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회상을 마친 카리스가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에는 짙은 후회가 응어리 저 있었다.
“저는 결국 끝까지 아집을 꺾지 않았고, 그녀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대부님…….”
“저는 두렵습니다.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또 어떤 후회를 하게 될지.”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쿤은 그런 카리스를 복잡한 표정으로 지긋이 바라봤다.
오랜 시간 끝에 그의 목을 타고 나온 말은 퍽 의외의 것이었다.
“대부님께서는 리엔과 저, 둘 중 누구를 더 사랑하십니까?”
툭.
술병을 들어 올리던 카리스의 손이 힘없이 추락했다. 쿤과 마주한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리엔이 피가 이어진 친손녀라면, 쿤은 손자처럼 키운 아이였다.
과거, 카리스는 아들이 떠나간 후 몇 년이 지나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저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을.
이후 방황이 시작됐다.
술을 물처럼 마시며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날이 일 년 중 손에 꼽았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것은 쿤이었다.
엘프인 쿤의 어머니가 고향인 숲으로 돌아가고 난 후, 부쩍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진 쿤이었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황궁을 방문해 쿤과 시간을 보냈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카리스는 남부러울 것 없는 신분으로 태어난 쿤이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마치 부과 권력을 모두 가졌지만, 그 외 모든 것을 전쟁으로 잃어버린 자신처럼 말이다.
쿤과 가까워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외로웠던 아이는 금방 카리스를 받아들였고, 둘은 곧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쿤 님……. 그 질문은 제게 너무 가혹합니다.”
“저는 대부님보다 리엔을 더 사랑했습니다.”
카리스는 멍하니 쿤을 바라봤다. 놀랄 줄 알았다는 듯 쿤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그래서 리엔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있음에도 어머니가 반대하셨다는 이유를 들어 합리화했고, 이기적으로 굴었습니다.”
“……쿤 님.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쿤은 어깨를 으쓱이며 버석한 표정으로 답했다.
“리엔이 말하길, 자신이 귀족이었다면 카르시온 소공자와 무리 없이 결혼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결혼…….”
리엔이 친손녀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아레나 아카데미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전부 꿰고 있는 카리스였다.
카르시온이 리엔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리엔은 카르시온 소공자를 좋아합니다.”
“그렇, 습니까.”
카리스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런 이야기는 소문만으로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위 귀족이고, 자신이 평민이라 믿고 있는 리엔은 그 길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잠시 말을 멈춘 쿤이 감정을 억제하려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살짝 씹고는 말을 이었다.
“때문에, 리엔은 항상 그에게 선을 그으려고 하더군요.”
카리스의 두 눈이 커졌다.
부모 모두 귀족일 터인데 어째서 이렇게 꼬인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것도 루드의 여인을 거부한 자신 때문에 비롯된 일이겠지.
지금이라도 손녀라는 것을 밝혀야 하나?
하지만 이제 와 뻔뻔히 사실을 밝히기에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말들이 목을 죄어왔다.
죽일 거라 했지. 라그라스인은 가족이 될 수 없다고 했지.
리엔이 저를 밀어낼까 두려웠다.
라그라스 제국에서 전쟁광에 살인 귀일 뿐인데.
아이에게 저라는 존재가 오점이 되는 건 아닐까. 자신 때문에 라그라스에서 손가락질받지는 않을까.
카리스가 자책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쿤은 그런 카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카리스의 시선이 쿤에게로 옮겨진다.
“그래서 리엔에게 너는 평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쿤이 울듯이 웃었다.
“대부님, 저는 리엔이 카르시온 소공자와 이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쿤 님.”
“이런 저를 원망하십니까?”
쿤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은 괴로운 얼굴이었다.
이런 자신이 역겹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카리스는 제 손으로 쿤의 보드라운 손을 조용히 덮었다.
일평생 검을 잡아 굳은살이 가득한, 투박하고 거친 손이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카리스의 진심이 담긴 한마디가 쿤의 귓가에 박히듯 들어왔다.
“누구를 더 사랑하냐 물으셨지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쿤 님을 사랑합니다.”
카리스가 주름이 가득한 눈을 휘어 접으며 미소 지었다. 애정 가득한 눈이었다.
“두 분 다 제 손주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설령 하늘이 두 쪽 난다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을 사실이지요.”
그 말에, 쿤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생각지 못한 답변이었다.
리엔이 친손녀이니 내심 그녀를 더 아낄 거라 예상했던 까닭이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자신은 질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저 또한 카리스와 리엔 사이에서 후자를 택했었으니까.
카리스는 그런 쿤을 보며 허허 웃었다.
“저런, 제가 요즘 쿤 님께 소홀해져서 서운하셨군요.”
“……그런 거 아닙니다.”
“어디 보자, 내일은 오랜만에 저와 말이나 타러 가시겠습니까?”
쿤은 카리스의 제안에 답하는 대신 그를 불렀다.
“대부님.”
“말씀하십시오.”
“저도 대부님을 사랑합니다.”
