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41)화 (141/161)

141화

번쩍.

눈을 뜨자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담겼다.

수도에 있는 리시안셔스 공작 저택 안, 내 방.

방 구조며 가구며 내가 덮고 있는 이불까지 전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같았다.

어째서 리시안셔스 영지의 공작성이 아닌가 약간의 의문이 들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분명 춥지는 않은데 몸이 으슬으슬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의 음성이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드디어 깼구나, 리엔.”

익숙한 분홍 머리에 벽안.

카르시온이었다.

“카온.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며 쓰려졌잖아. 기억 안 나?”

아.

그랬다. 본능적으로 마나를 담아 카르시온의 이름을 불렀었지.

다 부르지 못한 줄 알았는데, 끝까지 말했나 보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서 리엔 널 따라나선 게 천만다행이야.”

“……내 목소리를 듣고 온 게 아니야?”

“응? 아아, 쓰러지면서 네가 내 이름을 부른 건 들었다니까.”

어라. 왠지 대화가 묘하게 안 맞는 듯한…….

카르시온이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웃음에서 부조화가 느껴졌다.

나는 그 묘한 기분을 떨쳐내려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나는 왜 갑자기 쓰려졌던 걸까.”

카르시온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요즘 나와 이런저런 거 하느라 피곤했던 거 아닐까?”

이런 거 저런 거…….

라고 하기에는 낮에는 따로 할 일을 하고 밤에는 손만 잡고 잔 기억밖에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그와 손잡고 잘만 잔 건 나뿐이었기 때문에, 피곤하다면 그가 더 피곤할 터였다.

“힘든 건 너였을 텐데, 피곤은 네가 더 하겠지.”

“음…….”

카르시온이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이 주제를 꺼리는 기색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단순히 피곤해서 쓰러졌다기에는 이상한 냄새를 맡은 후 의식을 잃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나 혼자만 쓰러진 것도 아니고, 도비도 하늘에서 추락했지 않은가.

맞다. 도비……!

“카온, 도비는 어떻게 됐어?”

“도비?”

그가 무슨 말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는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도비는 그냥 버리고 온 건 아니지? 분명 나 쓰러질 때 하늘에서 추락하는 걸 봤단 말이야!”

“아아…….”

일순간, 카르시온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리엔은 그딴 마물 따위가 나보다 중요해?”

“……뭐?”

평소와 비슷한 질투였다.

하지만 그가 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한 적은 없었다.

내 반응을 본 카르시온이 금세 표정을 푼다.

“아니야. 내가 잠시 질투가 나서 흥분했나 봐.”

그가 다시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도비는 계속 짖어서 네가 깰까 봐 따로 분리해 놨어. 지금 데려올까?”

나는 그런 카르시온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도비를 데려오겠다며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그가 방에서 나간 후 나는 찬찬히 내 몸을 살폈다.

혹시 몰라서 가지고 다녔던 독침 케이스와 카르시온이 걱정된다며 만들어 준 목걸이 형식의 방어 아티팩트가 없었다.

심지어는 공작님께 받은 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끼고 다녔던 리시안셔스 가문의 반지까지.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자 숨이 덜컥 막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긴장한 몸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도비가 쏟아지듯 내게 달려들었다.

“도비!”

“아우우우우!”

나는 울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도비를 세게 끌어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 정말로…….”

카르시온이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턱짓했다.

“이제 됐지? 슬슬 방에서 내보내는 건 어때?”

그러자 내 품에서 빠져나온 도비가 카르시온에게 열렬히 짖기 시작했다.

“크르르릉……, 월! 월!!”

카르시온은 제 앞에서 열렬히 짖는 도비를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너, 아까부터 계속 짖어대는데.”

그가 고개를 숙여 으르릉거리는 도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살면서 마물을 얼마나 잡아 봤을 것 같아?”

“크르릉, 컹! 컹!!”

“그만해, 도비!”

