쏟아지는 날카로운 기운에, 배를 감싸 안으며 입술을 악물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쿤을 낳고 몸을 회복할 때까지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 무렵 자신은 일 년 넘게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 옅은 후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믿음이 살아있었다.

결국 아들은 제게 돌아오리라는 헛된 믿음이.

쿤을 낳고 한 달간 황궁을 벗어나 자연에서 몸을 회복하고 돌아온 그녀는 제 아들인 쿤 대신, 카리스를 제일 먼저 찾았다.

다시금 찾아온 그녀를 보며 카리스는 얼굴을 굳혔다.

“여긴 또 왜 찾아오셨습니까?”

“이쯤 되니 깨달은 게 좀 있어? 루드는 절대 먼저 돌아오지 않아.”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시비를 걸고 싶으셔서 오신 거라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가정을 이룬 루드를 보고 싶지 않아? 네 손주를 그려본 적은 없어? 흑발에 흑안. 태어난다면 분명 아주…… 아주 사랑스러울 거야.”

카리스는 같잖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아이가 흑발 흑안을 가지고 있을 거라 확신하듯 말하는 것부터 웃음이 나왔다.

루드가 데려온 여인은 은발에 금안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는 부모의 색만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그 윗대의 색을 물려받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즉, 흑발에 흑안을 가질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는 거다.

저의 색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들을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라그라스인을 내 가족으로 둘 수는 없습니다. 손주가 태어나더라도 그 더러운 피가 섞여 있다면 역겹기 그지없겠죠.”

“……그게 네 대답이구나.”

그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마지막으로 물었다.

“만약, 라그라스인이 네 앞에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당장 검을 빼 들어 죽여 버릴 것입니다.”

“그게 네 가족이라도?”

카리스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라그라스인은 제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녀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짓이겼다. 그러고는 악에 받친 눈으로 경고하듯 말했다.

“그 말, 후회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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