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그날 이후 바르몬은 세상에 홀로 남게 되었다.
작은 마을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생존자는 바르몬뿐이었다.
가까운 친척 한 명 없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부모님의 시신을 땅에 제대로 묻어 주지도 못한 채, 살기 위해 마을 떠나야 했다.
라그라스 군이 마을에 있던 식량을 전부 가져갔기에 당장 떠나지 않으면 굶어 죽는 신세였다.
꽤 큰 마을에 도착한 그는 쓰레기통을 뒤져 누군가 먹고 남긴 음식물 찌꺼기를 먹었다.
전쟁 중이라 음식물 쓰레기도 잘 나오지 않아, 그것조차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쟁은 바르몬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일 년이 지나기 전, 두 제국이 평화 협정을 맺으며 종전되었다.
하지만 바르몬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길거리를 전전했고, 쓰레기통을 뒤져 끼니를 때웠다.
더욱 바르몬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바스칸투스 사람들의 차별이었다.
라그라스인 특유의 외양과 밝은 머리카락. 그리고 성이 없고 짧은 이름은 누가 봐도 라그라스인의 것이었다.
바르몬과 비슷한 신세인 골목길의 부모 없는 아이들마저 그를 무시했다.
“성도 없는 라그라스인 주제에 왜 아바스칸투스에 있는 거야? 썩 꺼지지 못해?”
“너희 나라 사람들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죽었어!”
바르몬은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기도 했고, 운이 좋지 않은 날에는 몰매를 맞기도 했다.
끔찍했던 전쟁의 트라우마로 혈액 공포증을 갖게 된 바르몬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몸에 피가 마르는 날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피를 보며 항상 악몽 속에서 삶을 이어나갔다.
“차라리 나도 그날 부모님과 같이 죽었더라면, 이 지옥을 겪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바르몬은 제 부모님을 죽인 라그라스 제국을, 저를 죽음에 몰고 있는 아바스칸투스를 증오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바르몬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다가 라그라스에 있는 아레나 아카데미에 대해 듣게 된다.
“자네는 똑똑한 아들딸을 둬서 좋겠어.”
“똑똑한 자식을 두면 뭐 하나. 돈이 없어 공부시켜 주질 못하는데.”
“아레나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보는 건 어떤가? 장학 복지 제도가 정말 잘 되어 있다더군.”
“학비만 문제겠나? 식비나 기숙사비는 어쩌고?”
“숙식은 기본적으로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던데.”
“허어, 무료로? 괜히 라그라스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는 아카데미가 아니구먼.”
“문제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학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지.”
바르몬의 귀에 숙식을 무료로 제공해 준다는 말이 꽂혔다.
지긋지긋한 굶주림과 길거리에서 자고 일어나는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바르몬은 먼 제국 땅인 라그라스까지 단신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도착한 아레나 아카데미에서 시험관에게 펜을 빌려 입학시험을 치렀다.
바르몬에게는 책과 공책, 펜 따위는 없었지만 버려진 신문은 있었다.
거리를 떠돌며 버려진 신문으로 쌓은 지식과 예전에 배웠던 지식들로 그는 기적처럼 입학시험에 통과하게 된다.
아카데미 생활은 꿈만 같았다.
라그라스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데 모인 이곳은 바르몬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따지지 않았다.
숙식도 제공되었고, 연금술 공부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월터라는 이상한 기숙 메이트를 만나게 된다.
“친구 사귀기는 귀찮은데 밥은 혼자 먹기 좀 그래. 그러니까 나랑 밥 먹자.”
이 미친놈은 뭐지 싶었지만, 제게 손을 먼저 내미는 사람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서 바르몬은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지만,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성격인 바르몬과 매사 귀찮음으로 똘똘 뭉쳐 있는 월터는 안 맞는 듯 잘 맞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올라갔을 때였다.
검술부 정기 훈련 때문에 산에 올랐다가 모기에 잔뜩 물려온 월터가 투덜댔다.
“아, 이 세상에 있는 모기 다 뒈졌으면.”
“나는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어.”
그러자 월터가 낄낄 웃으며 장난스레 긍정했다.
“나도. 세상이 망하면 훈련에 갈 필요도 없을 거 아니야.”
바르몬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월터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제안했다.
“야, 바르몬. 우리 모기 고문 동아리를 만드는 건 어때?”
“……모기 고문 동아리?”
“너 피 보는 게 무서워서 모기도 못 죽이잖아. 적어도 네 피를 빤 모기는 죽일 수 있어야지.”
“모기 고문이랑 피를 못 보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어떻게 나아질 수 있다고.”
“그냥 모기에게 몇 번 물려주고 창의적으로 죽이는 걸 반복하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오, 그것참 끔찍한데.”
“왜 재미있을 것 같은데 같이 하자.”
“만들려면 너 혼자 만들어.”
“실적 점수는 내가 채워 올게.”
월터답지 않은 희생정신에 바르몬이 퍽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귀차니즘 마스터인 네가 어쩐 일로?”
“어차피 검술부 정기 과제 중에 핵 모으기가 있거든. 겸사겸사 구하지 뭐.”
“네가 그렇게까지 해 준다면 생각해 볼 여지는 있겠는데……?”