손자의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카리스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허허……. 다 큰 손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군요. 종종 말씀해 주시면 좋을 텐데요.”
“원하신다면 매일매일 말해 드리겠습니다.”
쿤은 다소 개운해진 얼굴로 카리스를 따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리엔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리엔을 포기한다는 말에 여유롭게 웃던 카리스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그 말은…….”
“만남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리엔은 과거의 일로 가족을 배척할 사람이 아닙니다.”
“쿤 님, 저는…….”
쿤은 카리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준비되실 때 말씀해 주세요. 리엔에게 아바스칸투스로 놀러 오라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 * *
“정신없는 하루였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공작가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임신과 유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바로 오해부터 풀러 나섰다.
카르시온의 손을 잡고 그길로 바로 수도 공작가에 마법을 써 이동했다.
그러고 지금껏 쌓아 왔던 오해를 푸는데…….
“뭐? 유산이 아니라고?”
“애초에 임신한 적이 없어?”
공작 부인과 공작님이 입을 벌린 채 서로 시선을 교환한다.
그 일련의 시선 교환에서 무언가 불안함이 느껴졌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슬픔 가득한 눈동자가 어째…….
공작 부인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공작님의 셔츠 자락을 꼭 잡았다.
그러자 공작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리엔, 충격받지 말고 듣거라.”
……설마?
“네가 기억을 잃은 것 같다.”
나는 이마를 탁, 하고 짚었다.
누가 카르시온의 부모님 아니랄까 봐 아주 오해하는 것도 똑같다.
“그 오해 이미 카온이 했어요. 물론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고요.”
“……그렇구나.”
전혀 내 말을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긴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게 카르시온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해명의 시간을 가진 후,
“그럼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네. 저는 유산도, 임신도 한 적 없어요.”
일순간 공작 부인이 눈물을 보이며 나를 와락 껴안았다.
“정말 다행이구나…….”
“걱정 끼쳐드려 죄송해요.”
공작 부인의 등을 살살 토닥이던 나는 공작님의 섬뜩한 표정을 발견했다.
공작님은 이를 까득 갈고 있었다.
“이 모든 오해의 시작인 그 하녀를…….”
그때였다. 중얼거림을 들은 공작 부인이 내게서 얼굴을 떼고는 덜컥 화를 냈다.
“당신은 지금 그게 중요해요?! 큰일이 아니었다는 거에 먼저 감사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 그게 아니라 실비아. 리엔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럼 닥치고 이리 와서 같이 안아주기나 해요!”
그렇게 나는 공작 부인에게 안긴 채 공작님에게까지 이중으로 안겨야만 했다.
거기에 카르시온이 질투하며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는 건,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사실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그렇게 모든 오해를 풀고 다시 리시안셔스 공작령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나는 간단히 몸을 씻은 후 침대에 몸을 뉘었다.
“……뭐지.”
어쩐지 굉장히 허전한 느낌이었다. 오늘따라 침대가 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낯선 잠자리라서 그런가?
이유를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 넘게 카르시온과 함께 누워 잠을 청하다가 혼자 자려고 하니 허전할 수밖에 없지.
즉시 몸을 일으켜 전신 거울 앞으로 향했다.
나는 약간의 프릴이 달려 있고 품이 넉넉한 원피스 형식의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다.
“흐음…….”
나는 익살스러운 웃음을 걸치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장식이나 프릴이 없어 밋밋해 보이는 네글리제였다.
그러나 이 옷의 진가는 소재가 얇다는 것에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준비를 마친 나는 베개를 들고 순진무구한 표정을 장착했다.
그리고 고민 없이 카르시온의 방으로 직행했다.
그의 방은 바로 맞은편이었기에 복도에 사람이 없는지만 빠르게 살핀 나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카온, 나야.”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며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시온이 문을 열고 나왔다.
“리엔 무슨 일…….”
나를 발견한 카르시온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는 재빠르게 나를 당겨 바로 방안으로 들어오게 한 후 문을 쾅 닫았다.
“리엔!”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온몸이 빨갛게 변해 가고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카온, 왜 그래?”
막상 이유를 묻자 그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시선 처리를 어찌할 줄 모르던 그가 결국 내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재미있는 건, 본능은 숨길 수 없었는지 그의 눈동자가 내게로 스리슬쩍 향했다는 거다.
그러다 나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고 화들짝 놀라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저 정도면 그냥 대놓고 보는 게 낫겠다.
카르시온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겨우 침 삼키는 소리일 뿐인데 오늘따라 그렇게 크게 들릴 수가 없었다.
한참을 끙끙 앓던 그가 결국 말하기로 결심했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리엔 너,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런……!”
“넌 다른 사람이 아니잖아. 내 애인 아니야?”
“그건 맞지만! 으아아……!”
카르시온이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려진 손 틈새로 그의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내 방에 찾아온 거야……?”
나는 싱긋 웃으며 카르시온에게 있어 복인지 재앙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별건 아니고, 어제처럼 너랑 자려고 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