내 목소리에, 그제야 도비가 짖는 것을 멈추고 내게로 다가왔다.

도비가 이빨로 내 옷을 물어 세게 잡아끈다.

나는 그런 도비의 털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진정시켰다.

도비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휘저으며 내 옷을 끌어당겼다.

“착하지, 도비.”

나는 도비의 이빨에서 옷을 빼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비가 내 양말을 물어 잡아끈다.

도비가 힘을 줘 이끌자 너무나도 쉽게 양말이 벗겨졌다.

양말을 버리고 다시 내 옷을 물려고 하는 도비의 얼굴을 잡았다.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괜찮으니까, 내 말 들어.”

단번에 속뜻을 알아들은 듯, 맹렬하게 솟아있던 도비의 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똑똑한 것.

“네가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까 이제 됐어. 카르시온의 말대로 방에서 나가.”

“끼이잉…….”

“도비, 어서.”

도비가 카르시온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내 양말을 물고 천천히 방을 걸어 나갔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도비가 걱정되어 문가에 시선을 주고 있으려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깨고 난 후 계속 떨림이 멈추지 않네, 리엔.”

그의 말대로였다. 내 몸은 아직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카르시온이 내 침대로 가까이 다가온다.

그가 한쪽 무릎을 침대에 걸치자 그 무개에 침대가 출렁이며 움푹 파였다.

카르시온은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쓸었다.

“……안아 줄까?”

느릿하게 시선을 옮겨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푸른 벽안에는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 찬 눈이 자리하고 있었다.

누구를 향한 열망인지 너무도 투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말없이 카르시온의 목 뒤로 손을 넣어 끌어안았다.

그러자 여유로움을 유지하던 그의 몸이 살짝 굳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사뭇 즐거워 보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안는다고 진정이 되겠어?”

내 허리를 안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내 떨림은 한층 더 심해질 뿐이었다.

어떠한 만족감을 느낀 듯 그가 낮게 숨을 뱉어 냈다.

“사랑해, 리엔.”

천천히, 천천히. 그의 손에 뭉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손을 저지하며 물었다.

“카르시온, 너 그거 알아?”

뭔가에 집중하고 있던 그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뭔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나는, 답을 하는 대신 그 주변을 지분거렸다.

먹잇감을 찾듯.

내 행동에 그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하, 리엔.”

그리고 일순간, 나는 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콰득.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게, 무, 슨…….”

그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나를 안은 손에 힘이 풀리며 그의 몸이 넘어갔다.

빠르게 그에게서 떨어진 나는 입 안에 남아 있는 피를 바닥에 퉤, 하고 뱉어냈다.

그리고 아까 해 주지 못한 답을 들려주었다.

“우리 도비는 리시안셔스의 남자들을 제외한 모든 남자들에게 짖는다는 거.”

입안에서 차마 다 내뱉지 못한 피의 비릿한 맛과 독의 쓴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카르시온은 내게 스킨십할 때면 항상 얼굴이 붉어지지. 너처럼 자연스럽게 하는 스킨십 따위는 못한다고.”

결정적으로, 내 남자에게서는 특유의 향이 나거든.

이제는 나도 같은 냄새지.

나는 바닥에 쓰러진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네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아.”

이미 독이 퍼져 정신을 잃은 상태지만…….

그래도 들어줬으면 좋겠어.

“내가 몇 달 전에 연금술로 만들어 낸 물질이 하나 있거든. 돌보다 딱딱한 강도의 고체가 사람의 피가 닿으면 녹는 거야. 어때, 놀랍지 않아?”

나는 싱긋 웃으며 뇌까렸다.

“그래서 내가 주로 쓰는 독이랑 섞어서 이에 박아 넣었어. 나는 그 독에 완전한 내성이 있거든.”

통쾌하지만 어쩐지 허무한 기분이었다.

베고니아라는 이름 없이 이렇게 초라한 존재인데.