그렇게 월터의 꾐에 모고동이 탄생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시니어 3학년을 마쳤을 때였다.
“바르몬. 이번 방학 때는 우리 집에서 지낼래?”
“됐어. 내가 너희 집을 왜 가.”
바르몬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월터가 귀족 자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월터가 자신의 신분을 자랑하거나 넓고 좋은 집을 자랑하려 제안한 게 아님을 알았다.
매번 방학 때가 되면 돌아갈 곳이 없어 기숙사에만 있는 자신이 신경 쓰였던 거겠지.
하지만 자신은 정말 괜찮았다.
오히려 월터네 집에서 신세를 지는 게 더 부담스럽고 불편할 것 같았다.
“맛있는 거 많이 먹여 줄게.”
“내가 고작 음식에 넘어갈 것 같아?”
“응. 너 먹는 거 좋아하잖아.”
“…….”
그랬다. 바르몬은 아사 직전까지 굶었던 기억 때문에 먹을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머무는 건 좀 부담스럽고, 딱 하루만 놀러 가도 될까?”
부담스럽다는 말에, 월터는 바르몬을 더 설득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그렇게 월터의 집에 가게 된 바르몬은 떡 벌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고정해야만 했다.
넓고 고급스러운 저택은 물론이고 저에게까지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사용인들.
밥부터 먹자며 월터가 데려간 다이닝 룸에는 지금껏 보지 못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자신이 살아온 것과 너무나도 다른 세계에 얼떨떨한 기분을 삼키던 바르몬은, 아무려면 어떻냐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월터는 졸업 후에도 변하지 않을 친구일 텐데.
그때였다.
월터의 아버지인 레이노스 백작이 다이닝룸에 나타난 것은.
“친구를 데려왔나 보구나, 월터.”
“……아버지? 집에 계신 줄 몰랐는데요.”
“방금 황실에서 돌아왔다. 일이 일찍 끝났어.”
무슨 음식부터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바르몬은 월터의 아버지의 등장에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허둥지둥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월터의 룸메이트 겸 친구인…….”
하지만 바르몬은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그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 침대 밑에서 마주한 그 기사.
짧은 시간이었으나 어린 바르몬에게는 억겁의 시간과도 같았기에, 너무나도 선명히 그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월터의 아버지는, 제 부모님을 죽인 살인마였다.
자신의 모든 불행의 원흉.
백작이 말을 멈춘 바르몬을 보며 옅게 웃음을 지었다. 저를 보고 그가 긴장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부디 월터와 즐거운 시간 보냈으면 좋겠구나.”
그가 바르몬을 배려해 빠르게 다이닝 룸을 나섰다.
바르몬은 그간 잊고 있었던 증오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아. 왜 잊고 있었을까.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원수의 나라. 저를 죽이려 했던 살인마들의 나라에 대한 원망을.
역시, 라그라그와 아바스칸투스의 모든 것은 파멸에 이르러야 마땅했다.
* * *
그 후 바르몬은 월터와 인연을 완전히 끊고 복수를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는 연구비 마련과 작은 복수를 겸해 화장품을 하나 만들었다.
자신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이름을 딴,
“바르몬 크니리나.”
바르몬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화장품이 든 케이스를 매만졌다.
연금술을 가미해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피부에 발라서 나타난 부작용은 마법과 신성력으로도 고치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나보다 더 고통받았으면.”
어둠의 경로로 팔기 시작한 화장품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시간이 지나며 부작용이 발생한 사람이 나타났지만, 마법 같은 피부 변화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 크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점 부작용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결국, 바르몬 크니리나는 생산을 종료하게 된다.
꼬리가 길어 붙잡힐까 염려됐던 탓이다.
생산은 종료되었지만, 충분한 연구비와 재미를 본 그는 만족했다.
그래. 치료제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충분한 연구비를 모은 바르몬은 두 제국에 어떻게 복수를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아카데미 시절 모고동에 속해 있던 그는, 모기를 매개로 한 감염병을 생각해 냈다.
모기의 몸 안에 자신이 만든 감염병 바이러스를 주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너무 잘 죽는단 말이지…….”
모기에 바이러스를 주입하면 10초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하나.
모기를 마물로 만든다면?
마물은 마나의 집약으로 인한 뒤틀림 속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마물을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을 만한 체내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한 번으로는 부족하고 며칠에 걸쳐 모든 마나를 쏟아부어야 했지만.
어찌나 많은 마나가 드는지, 다른 곳에 마나를 쓸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의 가설은 옳았다.
인공적인 마나로 마물이 된 모기는 바이러스를 주입해도 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조금만 더 연구한다면 죽지 않는 모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년 후.
바르몬은 읽던 신문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한 약초가가 바르몬 크니리나의 치료제를 개발했다라…….”
상당히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대로만 둔다면 썩어 문드러진 피부를 갖고 살 사람들이었다.
왜 치료제를 만들어서 제 복수를 방해하는지.
이윽고 무언가 떠올린 그가 섬뜩한 미소를 지어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완성되었으니 실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는 바르몬 크니리나의 치료제를 만든 약초가가 살고 있다는 것을 수소문해 찾았다.
“가명부터 지어야겠군.”
바르몬이라는 이름으로 있다가는 의심 사기 딱 좋지 않은가.
그래.
“아칸더스가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