이게 뭐라고 그렇게 무서웠을까.

“언젠가 너를 만나는 날이 오면, 어떠한 방식이든 네가 나를 취하고 싶어 할 거라는 걸 알았어.”

그게 어떠한 방식이든 간에.

“렉스 베고니아. 아니, 이제 렉스라고 불러야 하나?”

마침 마법이 풀린 듯 그의 얼굴이 렉스의 얼굴로 돌아왔다.

“고마워. 네 역겨운 얼굴을 가리고 나타나 줘서.”

네가 카온의 얼굴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을 텐데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 풍경 또한 일렁이며 바뀌었다.

내가 알던 공작가의 저택이 절대 아니었다.

“어디서 실력 좋은 마법사를 고용했나 보네.”

이런 식으로 환상 마법을 통해 속이는 건 일회성일 텐데.

어쩌면 그는,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 걸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나에게는 역겹기 그지없었지만.

“그러고 보니 카르시온이 예전부터 내게 당부하던 게 있었지.”

내게 수작을 부리는 사람이 있으면 고x킥을 날려 줄 것.

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다리를 들어 올렸다.

“넌 오늘부터 고x다, 새끼야.”

***

나는 작은 복수를 마친 후 카르시온을 불러냈다.

“카온.”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마법진이 생기며 카르시온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리엔!”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었다.

살짝 놀라 그에게 다가가니 그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서웠어……. 어제 네가 공작성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아서……. 어떻게 된 건 아닐까.”

나를 끌어안은 그의 몸에서 잘게 떨림이 느껴졌다.

쓰러진 지 하루나 지났었구나.

“나는 괜찮아, 카온.”

내게서 떨어진 그가 쓰러진 렉스를 힐끗 보고는 물었다.

“왜 나를 진작 부르지 않은 거야? 저 새끼가 네 입을 막아 놓기라도 한 거야?”

“아니야. 부를 수 있었는데 내가 안 불렀어.”

“왜……!”

“내 손으로 직접 복수하고 싶었으니까.”

그가 조금은 화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위험했어, 리엔.”

차마 내뱉지 못한 변명이 입가에 맴돌았다. 나도 내가 무모했다는 걸 알았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필살기로 애교 부리듯 그에게 안기자 그가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아무 말도 못 한다는 거 알잖아.”

“알아. 그래서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야.”

“영악해.”

“그래도 좋지?”

“……응.”

한참 그의 품을 만끽하던 나는 천천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카온, 내가 항상 아공간에 넣어 놓고 있으라고 한 해독제 있지? 그것 좀 꺼내 줘.”

“……이 새끼를 용서해 주려는 건 아니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아공간을 소환해 내게 해독제를 건넸다.

그에게서 받은 해독제를 렉스의 입을 벌려 흘려 넣었다.

“일단 살려야지. 지금 죽이기에는 쌓인 게 많아서.”

약을 모두 흘려보내고 나자, 나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렉스의 얼굴을 보고 있음에도 떨림이 일지 않았다는 것을.

아아.

이제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을 꺼낼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온몸에 희열이 일었다.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언젠가 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날을.

고통스러웠노라고, 힘들었노라고 울면서 하소연할 수 있는 날을.

그리고, 끔찍했던 기억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기억으로 덮어 버릴 수 있는 날을.

“카온, 너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우리는 렉스에 도비까지 데리고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카르시온이 렉스를 공작성에 딸린 지하감옥에 넣고 오는 동안 나는 물건을 하나 찾았다.

내 방 서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상자.

그 안에는 수많은 녹음 구슬이 들어있었다.

과거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녹음 구슬.

나는 어느새 내 앞에 와 있는 카르시온에게 상자를 건네며 흐리게 웃었다.

아니,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부탁할게. 그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줘.”

이걸 모두 듣고 나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나 확실한 것은,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너로 인해 과거의 내가 위로받을 수 있을 거라는 거겠지.

0